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화. 부드럽게 나오면 받아들이나, 강하게 나오면 반발한다
한편, 심협 일행도 길을 따라 대략 반 시진 정도 걸은 끝에 지형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수백 장 떨어진 곳,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금빛 광채가 은은히 번득이며 영력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깐.”
심협이 조용히 손을 들자 섭채주와 거울 요괴가 바짝 긴장하며 멈춰섰다.
심협은 두 눈을 감고 전력으로 부주진신법을 운공하며 신식을 펼쳐 사방을 탐색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혼의 방해가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거둬야만 했다.
“이쪽은 신혼의 압박이 더 심하구나.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상황을 살펴야 할 것 같다.”
심협은 두 사람에게 당부했고, 이들은 기운을 거둔 채 조심스레 앞을 살피며 나아갔다.
얼마 후, 전방의 땅에 크기가 불규칙한 돌들이 나타났다. 어떤 것은 쌀알처럼 작았고 어떤 것은 마차보다 컸다.
금빛 광채로 가까이 갈수록 땅에 어지러이 널린 돌은 점점 많아졌다.
2백 장 정도를 더 걸어가자 석판이 깔린 산길이 갑자기 넓어졌다. 석판이 깔린 광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금빛 광채에 가까워질수록 어렴풋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심협은 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앞에 만요맹이 있어.”
그 말을 들은 거울 요괴는 표정이 더 굳어졌다. 당장이라도 소요경 공간 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심협이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조용히 더 접근했고, 금빛이 번득이던 전방의 안개가 갑자기 옅어지면서 만요맹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세 사람은 서둘러 바위 뒤에 숨은 채 머리만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닥쳐라! 심협과 그 일행은 정말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고! 너희 만요맹의 그 쓸모없는 것들도 한 번 마주친 것만으로 전멸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나도 그것들과 똑같이 됐을 거란 말이다.”
노수도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심협 일행과의 싸움에 대해 변명하듯 털어놓고 있었다.
그에게 호통을 들은 사람은 금전이었는데, 그는 안색만 변했을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옆에서는 백천이 딴청을 부리고 있었는데, 그 옆에 남은 만요맹 수사는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금전과 유웅곤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일고여덟 명의 진선 수사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곳으로 보내졌는지 아니면 오는 길에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 선생과 연락할 방법은 있는가?”
백천이 노수를 보며 물었다.
“연락이 안 된다. 이곳에서는 신식의 힘이 막히고 전신 법보도 영향을 받으니 멀리까지 연락을 전할 수가 없다.”
노수가 고개를 젓자 비쩍 마른 토혼축도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유웅곤의 질문에도 백천은 금빛이 번득이는 곳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곳은 넓은 광장이 거대한 금색 광진에 뒤덮인 곳이었다. 광망이 커다란 그릇처럼 뒤덮고 있었고, 그 위에 흐르는 금색 파문에서는 강력한 영력 파동과 공간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금색 광진 안의 한가운데에는 금색 대전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차단된 광막에 시야가 굴절되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돌파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금전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내자 살아남은 만요맹의 진선기 수사들은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저 금전이라는 자는 당연히 자신들을 시험 삼아 먼저 보낼 터였다. 오는 길에 몇 번이고 겪어보지 않았던가.
다행히도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노수와 토혼축도 동의하지 않았다. 광장의 저 금색 광진이 매우 꺼림칙한 게 분명했다.
바위 뒤에 숨어서 한참을 살펴보던 심협은 천천히 몸을 움츠렸다.
“만요맹과 마족은 대부분이 여기 있는 것 같은데 그 마가라는 중과 자 선생이 보이지 않아.”
“이제 어쩌면 좋죠?”
거울 요괴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은 지켜보는 게 좋겠어.”
“아니면 오홍 도우에게 연락해서 이쪽으로 오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그들이 도착하면 바로…….”
섭채주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은 방법이야.”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에서 원구가 준 고충을 꺼내 손가락에 힘을 줬다.
파직!
가벼운 소리와 함께 미약한 영기가 퍼져 나갔다.
그 순간, 심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이다!”
“왜 그러세요?”
거울 요괴가 급히 물었다.
그녀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협은 그녀들의 소매를 잡고 재빨리 움직여 바위 뒤를 넘어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검은색 도광이 날아오더니 장검처럼 바위를 찔러왔다. 심협이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거울 요괴는 심장을 찔렸을 것이다.
허나 짙은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긴 심협은 바로 도망치지도, 섣불리 짙은 안개로 들어가지도 않고 다른 은신처를 찾아 잠복했다.
“어떻게 된 거죠?”
거울 요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궁금해서 물었다.
“원구가 아까 말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이 고충을 죽일 때 약한 영력 파동이 방출됐어. 저들에게 들킬 뻔했구나.”
심협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그런 약한 파동으로 눈치챘을까요? 우리는 안개 안에 있었으니까 발견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광장 주위에 탐색 법기 같은 것을 설치해놨겠지. 짙은 안개에 가려지고 우리가 기척을 숨겨서 발견을 못 했겠지만, 조금의 영력이라도 새어나갔으니 우리를 눈치챘을 거야.”
“맞아, 나라고 해도 저 안개 속에 탐사 수단을 설치해놨을 거야.”
섭채주의 추측에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오홍 도우를 기다리는 건가요?”
“그래야지. 지금은 우리가 숨어 있고 저들이 드러나 있으니 저들도 우리를 찾겠다고 함부로 나서지는 않을 거야.”
그제야 거울 요괴는 바로 정면으로 싸울 필요가 없음에 안심했다.
한데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그들 발아래에서 갑자기 금색 광망들이 동시에 일어나더니 금빛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런!”
다음 순간, 10여 명이 일제히 날아와 그들을 에워쌌다.
안개 속에서 만요맹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의 요괴가 유리 같은 옥 지팡이로 땅바닥을 톡 치자 강력한 기운이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빙한의 기운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보이지 않는 서리 바람벽이 주위의 안개를 걷어냈다.
안개가 물러가면서 반경 백 장이 시야에 드러났는데, 온통 울퉁불퉁하고 기이한 돌들과 땅에 갑자기 나타난 하얀색 서리뿐이었다. 심지어 그 위로는 하얀색 한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심협이 고개를 숙여 살피니 자신과 섭채주의 옷에 한없이 투명한 비늘이 붙어 있었다. 이는 금전의 것이었다.
거울 요괴가 발을 들어 내려다보니 그녀의 발에도 한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비늘을 떼어냈다. 방금 그들이 노출된 것은 바로 이 물건 때문이었다.
만요맹 요괴들이 당장이라도 죽일 듯 살기 등등하게 심협을 노려봤으나, 백천이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추게 했다.
“심 도우, 당신의 재능은 이대로 꺾어버리기 아깝군요. 우리 만요맹과 충돌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다 할 원한을 맺은 것도 아니지 않소? 그러니 사실 이렇게 서로 싸울 필요도 없고 말이오. 어떻게 생각합니까?”
백천의 물음에 심협이 의아한 눈빛으로 금전과 유웅곤을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백 맹주의 말이 맞긴 하오.”
그는 금전을 거의 죽일 뻔했고, 또 여아촌을 함락하려는 유웅곤의 계획을 방해했다. 그러니 원한이 없다고 물어보면 아마 두 사람은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백천의 말에도 금전과 유웅곤은 비록 표정이 좋지 않았어도 딱히 말은 없었다. 오히려 노수가 불만스러운 듯 화를 냈다.
“백천 도우, 지금 뭐 하자는 거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무의미한 싸움은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 모두 저 금색 광진을 열지 못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헛수고이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우리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말수가 적은 토혼축마저 퉁명스레 말했다.
“나와 당신들의 동맹은 북명곤이 목표일 뿐이오. 당신들을 도와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지.”
백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백천 도우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군요. 저 마족들이 언제 좋은 뜻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까? 저들이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을 말해주긴 했소?”
“오, 그게 뭔지 심 도우는 알고 있단 말입니까?”
백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야 저들에게 직접 물어보셔야지요.”
“심 도우, 도발은 그만해도 되오. 저도 저들의 진짜 목적에는 관심이 없소. 그저 우리의 맹약에 영향만 가지 않으면……. 나는 지금 도우에게 진심으로 우리 만요맹에 가입을 요청하는 게요. 도우는 만요맹에서 나에 이어 두 번째 자리에 앉는 것이지. 어떻습니까?”
백천이 옥 지팡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백천 도우, 수하들을 물리고 둘이서만 상의할 수 있겠소?”
심협이 약간 머뭇거리며 묻자 백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 도우, 내 호의는 충분했소. 나를 너무 어리석게 보지 마시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지금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소.”
“미끼로 유혹하다가 안 되니까 협박한다, 이건가? 만요맹의 성의는 정말 거절하기 어렵군. 허나 나란 사람은 본래 삐딱하니, 부드럽게 나오면 받아들이나 강하게 나오면 반발한다오. 허니 백 맹주는 괜히 헛수고하지 마시오.”
심협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명홍도를 손에 꽉 쥐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 그럼 뜻대로 해주지.”
백천이 차갑게 웃었다.
그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소매를 휘두르자 소매에서 하얀 광망이 번득이더니 망망한 서리가 단숨에 순백의 설룡(雪龍)이 되어 심협 등을 향해 돌진했다.
설룡이 접근해 올 때마다 허공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고, 처음에는 아름드리나무 정도 굵기였던 설룡이 수증기를 흡수하면서 몸 주위에 한 겹의 하얀색 얼음 갑옷이 생겨났다.
설룡이 머리를 높이 쳐들고 돌격해오자 거울 요괴가 굳은 눈빛으로 몸에서 푸른 빛을 번득였다. 길게 울부짖는 소리와 천둥소리가 울렸고, 주먹만 한 수많은 푸른색 뇌광이 뭉치면서 수강신뢰(水罡神雷)가 되어 설룡을 향해 날아갔다.
콰쾅!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뇌광이 사방으로 퍼졌다. 설룡의 돌진해오는 기세가 잠시 멈칫했고, 얼굴을 뒤덮었던 얼음 갑옷도 폭발했다. 그러나 전혀 부상은 당하지 않은 듯 다시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이를 본 거울 요괴가 품에 안고 있던 거울을 법력으로 발동하자 푸른 빛이 뿜어져 나가 설룡을 찔렀다.
이번에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은 더 빨리, 더 강력하게 폭발했지만, 설룡은 이번에도 가볍게 떨쳐냈다.
반면 거울 요괴 수중의 거울은 서리로 뒤덮였고, 그녀는 피마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굳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도…… 도와주…….”
거울 요괴는 심연에 빠진 것처럼 목이 멘 목소리로 애원했다.
거울 요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색 띠가 그녀의 허리를 감더니 뜨거운 기운을 뿜어내며 휙 잡아당겼다.
거울 요괴는 뒤로 날아가 그대로 소요경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전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심협과 섭채주, 두 사람만 있는 편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설룡이 머리를 땅에 박자 폭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서 수많은 자갈이 사방으로 튀었다.
심협은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바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혈백원번이 그와 섭채주 앞에 나타나 붉은 광막을 펼쳐 그들의 앞을 막았다.
광막이 펼쳐지는 순간, 심협이 황제내경 공법을 운공하며 한 겹의 두터운 법력을 혈백원번으로 주입하자 뿜어져 나오는 혈광이 두 배로 단단해졌다.
극한의 서리가 묻은 돌이 끊임없이 핏빛 광막을 두들기면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잠시 후, 핏빛 광막은 충격으로 움푹 파여 피해가 상당해 보였다. 이어서 광막에도 하얀 서리가 퍼지고 극한의 기운이 광막을 타고 올라와 조금씩 혈백원번 본체로도 침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