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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091화 (1,091/1,214)
  • 1091화. 부상

    “자네 죽으려고 작정했나? 어, 어서 손 내리게!”

    청어 요물이 조용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 요물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코끼리 요물이라는 것은 알지만, 심협은 내심 감동했다. 이 청어 요물은 진심으로 코끼리 요물을 형제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지 않는가. 이번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영원히 출세할 수 없을 걸세.”

    심협은 주위 요물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일부러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백천 등의 시선도 심협에게 쏠렸다.

    그들은 진선기 이하 수사들에게는 원래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방패막이로 여겨 데려온 것뿐이었다. 한데 개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심협의 말에 더욱 흥미가 생긴 백천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려 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요물들이 웅성대기 시작하더니 몇 명의 대승 후기 요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협의 말에 용기를 얻은 것이다.

    심협은 이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운명에 거역하는 코끼리 요괴 연기를 더 해야 할 듯한데?’

    그는 청어 요물마저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만류했다.

    “도박하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하니 자네는 안 가는 게 좋겠어. 부자가 돼도 옛정을 잊지 않겠네.”

    “부자가 돼도 옛정을 잊지 않는다?”

    청어 요괴가 그 말을 곱씹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코끼리 요괴에게서 신경을 끊고, 위험을 무릅쓴 자들을 둘러보았다.

    “출발!”

    자 선생이 꼼꼼하게 탐색하고는 비교적 안정적인 통로를 골라 10여 명으로 이루어진 결사대를 먼저 보냈다.

    나머지 요물들은 그 자리에 남아서 선두의 대오가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습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공간 통로 입구 가까이 간 요물들은 자신의 키만 한 하얀색 소용돌이를 보자 절로 긴장이 됐다.

    “너, 먼저 가봐.”

    금전이 심협 옆의 대승기 요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승 후기의 원숭이 요괴는 지목당하자 크게 당황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끌려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원숭이 요괴는 덜컥 겁이 났지만, 그렇다고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택한 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소용돌이로 다가간 그의 몸은 금방 하얀 빛에 휩싸여 곧바로 사라졌다.

    공간 통로에서는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고, 공간의 파동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원숭이 요괴가 안전하게 통과한 것이다.

    “오, 지나갔군!”

    의외라는 듯 금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쪽 통로가 안전한 것 같군요. 계속해서 들어가라.”

    자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원숭이 요괴가 무사히 공간 통로를 들어간 것을 보자 용기가 생겼는지 몇몇 대승기 요물이 적극적으로 통로로 들어갔다.

    심협은 그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상황이 불안정한데, 아까 그 원숭이 요괴가 순조롭게 들어갔으니 바로 뒤따라가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이 통로가 앞으로도 계속 안정적일 거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백천은 손을 흔들어 대승기 요물들이 먼저 들어가게 했다.

    대승기 요물이 연달아 들어가자 심협은 왠지 망설여져서 다소 늦게 뒤따라가 가기로 했다.

    한데 그가 하얀색 소용돌이 앞에 다가가 미처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갑자기 공간의 힘이 폭발하면서 흐트러진 천지영기가 소용돌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심협이 우뚝 굳어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팔이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 손이 잡아당기는 대로 뒤쪽으로 던져졌다.

    펑!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공간 통로에서 비명이 들려오더니 대량의 피가 시체의 잔해와 함께 하얀 소용돌이에서 뿌려졌다.

    먼저 들어간 몇 명의 대승기 요물이 공간의 힘에 짓눌려 죽었다.

    이 참혹한 광경에 방금 전까지 안심하고 있던 요물들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자 선생,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자 선생이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번에는 손을 내밀어 소용돌이 주위를 한참이나 살폈다.

    “작은 범위에서 공간의 힘이 폭발했군요. 진선기 이상의 수사라면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누가 해보겠느냐?”

    백천이 바로 물었으나, 진선기 요물들은 서로만 바라볼 뿐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심협은 이 모습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공간 통로가 비교적 안정적이긴 해도 저 마족의 말처럼 그저 공간의 힘이 불안정한 것뿐임을 진즉 알아봤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자 선생이 말했다.

    “진선기 몇 명에 저 코끼리 요괴를 붙여서 데려가게 해보시죠. 공간의 힘 변화에 저항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명을 내리기도 전에 금전이 진선기 요물 중 몇 명을 선발했고, 당연히 심협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금전에게 지목당한 진선기 요물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대열에서 앞으로 나왔다.

    “봉산(逢山)이 앞장서고 유충(柳充)이 뒤를 맡는다. 나머지는 저 녀석을 에워싸고 함께 통로로 들어간다.”

    금정에게 이름이 불린 봉산과 유충은 청색 갈기의 멧돼지 요괴와 하얀색 비늘의 뱀 요괴였고, ‘저 녀석’은 심협이 변신한 코끼리 요괴였다.

    건장한 체격에 얼굴에 주름이 잔뜩 있는 봉산이 심협을 날카로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심협은 어이가 없었다.

    ‘왜 나한테 화풀이람?’

    자 선생의 안배는 공간 통로 안의 상황을 지켜보기 위함일 뿐, 정말로 그를 보호하는 것은 임무가 아니었다.

    심협을 포함한 다섯 요괴는 차례대로 하얀색 소용돌이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심협은 깜짝 놀랐다. 내부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서 마치 거대한 동굴 같았고, 주위는 은빛으로 반짝였다. 10여 장 너머는 마찬가지로 하얀색 소용돌이였다.

    통로 안은 순수한 수속성 영력으로 가득했으며, 짙은 피비린내와 먼저 들어갔던 대승기 요괴의 시체 잔해가 남아 있었다.

    모두가 통로로 들어가자 선두의 봉산이 고개를 휙 돌리고는 심협을 노려봤다.

    “네가 앞장서라.”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심협은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요괴들은 그와 거리를 두었다.

    심협 뒤의 진선기 대요들은 피식 웃고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공간 통로를 걷는 느낌은 매우 특이했는데, 단단한 땅이 아니라 모래사장을 밟는 것처럼 푹신푹신하고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부 구역의 공간이 겹치면서 광흔이 왜곡되는 징후가 있었다. 다만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모든 요괴는 심협의 뒤를 따랐고, 그가 밟은 곳을 똑같이 밟으려 애썼다.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다들 속으로 의아해했다. 선두에 가는 저 코끼리 요괴는 방패막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껏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심협은 다른 요괴들의 생각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 공간을 탐색했는데, 그러던 중 저 앞 지면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색 광흔을 발견했다. 아주 미세한 공간의 균열이었다.

    그는 발을 들었지만, 땅을 밟지 않고 몰래 허공을 밟고 지나갔다.

    뒤의 요괴들은 이런 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바로 뒤따라오던 봉산이 그 균열을 그대로 밟았다.

    “끄아악!”

    삽시간에 돼지 잡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봉산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내밀었던 발은 절반만 남은 상태였고,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칼이나 도끼로 자른 것과는 달리 공간 균열의 검은색 광흔은 그대로 봉산의 다리 절반을 집어삼켰다. 본래 작고 가늘던 균열은 다시 더 벌어졌다.

    뒤에서 따라오던 요괴들은 서둘러 달려와 봉산을 부축했다.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함부로 움직여서 다른 화근을 불러올까 두려워서였다.

    화를 무사히 피한 심협은 뒤돌아서더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봉산 대장, 무슨 일입니까?”

    모든 요괴는 어디서 갑자기 공간 균열이 나와서 자신을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바짝 긴장한 상태라 심협의 말은 무시했다.

    “다시 가볼까요?”

    심협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가만히 있어!”

    유충이 깜짝 놀라서 서둘러 외쳤다.

    심협은 그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놈들을 여기서 처리할까?’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진선기의 요괴들이 몽땅 죽었는데 대승기 요괴가 홀로 살아남는다면 당연히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신 진선기 요괴 하나를 골라 칠십이변으로 변신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이곳은 매우 불안정한 공간이라 방심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소요경 안의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진다.

    잠시 후, 진선기 대요들은 마음을 다잡고 의논한 끝에 심협에게 계속 나아가도록 지시했다.

    심협은 곧장 모든 공간 균열을 자세히 살피며 계속해서 하얀색 소용돌이 끝으로 나아갔다.

    뒤에서는 봉산이 신통을 운공하여 잘린 다리를 복구하고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따라왔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백천과 자 선생이 만요맹의 나머지를 데리고 통로로 들어오고 있었다.

    심협은 옆의 검은색 균열을 힐끗 보고는 곧바로 조금 뒤로 기댔다. 뒤이어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악!”

    모두가 심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땅을 뒹굴고 있었는데, 등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상처가 생겼나 있었다. 뼈까지 보이는 중상이었다.

    심협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를 때마다 검은색 균열에 점점 가까워져서, 지켜보는 만요맹 요괴들은 식은땀이 흘렀다.

    “이봐, 함부로 움직이지 마!”

    이미 당해본 봉산이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심협은 호통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구르는 것은 멈췄지만, 고통을 참기 힘든 듯 연신 몸을 떨었다.

    심협으로서는 백천이 이 순간에 들어온 것이 못마땅했다. 진선기 요괴인 봉산도 다쳤는데 자신이 내내 무사하면 당연히 의심을 살 수밖에 없기에 조금 더 가서 크게 다치는 척을 하려던 참인데 백천이 갑자기 들어온 바람에 시기를 앞당겨야 했던 것이다.

    “맹주님,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유충이 의아한 듯 물었다.

    “방금 거대 고치에 이상이 생겼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통로가 더 불안정해질지도 모른다.”

    “아직도 너희가 통로에 있을 줄도 몰랐고 말이지.”

    자 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봉산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조금 지체됐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최대한 빨리 지나간다.”

    “맹주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저 코끼리 요괴 놈은 천운을 타고난 것인지 지나가는 곳마다 안전합니다.”

    유충이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안내했고, 다른 요괴들도 모두 뒤를 따라갔다. 심협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이 심협 옆에 도착했다.

    “괜찮으냐?”

    유웅곤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프긴 한데…… 괜찮습니다…….”

    심협이 짐짓 일어나려고 애쓰는 척하며 말했다.

    “부상이 심하지 않으면 엄살 그만 부리고 길이나 안내해라.”

    금전이 심협을 힐끗 노려보더니 짜증을 냈다.

    심협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는 등의 상처를 대충 치료한 후 비틀거리며 앞장섰고, 이내 태을과 진선 무리가 대승기 수사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백천과 자 선생이 합류했으니 심협은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 균열을 대비해야 했고, 그들에게 정체를 발각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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