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화. 각인
손오공 등이 협곡 깊은 곳으로 사라지자마자 멀지 않은 곳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파동이 일어나더니 원조와 미소가 나타났다. 다만 도산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진영상공간영부가 저 문수의 손에 있었군. 서천 영산 땡중들도 정신이 나갔지, 저 중요한 영부를 문수 같은 놈에게 맡기다니 말이야.”
원조가 아래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손오공은 방촌산 보리 선조의 제자이고 또 지금은 불문에 몸을 담고 있다고는 해도 서천 영산은 그를 완전히 믿지 않으니 대진영상공간영부를 문수 보살에게 맡긴 것이겠죠. 뭐,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미소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맞는 말이오. 영부가 손오공에게 있었으면 빼앗기 번거로웠겠지. 허나 문수라면…… 훗.”
원조는 씩 웃더니 검은 빛이 되어 아래로 날아갔고, 미소도 하얀 빛이 되어 뒤를 따랐다.
* * *
광장의 금색 대진 안. 심협과 섭채주는 금색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주위에는 수많은 금색 구름이 떠다녔고, 바깥은 잘 보이지 않아서 마치 환상 같았다.
심협이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주위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수많은 금사가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나 쏟아져 내렸다.
그는 바로 혈백원번을 꺼내 살짝 휘둘렀다. 짙은 혈광이 순식간에 그와 섭채주를 보호했다. 혈광은 물결처럼 출렁여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아 어떤 공격으로도 흔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한데 금사는 혈백원번을 가볍게 뚫고 들어와 두 사람의 몸을 관통했다.
심협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 금사들은 그의 육체와 법력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마치 빨갛게 달군 바늘이 파고든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머릿속의 신혼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섭채주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아리따운 얼굴에 고통이 가득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신혼 가장 깊은 곳을 찌르는 고통이 두 사람의 모든 행동력을 제압해 법력마저 운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수많은 금사가 신혼을 완전히 부수어 지각도 신념도 없는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어버릴 터였다.
그 무렵, 만요맹 요족들도 금색 광진에 들어서자마자 금사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들은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노수가 검은색 나산(羅傘) 법보를 꺼내 모두를 보호했다.
토혼축 앞에 핏빛 구슬이 나타나 정광을 번득이자 심협과 섭채주의 상황이 떠올랐다.
“끌끌, 분수도 모르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낙백금광(落魄金光)에 뛰어들다니, 가만히 둬도 곧 사라지겠군그래.”
다른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는 크게 웃었다.
“저 둘은 이제 신경 쓰지 말자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낙백금환대진(落魄金幻大陣)을 돌파하는 것이니 이 일에 모두 힘을 합치세.”
“노 도우,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힘이 필요하다면 만요맹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한데 이제 어찌 해야 합니까?”
노수의 말에 유웅곤이 바로 물었다.
백천은 눈빛을 잠시 번득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낙백금환대진은 허와 실이 결합해 평범한 환진과는 다르다. 진안(陣眼)이 있는 곳을 찾아내 환진의 맥락을 파악하여 벗어나거나, 강력한 힘으로 환진을 강제로 뚫고 나가는 방법뿐이다.”
“노 도우, 역시 대단합니다. 그 짧은 사이에 방법을 두 개나 모색하다니요. 하면, 어떤 방법을 쓰시겠습니까?”
금전이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나와 토혼축은 법진과 환술에 정통하지 않으니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을 쓸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전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낙백금환대진은 절반이 혼력(魂力)으로 만들진 것이라 법력으로는 소용이 없다. 오직 혼력 법보만이 효과가 있지. 나에게 수많은 혼백을 모은 법보가 있으니 이것으로 이 환진을 부술 수 있을 게다. 다만, 이 법보를 발동하는 것은 매우 힘들지. 나와 토혼축이 힘을 합쳐야만 하니 이 귀골산(鬼骨傘)은 너희가 유지해라.”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문제없으니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금전이 자신 있게 말했다.
노수가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검은색 나산을 넘기려던 때였다.
“엇! 여기서 빠져나온다고?”
토혼축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수과 백천이 돌아보니 핏빛 구슬 안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협의 두 눈이 갑자기 붉게 빛나더니 실제와 같은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핏빛 구슬은 영상만 비춰줄 뿐, 소리와 기세가 전달되지는 않지만, 보기만 해도 이 마기의 폭발하는 위세가 강력했다. 주위의 허공이 흔들리고 금색 구름도 떨렸으며, 떨어져 내리는 금사들이 튕겨 나가는 게 보였다.
심협이 전력으로 몸을 자극해 마기를 폭발시키자 마침내 약간의 틈이 생겼고, 그 틈에 부주진신법을 운공하여 머릿속 신혼의 힘이 바로 거대한 산의 허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수천 개의 금사가 떨어지자 머릿속에는 다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몸의 통제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장 전신편을 소환하여 그 안의 서혼대진을 발동했다.
콰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색 소용돌이가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나 금사들을 휩쓸었다.
이 금사들은 신혼을 해치는 공격이니 자체에 신혼이 담겨 있었기에 서혼대진과 상극이라, 검은색 소용돌이에 휩쓸리자 바로 희박해졌다.
실오라기 같은 안개 모양의 금빛이 서혼대진에 흡수되었다. 금색 안개들은 순수한 혼력이었기에 서혼대진에 연화되자마자 거의 소모되지 않고 심협의 신혼에 주입됐다.
방금 환진에 당해서 손실됐던 혼력이 빠르게 회복되자 창백했던 얼굴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섭채주도 서혼대진의 도움으로 한시름 놓았고, 몸과 법력의 제어가 회복되자 바로 곤륜경을 소환했다.
검은 그림자가 뿜어져 나와 두 사람을 뒤덮었다.
섭채주가 기이한 주문을 읊자 주위의 검은 그림자가 바로 줄어들어 10여 장 크기의 칠흑 같은 광역(光域)을 만들었다. 바로 암흑지역(暗黑之域) 신통이었다.
암흑지역은 모든 원기를 흡수할 수 있는데, 금사는 이미 서혼대진에 대부분의 힘을 잃은 상태였기에 단숨에 흡수되어 완전히 소멸했다.
흑암지역과 서혼대진은 힘을 합쳐 허공에 있는 금사를 모두 막아냈다.
“이럴 수가! 낙백금광을 막아내다니!”
노수가 경악해 외쳤고, 토혼축과 백천, 유웅곤, 금전 등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구슬을 바라보았다.
한편, 심협은 떨어지는 금빛을 전부 막아내고는 긴장이 풀어졌다.
“이건 도대체 무슨 금제지? 환진처럼 생겼는데 이렇게 매서운 신혼 공격이라니!”
그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낙백금광환진이군. 허와 실이 합쳐져서 양의미진진보다 더 많은 변화를 일으키지. 이 진법에 대해 알지 못하면 절대 파훼할 수 없다.”
화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파훼법도 알아?”
심협이 기뻐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핵심은 낙백금광을 막아내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다른 것은 시도조차 할 수 없지. 너희 둘은 계속해서 금광을 막아라. 파훼법은 내가 찾아보마.”
화령자가 소요경에서 나오더니 곡현성반으로 하얀 법진을 발동했다. 어떤 법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령자가 손으로 법진을 찍고는 삼소묘음술을 시전하자 갑자기 수많은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근처의 광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협이 보니 이 하얀 빛들은 수많은 음파 문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삼소묘음술의 특징이었다.
‘삼소묘음술과 하얀색 법진을 융합하여 사용하려는 건가?’
근처에 떠도는 금색 구름은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동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고, 수많은 희미한 금색 허상이 되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어라? 심협, 네 옷자락에 누군가 각인을 남겨놨구나. 아무래도 원광술(圓光術) 종류의 염탐 비술 같다. 마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까 아무래도 만요맹과 함께 움직이던 마족의 소행 같다.”
화령자가 심협의 옷자락을 보며 말했다.
심협은 바로 결인을 했고, 옷자락에서 갑자기 금색 불꽃, 태양진화가 타올라 순식간에 각인을 제거했다.
“매번 내가 염탐했는데 오늘은 남에게 염탐을 당했군. 대체 언제 각인을 남긴 거지?”
그가 피식 웃더니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마기에서 토혼축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까 아마도 이전에 네가 자 선생을 기습했을 때인 것 같다. 신마의 우물 입구에서는 사람이 많았으니 경솔하게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화령자의 추측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별다른 비밀스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 크게 상관이 없었다.
“태을 경지에 도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법칙의 힘을 깨닫기 시작해서 수단이 점점 교활해지고 있다. 너도 앞으로는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화령자가 충고를 하고는 계속해서 곡현성반을 발동했다.
* * *
한편, 적혈주 안의 영향이 갑자기 사라지자 토혼축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잠시 후에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화령자의 추측대로 심협이 자 선생을 기습했을 때, 그는 심협의 옷자락에 몰래 각인을 남겼었다. 그 각인 안에 자신의 신념을 담았던 터라, 각인이 부서지면서 그의 신혼에 약간의 피해를 줬다.
이 피해는 둘째치고 이제 심협 쪽의 상황을 살펴볼 수가 없게 됐으니 상당이 번거로워졌다.
“각인이 발각됐다. 그 불꽃 동자는 감지에 매우 민감하고 또 법진에도 정통한 것 같으니 어쩌면 정말로 이 법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토혼축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역시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구나. 힘을 아껴두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헌원의 전승을 저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으니 전력을 다해 빠져나간다. 귀골산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이 보물은 제련할 필요가 없다. 법력만 주입하면 바로 발동할 수 있다.”
노수가 굳은 표정으로 검은색 나산을 금전에게 건네고는 서둘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토혼축도 서둘러 노수 앞에 나타나 양손을 허공에 내밀고는 두 줄기 검은빛을 노수의 손에 주입했다.
두 사람의 마기가 하나로 합쳐지자 강력한 기운이 폭발하더니 하얀 뼈의 깃발이 위로 솟아올랐다.
만약 심협이 있었다면 한눈에 알아봤을 이 하얀색 뼈 깃발은 이전에 꿈에서 봤던 섭혼번이었다.
이전에 시공간을 넘어서 봤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섭혼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기는 열 배나 짙었고, 깃발에는 커다란 귀신 얼굴이 하나 더 생겼다. 귀신은 깃발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쉬지 않고 발악하고 울부짖었다.
금전은 섭혼번의 이상에 이끌려 귀골산을 발동하는 것조차 잊고 있다가 적지 않은 금사가 많은 사람들의 몸을 공격하자 갑자기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금전!”
백천의 호통에 금전은 정신이 번쩍 들어 서둘러 요력을 귀골산에 주입했다.
나산의 검은 빛이 일정해지자 금전이 몸을 떨고 신음을 뱉었다.
이를 본 백천이 손에서 하얀 빛을 쏴서 금전의 몸을 살펴보려 했다.
“백 도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저 나산에 무슨 수작질을 한 것이요? 어서 그를 풀어주시오!”
백천이 그의 말에 멈추더니 노수를 노려보았다.
“내가 저자를 해치려고 수를 썼다는 거요? 나를 그렇게 한가로운 사람으로 보다니. 이 귀골산은 마족의 연기사가 1만8천 개의 유혼(幽魂)으로 만든 보산(寶傘)으로, 안에 64도 금제가 담겨 있소. 모든 신혼 공격을 막아낼 수 있지. 다만, 이 보물을 발동하려면 상당한 신혼의 힘을 주입해야 하오. 또한, 일단 한번 주입하면 벗어날 수가 없소. 백 도우는 힘을 아껴야 하니 이 일은 금전 도우에게 맡기시오. 그가 먼저 자초하지 않았소? 게다가 태을경인 그라면 기껏해야 혼력이 3할 정도 떨어지는 데 불과할 게요.”
노수는 섭혼번을 제련하면서 음흉하게 말했는데, 만요맹 무리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