소설리스트

대몽주-1127화 (1,127/1,214)
  • 1127화. 만독(萬毒)이 길을 막다

    심협은 그런 손 파파의 반응을 보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신식을 임랑환에 넣어 북명곤 비늘을 살폈다.

    비늘은 이전과는 다른 게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경지가 크게 정진했고, 황제내경도 대성한 터라 신식의 탐색 능력이 이전보다 몇 배는 강해진 상황이었기에 금방 이전에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알아냈다.

    곤의 비늘 깊숙한 곳에 아주 작은 각인이 새겨져 있었는데, 위치를 나타내는 용도가 분명했다.

    ‘이 각인은 손 파파가 남겨둔 건가? 그때 비늘을 준 것은 날 먼저 보내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정확한 길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던 모양이군.’

    심협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몰아쳤다.

    “여아촌도 동해지연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오는 길에 어떤 위험도 만나지 않은 걸 보면 위치를 찾는 각인이 아주 유용했던 모양이오?”

    그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으음, 눈치챈 겐가……? 더는 속일 수가 없군. 이 늙은이가 저지른 실례를 부디 용서해주시게.”

    손 파파가 움찔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유비서과 유비연, 섭채주 등은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섭채주가 전음으로 묻자 심협 역시 전음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파파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었소. 이 비늘이 없었다면 나 또한 동해지연으로 들어오는 길을 찾지 못했을 겁니다.”

    심협은 손을 들어 손 파파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심 도우의 관용에 감사하네. 그런데 자네 경지가……?”

    손 파파는 그제야 심협의 경지가 변한 것을 눈치채고는 놀란 기색이었다.

    태을 경지에 들어선 뒤로는 한 경지를 올리는 것이 매우 어려운데, 태을 초기였던 심협이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후기에 들어섰단 말인가!

    “기연을 만났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세 분은 진요탑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설마 탑 정상의 보물 때문입니까?”

    심협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심 도우, 걱정 마시오. 우리는 진요탑의 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왔을 뿐이오. 그는 진요탑 5층에 있소.”

    손 파파는 심협이 더욱 꺼림칙해져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

    “5층에 갇혀 있단 말이오?”

    심협은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눈물 요괴의 말에 따르면 진요탑 5층에는 몇 마리의 강력한 요물이 갇혀 있을 터. 손 파파가 구하려는 게 그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랬군요. 저희도 마침 진요탑 5층으로 가려던 참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움직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시라도 위험에 처하면 서로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심협은 자세히 캐묻지 않고 함께 움직일 것을 제안했다.

    “심 도우가 도와준다니 감사할 뿐이오.”

    손 파파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승낙했고, 이제 여섯이 된 일행은 바로 출발했다.

    * * *

    진요탑 5층의 어두운 공간. 광막에서는 심협 등의 모습이 비쳤다.

    “당신 자손들은 지극정성이로군.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구하러 오다니 말이야.”

    광막을 시전한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이전과는 달리 금석(金石)을 서로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욱 귀에 거슬렸다.

    다른 목소리는 침묵했다.

    “당신을 풀어주는 건 문제 없지만, 그건 내 일이 끝난 후임을 잊지 마.”

    금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걱정 마라. 내 만독강기(萬毒罡氣)가 지키는 한 누구도 통과할 수 없다.”

    다른 목소리가 마침내 답했다.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

    금석의 목소리가 경고하듯 말했다.

    * * *

    심협과 일행이 이후 어떤 적도 마주치지 않고 4층 끝에 도착해보니 원조와 문수보살이 여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이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두 사람 앞의 통로에는 보라색 독무가 가득했고, 통로의 벽은 독무에 완전히 부식되어 끈끈한 점액이 떨어질 때마다 치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이 독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쪽 구역만을 차지한 채, 밖으로 퍼지지는 않았다.

    독무 깊은 곳에 어렴풋이 보이는 몇몇 존재가 4층 통로 끝을 지키고 있었다.

    원조와 문수보살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휙 돌아봤다. 원조의 눈빛은 차갑게 변한 반면, 문수보살의 눈빛은 담담했다.

    “쳇! 빨리도 왔군.”

    원조가 심협을 힐끗 보더니 차갑게 비웃었다.

    “두 분의 신통으로 독무에 막혀 있다니, 감탄했습니다.”

    심협은 웃으며 받아쳤다.

    심협과 섭채주 등은 보라색 독무를 보며 의아한 기색이었던 반면, 여아촌 사람들은 눈을 반짝였다.

    “이 독무는 매우 강력해 어떤 법보와 신통도 바로 녹인다. 자신 있으면 네놈이 한번 해보던가.”

    원조는 심협에게 원한이 많았기에 차갑게 말했다.

    심협은 그를 무시하고 손 파파를 돌아봤다.

    “여아촌은 맹독 신통에 능하지 않습니까? 저 독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손 파파는 대답 대신 독무 앞으로 다가가더니 결인하여 하얀 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마치 엿처럼 끈적끈적한 독무는 곧장 하얀 빛을 집어삼켰고, 미동도 없었다.

    손 파파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노란빛이 감도는 작은 거울을 꺼내 이번에는 노란색 빛줄기를 발사했다.

    이번에는 보라색 안개가 요동쳤지만, 이내 노란 빛줄기도 집어삼켰다.

    “틀림없군. 이건 만독강기요.”

    “만독강기?”

    “나처럼 독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독물을 이용하여 경지를 올린다오. 각종 맹독을 자신의 몸에 넣는데, 수용할 수 있는 맹독이 많을수록 더 강해지지. 우리 여아촌에는 백 종류의 맹독을 넣은 자가 적지 않고, 천독(千毒)을 넣은 자도 소수이긴 해도 있소. 허나 만독(萬毒)을 넣은 자는 천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소.”

    심협은 문득 손목의 임랑환을 바라봤다. 만독혼원주에도 만독이라는 칭호가 있으니 저 독무를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 만독강기의 파훼법도 알고 있나요?”

    섭채주가 손 파파에게 물었다.

    “섭 도우는 날 너무 높이 평가했나 보오. 내 독공은 천독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거늘 어찌 만독강기를 파훼할 수 있겠소?”

    손 파파는 쓰게 웃었다.

    심협은 예상했음에도 내심 실망했으나, 잠시 생각한 끝에 손을 휘둘렀다.

    커다란 금색 손이 나타나 보라색 독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 독무는 빠르게 금색 손에 침투했고, 휘황찬란하던 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보라색으로 변했다. 맹독이 심협의 본체로 침투해오기 시작했다.

    “심 오라버니, 어서 손을 떼세요. 만독강기는 독공의 최고 경지라 만물을 독살하고 공간까지도 부식할 수 있어요. 몸에 닿기라도 하면 누구도 구할 수 없어요!”

    지켜보던 유비서가 기겁하여 서둘러 말렸고, 심협은 얼른 금색 손과의 연결을 끊었다.

    보라색 독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입처럼 이미 보라색으로 변한 커다란 손을 집어삼켰다.

    “이 독은 정말로 까다롭군요. 한데 독무 안의 저것들은 왜 아무렇지 않은 거죠?”

    섭채주가 독무 깊숙한 곳의 존재들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그건…….”

    유비서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약하긴 하나 저들은 모종의 법칙 파동을 일으키고 있네. 아무래도 법칙의 힘이 주위의 만독강기를 억제하여 맹독의 침투를 막고 있는 듯하군.”

    그간 말이 없던 북명곤이 불쑥 설명했다.

    심협은 그의 말을 듣고는 감지력을 높였다. 그러자 독무 깊숙한 곳에 있는 자들의 몸에서 정말로 법칙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만독강기를 억제할 수 있는 법칙의 힘이라면 아마도……?”

    유비연이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지만, 손 파파가 힐끗 보자 바로 입을 닫았다.

    심협은 두 사람의 반응에 의아했다.

    “유 도우가 방금 무슨 법칙이 만독강기를 제압하고 있다고 한 것 같은데요?”

    섭채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비연은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얼른 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손 파파는 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화령자, 만독강기를 억제할 수 있는 법칙이 뭔지 알겠어?”

    심협이 전음으로 물었다.

    “맹독 신통은 나도 잘 모르니 확신은 할 수 없다. 허나 이전에 고서에서 본 바로는 독의 법칙만이 세상 모든 맹독을 억제할 수 있다.”

    “독의 법칙? 세상에 그런 법칙도 있나?”

    “법칙의 도는 변화가 천차만별이고 대천세계 곳곳을 아우르고 있다. 넌 이제 막 법칙의 도를 깨우쳤으니 앞으로 더 많이 접하다 보면 그 심오함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 파파를 돌아봤다.

    “손 파파, 맹독 신통에 관해서는 여아촌이 삼계 최고 아닙니까? 이렇게 대단한 독무를 보고 있자니 귀파 외에는 떠오르는 곳이 없군요. 세 분이 구하려는 분이 귀파의 선배입니까? 이 독무는 그의 것이고요?”

    “정말로 심 도우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군요. 추측대로 우리가 구하러 온 것은 본 파의 선배이고, 이 독무도 아마 그녀가 시전한 것일 거요.”

    손 파파는 머릿속에 심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움찔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전음로 답했다.

    “그게 누구죠?”

    “심 도우, 양해해 주시오. 그분의 허락 없이는 그분의 이름과 내력을 함부로 말할 수 없소.”

    “귀파는 본래 은밀함을 중시했으니 더는 강요할 수 없겠군요.”

    전음을 보내는 심협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됐다.

    눈물 요괴의 말대로라면 조룡의 혼은 5층에 있는 대요들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조룡이 여기에 독무를 설치한 목적은 길을 막기 위함일 터. 그렇다면 그들은 진요탑 5층에서 무슨 큰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흑룡의 몸을 연화하거나 북명곤이 말한 보물을 제련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심 도우, 내 공간 신통을 시전하면 여기를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북명곤이 초조한 기색으로 심협에게 전음을 보냈다.

    “조급할 것 없습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아마 유용할 겁니다.”

    흔들리던 심협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이더니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전음으로 답했다.

    북명곤의 그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자신도 속수무책인 이 독무를 파훼할 방법이 심협에게 있단 말인가!

    심협은 긴 설명 없이 섭채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섭채주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하얀 옥병을 꺼냈다. 바로 옥정병이었다. 그녀는 옥정병을 향해 결인하더니 보라색 독무 옆에 내려놨다.

    그녀가 손을 살며시 들고 손가락으로 병 위의 허공에 가볍게 흔들자 병 입구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빛이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했다.

    콰쾅!

    격렬한 소리와 함께 하얀색 소용돌이에서 강력한 흡입력이 보라색 독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때, 병 근처에서 뇌광이 번쩍이더니 심협이 재빨리 나타나 오른손으로 허공을 베었다.

    손에서 뿜어져 나간 커다란 금뢰는 뇌전의 칼날이 되어 보라색 독무를 강하게 베었다.

    꽈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금뢰의 칼날이 보라색 독무를 베자 사람 머리통만 한 보라색 독무가 하얀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소용돌이 절반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섭채주는 굳은 얼굴로 입에서 하얀 빛을 뱉어내 곧바로 옥정병으로 넣었다. 병 입구에서 갑자기 뿜어져 나온 겹겹의 연꽃잎 같은 하얀 빛이 보라색 독무를 겹겹이 감싸고는 독무의 침식을 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보라색 독무의 부식성은 놀랍도록 강해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하얀 소용돌이는 머지않아 완전히 보라색으로 물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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