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화. 보라색 조롱박
백천은 눈앞의 얼음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띠고는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다시 진동 소리가 들려오더니 허공에 매우 기이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백천은 얼음에 담긴 법력이 빠르게 흡수되면서 녹기 시작해 더는 서원반잠을 가둬둘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장 가장 앞에 있는 두 마리 서원반잠 옆에 나타나 손을 뻗어 검은색 그림자로 곤충을 뒤덮었다.
다음 순간, 백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힘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그림자 속의 얼음이 순식간에 일그러지자 두 마리 서원반잠의 몸도 함께 일그러지며 펑 하고 터졌다.
두 마리 서원반잠이 죽으면서 얼음도 완전히 녹았지만, 곤충들은 처음처럼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마치 위험을 눈치챈 것처럼 곧장 몸을 돌려서 빠르게 돌아갔고, 언덕에 비스듬히 박힌 대나무 장대 옆에 도착하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그 보라색 조롱박 안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를 본 백천의 눈에 경이로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갔고 눈은 대나무 장대와 조롱박에 고정되었다. 온통 그 보물을 취할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데 그때, 하얀 화광이 비단처럼 위에서 빠르게 날아왔다.
위험을 감지한 백천이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는 눈으로 그 빛이 날아온 곳을 바라봤다.
협곡 위에서 내려온 하얀 빛은 대나무 장대 멀지 않은 곳에 내려앉았다. 광망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세 명의 여자가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여아촌의 손 파파와 유비연, 유비서 자매였다.
백천은 그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유웅곤 혼자서 진선의 요물들만을 이끌고도 여아촌 전체를 전멸시키기 직전까지 몰고갔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 자신은 부상이 가볍지 않고 일전에 심협과 싸우느라 소모가 컸기에 굳이 세 사람을 상대할 마음은 없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백 맹주, 우리 여아촌을 공격해놓고 우리를 모른다고 하는 거요?”
손 파파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녀는 유비서와 유비연 앞으로 나와 은연중에 두 사람을 보호했다. 사실 그녀로서도 이 만요맹 맹주가 매우 꺼림칙했다.
“믿든 안 믿든, 그때의 공격은 부하가 제멋대로 움직인 것뿐이오. 난 공격할 뜻이 없었소.”
백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백 맹주가 이리 말씀하시니 당연히 믿어야겠지요. 다만, 당신들의 공격으로 여아촌의 피해가 막심하니 여기 있는 이 두 개의 법보를 만요맹의 보상이라 알고 가져가겠소.”
손 파파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비서는 계속해서 경계했고, 유비연은 손 파파의 뜻을 이해하고는 곧바로 푸른 대나무 장대에 걸린 보라색 조롱박을 떼려 했다.
“어딜!
백천은 길게 말하지 않고 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하얀 한기가 솟아오르더니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언덕 위의 세 여아촌 여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손 파파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의 발아래에서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기의 장벽이 돌격해오는 하얀색 한기와 충돌했다.
콰쾅!
쌍방이 충돌하면서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손 파파는 뒤로 밀려났고, 지팡이에도 하얀 서리가 맺혔다.
“법칙의 힘! 역시 강하군.”
손 파파는 감탄했지만, 내심 기뻐했다. 백천이 부상을 당한 상태임을 간파한 것이다.
이 무렵, 유비연은 이미 푸른 대나무를 뽑았고, 다른 손으로는 보라색 조롱박을 떼어내 환하게 웃으며 손에 꼭 쥐었다.
“파파, 성공했습니다.”
“잘 챙겨라, 바로 뜬다.”
손 파파가 지팡이로 땅의 서리를 짚으며 말했다.
“네!”
유비연이 짧게 대답하고는 두 개의 보물을 저물 법기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갑자기 몸이 굳더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어떻게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손 파파와 유비서는 온통 백천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비연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림자는 점차 입체적으로 변하더니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유비연의 새하얀 목을 쥐더니 힘을 주었다.
유비연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고, 목뼈가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강한 힘이 압박해오자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이 검은 그림자의 움직임은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법력 파동도 흘러나오지 않아서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목이 졸려서 죽어도 손 파파 등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유비연의 눈이 뒤집히고 신식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데 쌍둥이 사이의 촉이었을까? 유비서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해 바로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그녀가 경악하며 무기로 검은 그림자를 찔렀다.
손 파파도 돌아보려 했지만, 백천의 공격에 전력을 다해 지팡이를 휘둘러야 했다.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한기가 허공에서 폭발하자 손 파파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백천도 다시 물러났다.
한편, 검은 그림자는 유비연을 죽이려던 것을 포기하고 손을 내밀어 유비연이 들고 있던 대나무 장대와 보라색 조롱박을 빼앗으려 했다.
유비연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쓰러지면서도 두 개의 법보를 쥔 손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힘을 더 쓰려는 순간, 유비서가 다시 검으로 그 팔을 베었다.
검은 그림자는 어쩔 수 없이 대나무 장대를 잡은 손을 풀고는 보라색 조롱박을 꽉 쥐고 있는 유비연의 손목을 내리쳤다.
콰직!
“아악!”
강력한 힘에 유비연은 손목이 부러졌고, 더는 보라색 조롱박을 잡고 있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가 재빨리 조롱박을 가지고 가려는데, 손 파파가 쫓아와 얼른 지팡이로 허공을 찍어 지팡이 허상으로 이 그림자를 공격했다.
하지만 지팡이 허상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검은 그림자는 보라색 조롱박을 가지고 협곡의 그림자로 들어가 사라졌다.
곧이어 유비서는 그림자가 물처럼 움직이더니 백천 발아래의 그림자로 흡수되듯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다.
백천이 손을 들자 땅에서 보라색 조롱박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손 파파 등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뒤로 돌아서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유비서가 바로 쫓아가려 했지만, 법력 파동의 여운만 느껴질 뿐, 백천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망갔잖아!”
그녀가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놔두거라, 비연의 부상을 돌보는 게 먼저다.”
“파파, 저는 괜찮아요. 손목뼈만 부러진 거예요.”
목을 틀어 쥐였던 유비연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는 핏기가 가시지 않았고 짙은 원망이 흘러나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다행히 외상뿐이구나.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거라.”
손 파파는 상태를 살펴본 후 부러진 뼈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파파, 그놈을 찾아내면 반드시 제가 죽일 겁니다.”
유비연이 이를 갈았다.
“그자는 태을 경지의 수사다.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간신히 몰아냈을 뿐이야. 다음에 만나면 복수할 생각하지 말고 조심하거라.”
손 파파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비연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파파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건성으로 듣지 말고 파파의 말씀을 명심해요. 언니.”
유비서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알겠다고!”
유비연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파파, 이제 저희는 어떡하죠?”
유비서가 다시 물었다.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손 파파가 뒤에 있는 초가집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 사람을 곧바로 초가집으로 향했다.
* * *
절벽의 동굴. 백천이 어둠을 뚫고 나오더니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는 보라색 조롱박을 자세히 살폈다.
조롱박은 촉감이 매우 매끄러웠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였다. 한데 바닥에는 뭔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만독호로(萬毒葫蘆).
이 글을 읽은 그는 흠칫 놀라더니 상처를 정양하는 것도 잊고 보라색 조롱박을 양손 손바닥에 끼고는 전력을 다해 빠르게 연화하기 시작했다.
한참 뒤, 보라색 조롱박의 64도 금제가 연화되자 백천이 천천히 두 눈을 뜨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역시 상당한 보물이로군. 지금 내 상태로 금제를 더 연화하려다가는 부상이 악화되고 원신마저 소모될 수 있다.”
백천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조롱박을 저물대에 넣은 뒤 단약을 먹고 정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눈동자도 빛나기 시작했다. 상태가 호전되자마자 그는 조롱박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서둘러 만독호로를 꺼냈다.
그가 손바닥으로 만독호로를 움켜쥐고 법력을 발동하자 조롱박 입구에서 광망이 번쩍였다. 이어서 10여 마리의 곤충이 쏜살같이 나타나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빙빙 돌았다.
“서원반잠!”
백천은 크게 기뻐하며 심념을 움직였다. 그러자 엄지손가락만 했던 서원반잠의 몸에서 광망이 번득이더니 금세 물소만 해졌다. 타고 다녀도 될 정도였다.
그가 다시 심념을 움직이자 이번에는 개미만 해졌고, 날갯짓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영력 파동도 매우 미약하게 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서원반잠이 이 상태로 나를 기습했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거야.”
백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원반잠을 거둔 그가 다시 만독호로를 발동하자 입구가 보랏빛으로 빛나더니 보라색의 독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이 안개가 지나가는 곳마다 치익 소리와 함께 공간 자체가 침식됐다.
백천은 매우 흡족해하며 여러 차례 시도해봤다. 만독호로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안에는 독 연기와 독 안개가 모두 들어 있었다. 독액과 독침은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었다.
또한 서원반잠 외에도 수많은 독충과 독물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이 보물과 내 그림자 잠행이면 충분하다! 심협, 내 반드시 네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백천은 광기 어린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부상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 * *
북명곤이 날아가자 전방의 안개가 흩어지면서 양쪽으로 물러났다.
심협은 그 등에 탄 채 먼 곳을 바라봤다. 현재 깊고 어두운 협곡을 지나고 있었는데, 시야의 끝에는 산처럼 이어진 건축물이 보였다.
건축물은 휘황찬란해서 황제의 궁전 같았고, 매우 먼 곳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건물들을 바라봤다. 안에는 사람이나 살아 있는 생물은 없었다. 그저 우뚝 솟은 불탑과 가짜 산 그리고 대량의 금색 궁전이 퍼져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궁전은 깔끔하지도, 정결하지도 않았다. 곳곳에 잡초가 자라 있었고, 적지 않은 궁전이 이미 파손되고 무너졌다. 오랫동안 황폐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가 신마의 우물 입구가 있는 곳이네.”
북명곤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더니 그의 몸이 갑자기 줄어들었고, 안개 속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심협 등을 등에서 떨어트렸다.
심협 등은 몸을 가누고는 북명곤을 바라봤다. 변신한 모습은 이전과는 달리 회색 베옷을 입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심협이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서천(小西天) 안의 녀석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살의를 품고 있네. 지금은 저들과 마주치기 싫으니 모습이랑 기운을 조금 바꾼 걸세.”
뒤이어 그의 몸에서 광망이 빛나다가 바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기운이 줄어들어 진선기가 되었고, 홍황(洪荒) 요족의 독특한 기운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본 심협은 무척 놀랐다. 북명곤의 변화술은 기운까지 완전히 바꿨으니 황정경의 칠십이변보다도 정교해 보였던 것이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며 앞을 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방촌산에서 봤던 신마의 우물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심협의 의문을 알았는지 북명곤이 말을 이었다.
“이곳은 공간의 힘에 잘려온 곳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비경 소천지(小天地)처럼 변한 것뿐일세. 신마의 우물이 그 안에 있지.”
“저 궁전들도 신마의 우물과 함께 공간의 힘에 잘려 온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