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화. 전승
“오라버니, 지금이라도 현양화마 신통을 포기하세요. 이미 힘의 법칙을 깨달았으니 머지않아 어떤 마족도 오라버니를 당해내지 못하게 될 거예요.”
섭채주는 넋이 나간 심협을 보고는 현양화마 신통에 상심한 줄 알고 위로했다.
심협은 그녀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그는 순양검의 힘을 빌려 체내의 마기를 제압했는데, 이 마기는 대체 어떤 내력이 있는 건지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태로도 몰래 본명원기에 침투했다. 이제 원천강이 전수해준 신목은택도 소용이 없었다.
특히 최근 연달아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이나 마기를 일으켜 적을 막은 탓에 마기의 침투가 더 빨라졌고, 현재 본명원기의 절반은 마기에 동화되었다.
본명원기가 이 정도까지 침투됐다면 신혼을 뽑아 다시 살아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마기를 완전히 길들이지 못하면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피에 굶주린 괴물이 될 것이다.
심협은 최근에 경지가 올라가면서 모든 신경을 현양화마 신통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살아남기 위함이기도 했다.
희망이 보인다 여겼거늘, 선마를 같이 수련하는 게 막다른 길일 줄이야!
‘어떻게 해도 이 환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내가 이대로 마기의 손에 죽을 것 같은가!’
심협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오라버니, 현양화마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수련하려는 거죠?”
섭채주는 심협의 표정을 보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물었다.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심협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라버니가 현양화마 신통을 중시하는 건 알고 있어요. 이 신통이 확실히 강하니까요. 그렇다고 목숨을 걸려는 건 아니죠?”
섭채주는 화가 나는 것을 참았지만,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런 섭채주를 본 심협은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양손을 높이 들었다.
칠흑 같은 두 줄기의 거대한 검은 빛이 천지를 뒤엎을 두 마리 마룡처럼 뿜어져 나오자 허공이 강하게 흔들렸다.
이를 본 섭채주는 순간 당황했다.
“이토록 강력한 마기라니! 순수 혈통의 마족도 이 정도로 순수한 마기를 갖기는 쉽지 않네! 허나 인간족인 자네에게 이런 마기는 복이 아니라 화근일세.”
헌원 잔혼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온몸의 경맥에는 이미 마기가 침투했고 본명원기도 절반이나 마화된 터라 이미 제거할 수 없습니다. 지금 현양화마 신통을 포기한다 해도 체내의 마기는 계속해서 제 몸을 삼켜갈 터. 조만간 피에 굶주려 발광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 길이 어렵다 해도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심협이 손에서 마광을 거두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럴 수가……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요?”
섭채주가 몸을 떨며 말했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리고 현양화마 신통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으니 마기를 제어할 수 있을 줄 알았지. 한데 그 모든 게 허사였다니…….”
심협이 자조하듯 내뱉었다.
섭채주는 한참이나 망연자실해 있더니 갑자기 헌원 잔혼 앞에 엎드렸다.
“헌원 선배님, 방금 고인의 도움으로 체내의 마기를 제거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어떤 비법을 쓰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라면 오라버니 몸의 마기도 제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섭 소우, 일어나게. 내 돕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때 내 몸의 마기를 제거했던 것은 전부 우연히 얻은 멸마(滅魔)의 보물, 피사주(辟邪珠)와 그 고인의 도움 덕분이었네. 피사주는 이미 파괴됐고 그 고인은 은둔 선인이라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지.”
헌원 잔혼이 손을 휘둘러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섭채주를 일으키며 말했다.
섭채주는 기대와 다른 대답에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채주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내 비록 수련의 자질은 평범하나 어째서인지 선마의 힘을 융합하는 데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내 기필코 성공할 거야.”
그의 말은 단순히 섭채주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말로 선마 두 힘을 융합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현양화마 신통을 만들어낸 것이 그 증거 아니겠는가. 게다가 심협에게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으니, 바로 혼돈흑련이었다.
이 물건은 천지가 혼돈하여 아직 개벽하지 않았을 때 탄생해 모든 원기를 받아들이는 신통이 있으니 이것이 완전히 자라난다면 선마 두 힘을 융합하는 데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원구가 약속한 융원고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알겠어요. 난 오라버니를 믿어요.”
섭채주는 심협의 강인한 눈빛을 보자 왠지 모를 힘이 솟구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 소우, 기어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겠다는 건가?”
헌원 잔혼이 엄숙한 표정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힘을 다해 싸워보는 수밖에요.”
심협이 고개를 들더니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에 보이는 것은 절망의 길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이제 힘껏 달릴 일만 남았으니까.
“그렇군. 훌륭해! 하하하! 소우의 의지는 잘 봤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 하하하하!”
심협을 빤히 바라보던 헌원 잔혼이 껄껄 웃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두 사람 모두 절망할 것 없네. 선마동수(仙魔同修)가 예부터 막다른 길이라고 불렸지만, 심 소우 말대로 성공 여부는 사람의 노력에 달린 법이지. 내 지금까지 신마의 우물에 머물면서 이 막다른 길을 돌파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네.”
헌원 잔혼이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이 말을 듣고는 의아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더니 지금은 또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
“그럼 선배님은 그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섭채주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방법을 찾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희망을 보기는 했네. 내 고심하여 공법을 하나 창안했는데, 이를 마지막까지 수련한다면 선마동수를 돌파할 수 있을지도…….”
헌원 잔혼의 말에 섭채주가 기뻐하며 자세히 물으려는데, 심협이 손을 들어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선배님, 하실 말씀이 있다면 돌리지 말고 해주십시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군. 알겠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공법은 심 소우에게 제격일세.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결심과 끈기가 필요한 공법이지. 한 치의 망설임이 실패로 이어질 수 있네. 방금 한 말들은 심 소우에게 그런 결심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네. 기분 나빴다면 이해해주게.”
헌원 잔혼은 심협의 태도에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공수하며 사과했다.
“그렇군요. 선배님께서 창안하신 신공에 맞는 전인(傳人)을 찾는 것이니 조심스럽게 알아보시는 게 당연한 일이죠.”
심협도 마주 공수하며 답례했다.
“선배님, 오라버니 성정이 거칠어서 방금은 실언하였습니다. 부디 오라버니를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섭채주가 심협을 흘겨보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닐세. 나는 오히려 이런 솔직한 성격을 좋아하지.”
헌원 잔혼도 개의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선배님의 시험을 통과한 겁니까? 제게 공법을 전수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네. 다만…… 심 소우가 이 공법을 대성하게 된다면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줬으면 하네.”
헌원 잔혼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어떤 일입니까.”
“치우를 죽여주게.”
심협은 이미 예상했지만, 막상 그 말을 듣게 되니 허탈했다.
“치우를 죽이라니요. 그는 불사불멸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자를 죽일 수 있었다면 삼계의 선불 대능들이 진즉 죽였겠지요.”
섭채주가 참지 못하고 나서서 말했다.
“치우는 모든 마(魔)의 선조이고 마도의 수많은 법칙을 정점의 경지까지 수련한 자라 누구도 대적할 수 없지. 또한 진마불멸지체(眞魔不滅之體)를 수련하여 천지에 마기가 존재하는 한 아무리 심각한 중상을 입어도 회복할 수 있네. 그러니 분명 불사불멸이긴 하지. 허나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결국은 방법이 있는 법. 그것만 찾아내면 쓰러트릴 수도, 죽일 수도 있네.”
“선배님 말씀은…… 선배님의 공법으로 치우를 죽일 수 있다는 겁니까?”
심협이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는 꿈속 세계에서 치우와 싸워봤다. 최후의 일격에 상대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도 섭채주처럼 치우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이는 것은 자신의 숙원이기도 했다.
“치우와 여러 번 싸워본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그자의 가장 두려운 점은 불사불멸의 몸이라는 것일세. 지금 삼계에는 그에 대적할 신통이 없지. 나의 이 공법은 선마, 두 힘을 융합할 수 있으니, 원만의 경지에 이르면 전설의 반고지체(盤古之體)를 익힐 수 있을 걸세.”
“반고지체!”
심협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는 고대 서적에서 반고지체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었다. 반고 대신이 남긴 혈맥 신체(神體)로, 모든 원기를 흡수할 수 있고 어떤 공격도 무효화하며, 세상 모든 힘을 조종하여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천지를 파멸할 수 있다는 전설.
다만 이는 기록만 남았을 뿐, 현실에서는 나타난 적이 없다. 그러니 반고지체는 허황된 상상일 뿐이라 여겼다.
“반고지체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해도 후천적인 수련으로 달성할 수 있을까요?”
심협이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반고지체는 정말로 존재한다네. 과거에 나도 운 좋게 본 적이 있지. 바로 내 마기를 제거해준 고인이었네. 말하자면 나의 이 반고진공(盤古眞功)은 그 신체를 모방하여 만든 셈이지. 이 공법을 원만의 경지까지 수련하면 진정한 반고지체처럼 세상 모든 원기를 제어할 수는 없을지라도 선마 두 힘을 자유롭게 이끄는 것은 가능할 걸세.”
“그 공법이 반고진공이로군요. 그 공법에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신통이 있다면 어떤 마공도 억제할 수 있을 테니 분명 치우도 죽일 수 있겠지요.”
심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눈빛이 조금씩 밝아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섭채주의 표정도 환해졌다.
치우를 죽일 수만 있다면 삼계뿐만 아니라 심협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다만…….”
“다만이라니, 혹시 반고진공을 수련하려면 특정한 혈맥이나 체질이어야만 하는 겁니까?”
헌원 잔혼이 갑자기 머뭇거리자 심협이 얼른 물었다.
“그건 아닐세. 반고지체는 천지가 잉태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내가 오랜 기간 고심하며 연구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람 힘에는 한계가 있어 이 공법을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네. 선마 두 힘의 융합을 9할까지는 이루었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어떻게 가야 할지…… 만 년이나 고심했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지.”
헌원 잔혼이 조금 무안한 듯 멋쩍게 웃었다.
“네? 그럼 아직 미완성이란 소리잖아요? 그런데 오라버니더러 어떻게 수련하라는 말씀이죠?”
섭채주의 얼굴에 돌았던 화색이 싹 사라졌다.
심협도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는 말없이 헌원 잔혼을 바라봤다.
“선마를 완전히 융합하는 것은 역천의 도인 만큼 수만 년을 고심해도 여전히 알아낼 수 없었네. 허나 선마 두 힘을 9할까지만 융합해도 충분히 치우를 죽일 수 있을 걸세.”
헌원 잔혼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9할이면…… 선마동수의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겁니까?”
심협이 잠시 생각하더니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