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103화 (1,103/1,214)
  • 1103화. 조우(遭遇)

    가까이 가서 보니 협곡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양쪽 벽은 길이가 수백 장이 넘었고, 중간에 끼어 있는 협곡의 입구는 폭이 무려 수백 장이었다. 내부는 뒤집힌 나팔처럼 들어갈수록 더 넓어졌다.

    다만 협곡 가득한 흑백 안개가 시야를 가려 도저히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영목 신통을 발동하여 살펴보니 협곡 안의 하얀 안개는 매우 순수한 천지영기였고, 검은색 안개는 매우 짙은 마기였다.

    두 종류의 확연히 다른 안개가 서로 섞여 있었지만, 서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매우 특이하고 공평한 상태를 유지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심협은 손을 휘둘러 소요경 공간의 문을 열었다. 빛의 문이 열리고, 소요경 안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화령자를 뺀 오홍 등이 줄줄이 나왔다. 섭채주도 나온 상태였다.

    “느낌이 어때?”

    심협이 서둘러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소요경 안에서 섭채주가 경지를 돌파한 뒤 안정시켜 진정한 태을 경지 수사로 들어섰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경지를 돌파했을 때 많은 천지영기를 흡수한 그와는 달리 섭채주는 혈맥을 각성해 그 부족함을 메웠다.

    “괜찮아요.”

    섭채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침내 다시 심협을 쫓아왔다고 좋아했는데, 지금 보니 어느새 상대는 한 단계 더 도망가 태을 중기 수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심협과 인사를 나눈 뒤 그 거대한 협곡으로 다가갔다.

    협곡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땅과 암벽을 살펴보니 당창포(唐菖蒲) 같은 광석이 자라 있었다. 대부분이 회백색 혹은 암황색이었으며, 광택을 띠고 있었지만, 딱히 투명한 편은 아니었다.

    “투박하고 불순물이 많아서 별 가치가 없겠군.”

    오홍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는 말했다.

    “색깔과 형태를 보니 종류가 다양하군요.”

    원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때, 심협의 소매 속에서 공간 영부가 다시 광망을 뿜어냈다. 명암의 폭은 이전보다 강력했고, 협곡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마의 우물 입구는 협곡 깊숙한 곳에 있는 듯하오. 이대로 쭉 들어가면 진짜 신마의 우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소.”

    오홍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오공과 다른 사람들이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우리끼리 찾는 수밖에 없겠군요.”

    원구와 눈물 요괴 등은 신마의 우물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크게 당황했다.

    “뭐, 뭐라고? 무슨 우물?”

    당황한 눈물 요괴의 물음에 심협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끝까지 설명을 들은 눈물 요괴 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저 북명곤이나 찾아서 콩고물 좀 얻나 했더니…… 신마의 우물을 찾으러 가는 거면 위험하겠죠?”

    거울 요괴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태을 경지의 마족들과 원조 같은 요족들도 노리고 있으니 흉복을 예측하기가 어렵구나.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

    심협이 솔직히 답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면 저희가 어디로 가겠어요?”

    거울 요괴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아까 곤의 알에 있는 천지영기를 흡수해 경지가 많이 올라갔잖아. 그러니 손해만 보는 건 아니라고.”

    오홍이 웃으며 말하자 거울 요괴와 눈물 요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원구 도우는 아무 불평도 없지 않은가!”

    오홍이 그렇게 말하고는 원구를 힐끗 보았다.

    사실 원구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못 한 것뿐이었다.

    그는 대승기 경지에 불과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으로도 큰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는데, 이제 무려 태을 경지 어르신들의 싸움에 끼어들라니! 아마 자신은 방패막이로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래, 너희 맘대로 해라.’

    그는 더 따질 힘이 없었다. 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지 않던가.

    “자, 아무도 떠나지 않기로 했으니 다시 갑시다.”

    심협이 결론을 내리고는 앞장서서 나아갔다.

    한데 반 시진 정도 걸어가자 앞 협곡의 지형이 갑자기 바뀌더니 아래쪽으로 크게 갈라졌다.

    모두가 그 갈라진 곳 앞에 멈춰서 내려다보니 아래는 마치 끝없는 심연 같았고, 실오라기 같은 흑과 백의 안개가 서로 교차하며 흘렀다. 그 내부에 뭔가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식을 펼쳐 살피던 심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30리 정도 아래부터 금제가 뒤덮고 있는지 신식이 지나갈 수가 없군요.”

    “우선 내려가 보는 게 좋겠소.”

    오홍의 말에 일행은 각자 둔술을 시전하여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뚫고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고, 속도도 갑자기 느려졌다.

    경지가 가장 높은 심협조차 전력을 다해 법력을 운공하고도 속도가 거의 늘지 않았다.

    “왜 이러지?”

    눈물 요괴가 의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까 말한 금제 같군. 한데 지금 보니 금제가 한 겹이 아니라 이곳은 저 위와는 완전히 다른 곳 같아.”

    심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곳은 영기와 마기의 밀도가 더 높고 공간의 저항도 더 강해요. 한데 이상하게도 공간의 압박감은 그리 강하지 않고요.”

    섭채주도 말했다.

    “아무래도 이 공간에서는 배척하는 힘이 방해하는 것 같다.”

    심협의 말에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내려갈수록 신식의 힘에는 더 큰 저항이 느껴졌고, 이내 겨우 30장 너머도 살피기 힘들어졌다.

    “안개가 자욱해 영목신통으로도 볼 수가 없으니 눈 뜬 봉사나 다름없군. 기습이라도 당하면 큰일이겠어.”

    눈물 요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육신과 혼이 모두 강력한 심협과 오홍, 섭채주도 이 심연 같은 협곡 아래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원구, 고충을 풀어서 살펴볼 수 있을까?”

    “평소라면 3천 장을 떨어져도 고충으로 감지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시도는 해보죠.”

    원구가 잠시 고민하더니 허리에서 검은색 주머니를 떼어내 입구를 열었다.

    은은한 초록색 빛이 반짝이는 반딧불처럼 주머니 밖으로 날아갔다.

    수백 마리의 좁쌀만 한 고충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금방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원구는 눈을 감은 채 온 정신을 집중해 고충과 연결을 시도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떴는데,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어때?”

    심협이 궁금한 듯 물었다.

    “고충과의 교감이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낫군요. 8백 장 정도까지는 탐색이 가능합니다.”

    “휴우, 겨우 8백 장인가요?”

    거울 요괴가 조금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이 심연에서는 충분해.”

    심협이 원구를 대신해 말했다.

    “고충과 8백 장을 유지하며 함께 내려가게 해.”

    오홍의 말에 원구는 입을 삐쭉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오홍은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아래로 내려갔다.

    반 시진 정도 내려가자 조금씩 긴장이 풀려갔다. 한데 갑자기 원구가 조용히 말했다.

    “잠깐! 모두 멈춰요!”

    “무슨 일이오?”

    모두가 우뚝 멈췄고, 누군가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제 고충을 죽였습니다.”

    원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일행은 다시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나?”

    오홍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 고충은 눈을 대신하는 게 아니오. 그저 영력이나 법력 같은 파동을 감지할 수 있지요. 한데 이번에는 감지하기도 전에 죽어버려서 지금은 대략적인 방향만 알 수 있소.”

    대승기 수사가 키운 고충이니 한계가 명확했고, 오홍도 더는 묻지 않았다.

    “방향만 알 수 있으면 됐어. 이 협곡에서 제한을 받는 것은 우리만이 아닐 테니 그들도 신식에 제한을 받겠지. 모습과 기척만 잘 숨기면 저들이 알아채기 전에 선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심협의 제안에 일행은 상의를 시작했고, 잠시 후 원구의 안내를 받아 한 방향으로 향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을 이동했을 때, 심협이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추게 했다.

    “신식으로 살펴보니 적의 수가 적지 않군요. 원구와 눈물 요괴, 거울 요괴는 여기서 기다려. 오형, 채주는 저와 함께 가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의 태을 수사가 기운을 숨기고 이동하다 보니, 잠시 후 앞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쩌지? 맹주들과 헤어졌고 신식은 쓸모가 없게 됐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뒤따른 것은 침묵이었다. 누구도 좋은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도 이곳에 들어오면 분명 협곡 아래로 들어올 테니 우선은 협곡 가장 깊은 곳으로 가보자고.”

    “흥! 쓸모없는 요족 놈 중에도 나름 쓸모있는 것들이 있군. 갈 사람은 어서 따라오고 가기 싫은 놈은 썩 꺼져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차갑게 비웃었다. 심협은 바로 알아챘는데, 귀소마도를 든 태을 마족 노수의 목소리였다.

    “공…….”

    심협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화령자가 급히 그를 말렸다.

    “왜?”

    “쯧쯧! 이놈아, 따져 묻지 말고 일단 날 꺼내라.”

    화령자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얼버무리며 재촉했다.

    심협은 의아했지만, 손을 휘둘러 소요경 공간을 열고 화령자를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미세한 공간 파문이 일면서 노수에게 감지되고 말았다.

    “누구냐?”

    노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고, 만요맹의 수많은 요족들도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들은 반응이 약간 느려졌고, 흑백 안개의 흐름도 조금 느려졌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떤 띠 같은 것이 나타나 이들을 하나씩 묶었다. 그것은 금색 광망이었다.

    “캬오오!”

    용의 포효와 함께 오홍이 휘두른 금색 장창의 허상이 용의 허상으로 바뀌어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꼬치처럼 순식간에 일고여덟 명의 진선기 요족이 머리를 꿰뚫렸다.

    간신히 만리권운의 속박에서 벗어난 요물들이 도망치기도 전에 명홍도의 초록색 칼날이 휩쓸고 지나갔고, 몇몇의 허리가 잘렸다.

    태을 수사 세 명의 협동공격에 10여 명의 진선기 요물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시간 법칙의 힘?”

    노수는 좀 전의 공격에서 위험을 감지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세 태을 수사의 공격 시기가 갑작스러워서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시간의 힘에 모든 진선 요물의 반응을 느려지게 만든 것이 치명적이었다. 노수 자신도 태을 수사지만, 세 명의 같은 태을경지 수사를 상대로는 가망이 없었다.

    노수 홀로 협곡 안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 심협은 바로 둔술을 시전하여 쫓아가려 했는데, 그때 전방에서 검은색 도광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심협은 급히 몸을 돌려 피하고는 다시 쫓아가려 했지만, 땅속의 짙은 안개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반짝이더니 노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심협은 노수가 비술을 시전하여 도망간 것인지 아니면 어떤 비법으로 기운을 숨겼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더는 쫓아갈 수 없었기에 다시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 * *

    협곡 아래 백 장 떨어진 곳. 짙은 안개가 사라지면서 귀소마도를 꽉 쥐고 숨어 있던 노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가슴에 붙어 있던 은닉 부적이 천천히 불에 타서 사라졌다.

    “저 녀석, 신중해도 너무 신중하잖아?”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비록 유인하여 기습하려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수도 심협을 계속 상대할 생각은 없었는지 이내 협곡 아래로 향했다.

    이 무렵, 그 위쪽에서는 오홍이 전장을 정리하며 요족들에게서 저물 법기를 챙기는 한편, 아직 살아 있는 요물들을 차례로 베었다.

    그때, 요족 무리에서 한 여자 요물의 몸이 갑자기 붉게 번득였다. 그러자 희미한 사람 형태의 허상이 마치 영혼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붉은 빛이 되어 날아갔다. 놀랍게도 공간의 힘의 제어를 받지 않아 그 속도는 더없이 빨랐다.

    오홍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제지하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반응이 늦은 것은 섭채주도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