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88화 (1,088/1,214)
  • 1088화. 시광회소(時光回溯)

    원조와 미소가 물러나자 그제야 일행이 안도하며 다가왔다.

    “심형, 미안하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구려.”

    “주인님, 제가 너무 무능하였습니다.”

    오홍과 조비극은 자책했고, 눈물 요괴 등은 비록 말은 없었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방금은 잠깐이라고는 해도 그들은 상대의 환술에 당해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들 그럴 것 없소. 청구 호족의 환술은 적뢰산 옥호족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하니 환술에 빠지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지. 이제 적들이 물러갔으니 채주가 경지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심협의 다급한 말에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제히 술법을 시전하여 도천신살대진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기도 전에 도천신살대진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강하게 번득이더니 공공조무가 그려진 깃발이 떠올랐다. 그 깃발에서 무력이 순식간에 폭증하는 동시에 오래된 기운이 갑자기 솟았다.

    “이건……?”

    심협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 깃발은 갑자기 빠르게 날아가며 백 배나 커졌고,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손으로 변하여 멀리 떨어진 그 이상한 ‘궁전’을 내리쳤다.

    쾅!

    폭음이 물속에서 울려 퍼졌다.

    거대한 묘지처럼 생긴 궁전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먼지와 뒤섞인 바닷물이 겹겹의 혼탁한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몰아쳤다.

    모두가 넋이 나가 있는 사이, 날아갔던 도천신살대진기가 다시 돌아오면서 깃발은 빠르게 줄었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원래 크기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 깃발은 옥처럼 투명한 해골을 감싸고 있었다.

    이 해골은 옥처럼 투명했지만, 겉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었고, 광택도 조금 어두웠다. 그럼에도 해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렇게 순수한 무력(巫力)이라니!”

    심협은 이것이 복인지 화근인지 알 수가 없어 긴장했다.

    해골의 뼈마디마다 담긴 무력은 매우 강력했다. 깃발이 천천히 펼쳐졌지만, 해골은 선 자세 그대로 깃발에 붙어 있었다.

    그때, 도천신살대진기에서 갑자기 광망이 강하게 번득이더니 검은 빛이 거미줄처럼 깃발에서 뿜어져 나와 조금씩 그 해골을 감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해골은 검은 빛에 완전히 휩싸였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깃발에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깃발이 빠르게 몇 배로 커졌다. 깃발이 커질수록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무시무시해졌고, 옆에서 경지를 안정시키는 섭채주마저 영향을 받았는지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를 본 심협은 대진이 섭채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되어 깃발을 거두려고 했다. 한데 그때, 대진의 공공조무 깃발이 물속에서 갑자기 똑바로 펼쳐졌다.

    이 무렵, 깃발의 그 해골은 도천신살대진기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그 웅장한 무력은 쉬지 않고 섭채주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몸 주위에 나타난 반투명한 광택 속에서 그녀의 백옥 같은 뼈가 드러났다. 태을 경지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심협은 속으로 기뻐하며 그 공공조무의 깃발을 바라봤는데, 그때 깃발에서 하얀 빛이 반짝였다.

    뒤이어 깃발의 그림에서 갑자기 광망이 튀어나오더니 오래된 옷을 입은 커다란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깃발의 노인이 몸을 쭉 폈다. 몸에 두른 청색 옷은 3장 정도가 땅에 끌려서 마치 푸른 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얼굴을 보니 뺨이 길고 수척했으며, 세 갈래 푸른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봉황 같은 눈매는 조금 가늘어서 천하를 깔보는 듯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툭 튀어나온 이마였다. 미간 위쪽이 마치 평지에 작은 산이 올라온 것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 노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심협 체내에서 무명공법이 저절로 운공하기 시작했고, 신념은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끌린 것처럼 그대로 노인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무한 별이 펼쳐져 있는 그곳에 심협의 신념이 떠 있었는데, 곧바로 노인의 생애를 담은 기억 조각들이 하나둘 펼쳐졌다.

    하나하나 살펴보니 대부분은 노인이 먼 옛날 대지와 강에서 강물을 다스리며 수련하는 광경이거나 다른 사람과 싸운 경험들로, 볼수록 놀라웠다.

    그는 노인의 정체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상고 수신(水神) 공공이었다.

    기억 속, 노인와 싸운 자들은 하나같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뒤엎을 능력이 있는 상고의 대능이었다. 그중에서도 붉은 머리의 사내는 강과 바다를 태울 듯한 화법으로 중생을 연화했다.

    이 소중한 기억들은 모두가 수련과 싸움의 정수였기에 심협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되었고, 가슴이 뛰었다.

    수신 공공은 상고의 대능답게 수법이 절정에 이르렀고, 일초에 산을 부수었는데 모든 공격이 머리로 들이받는 것이었다. 그 위력이 실로 무궁무진하여 부주산도 그 일격으로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박치기만으로 허공을 부수는 것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이 광경에 푹 빠져서 한참을 바라봤는데, 주위의 별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모든 기억도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신념은 허상의 눈에서 빠져나왔다.

    이 무렵, 다른 사람들은 허상이 나타난 것만 보았을 뿐, 심협처럼 공공의 기억들을 보지는 못했다.

    “저 유골은 아무래도 조무 공공인 것 같군. 그렇지 않다면 저 깃발과 공명을 일으키지 않았겠지. 한데 왜 그의 유골이 이곳에 나타난 걸까?”

    “이 대거국은 대대로 동해지연의 근처에 있었으니 조무 공공의 무족 부락을 신봉하지 않았을까? 공공이 죽은 뒤로 그의 시체를 거둬 대거국에 안장했을 수도 있지.”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군.”

    심협의 분석에 화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렵, 허공에 떠오른 공공의 허상은 도천신살대진기로 돌아갔고, 그 웅장하고 강력하던 무력도 함께 사라져 이곳은 평소처럼 다시 평온해졌다.

    심협이 돌아보니 섭채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망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온몸의 기운이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심협은 손을 휘둘러 도천신살대진기를 완전히 거뒀고, 소요경 공간을 열어 섭채주를 죽루 2층으로 보냈다.

    “모두 채주가 경지를 돌파하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요맹이 이곳의 소란을 눈치챘을지도 모르니 우선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심협이 모두에게 감사를 담아 포권했다.

    “알겠소.”

    오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던 차였다.

    심협은 조비극을 건곤대로 돌려보내고는 대거국 유적의 다른 구역으로 향했다.

    * * *

    소요경 공간, 죽루 2층 안쪽.

    섭채주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온몸을 뒤덮은 광망은 그녀의 호흡에 따라 조금씩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그 모든 광망이 눈에 띄게 커졌다가 줄어들더니 바로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두 눈에서는 이채가 번쩍였고, 혼백을 뒤흔들 듯한 힘이 발산되었다. 잠시 후, 두 눈은 평소대로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현재 소요경 공간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살짝 주먹을 쥐자 강력한 힘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뇌겁의 세례를 겪지 않았음에도 방대하기 그지없는 무력을 흡수하면서 체내의 골격과 살이 무력으로 완벽하게 씻겨 나가면서 온몸의 골격이 무골(巫骨)로 변했다.

    가만히 앉은 상태에서도 섭채주는 자신의 변화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폭발적으로 강해진 힘에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검은색 옥패를 꺼내 손에 조금 힘을 주자 옥패에서 갑자기 대량의 하얀 빛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비쳤다. 마치 엄청난 적을 만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손을 폈다.

    이 옥패는 스승이 일찍이 그녀에게 준 호신 법보였다. 품계가 지금 보기에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고 금제도 겨우 12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법보는 법보다.

    방금 가볍게 시도해본 결과, 이 정도 법보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부술 수 있었다. 심지어 술법을 운공하지 않고 손의 힘만으로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이어 섭채주는 다시 눈을 감고 체내의 무력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눈을 떴는데,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다시 검은색 옥패를 쥐고, 이번에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손의 힘이 순식간에 커졌고, 옥패는 위기를 느꼈는지 갑자기 눈부신 하얀 빛을 마구 뿜어냈다.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섭채주의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기세가 갑자기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녀가 쥐고 있던 검은색 옥패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기세가 멀리 퍼지기도 전에 섭채주 체내의 혈맥의 힘이 갑자기 솟구치더니 보이지 않는 기운이 주위로 퍼져 나가 그 기세를 완전히 뒤덮었다.

    하얀빛에 갇힌 기세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더는 퍼지지 않았고, 안에 남은 부스러기들도 가만히 허공에 떠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광회소(時光回溯).”

    섭채주는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 하얀 빛이 바로 빠르게 줄어들면서 그 안에 멈춰 있던 기운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허공에 떠 있던 부스러기도 빠르게 모여들었고, 마지막에는 검은색 옥패가 뿜어내던 하얀 빛까지 전부 되돌아왔다.

    이 협소한 구역의 시간이 순식간에 거꾸로 흐르면서 모든 것이 기적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섭채주는 미소를 짓고는 검은색 옥패를 눈앞으로 가져와 자세히 살폈다. 깨진 부분이 완벽하게 복원됐을 뿐만 아니라 깨지기 전의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됐어!”

    섭채주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어서 이번에는 탁자 위의 평범한 찻잔을 힘주어 깨뜨렸다. 찻잔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좀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일각 정도를 기다렸다가 혈맥의 힘을 방출했다. 하얀 빛이 나타나더니 주위를 뒤덮었다.

    “시광회소!”

    그녀는 가볍게 손가락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주위로 퍼진 하얀 빛이 바로 되돌아오면서 옆에 떠 있던 먼지마저 떠올랐고, 탁자에 흩어져 있던 찻잔 파편도 거꾸로 날아 올라와 원래대로 뭉쳤다.

    그러나 찻잔이 막 원상태로 복원되기 직전, 사방에서 모여든 하얀 빛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찻잔은 다시 부서져서 탁자에 떨어졌다.

    섭채주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는 탁자의 도자기 파편을 자세히 살폈다. 조금전 탁자의 도자기 파편들은 복원이 안 된 게 아니라 복원이 완벽하게 안 된 것임을 알게 됐다.

    “왜지?”

    섭채주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른 찻잔을 들고 다시 시험해봤다.

    잠시 후, 탁자 위의 찻잔 여섯 개 중 다섯 개가 부서지고 마지막 하나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이 찻잔은 섭채주 손에서 서서히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표면이 반들반들하고 조금의 균열도 없었다.

    “그랬구나. 지금 내 혈맥의 힘으로는 길어봐야 30초 정도의 시간만을 되돌릴 수 있는 거야. 그 이상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복원할 수 없게 돼. 영향력의 범위도 겨우 1장 정도에 불과하고. 시간의 힘은 정말 익히기 어렵구나.”

    한바탕 소동으로 막 태을 경지에 들어선 섭채주는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새로운 신통을 파악하고 나자 나름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는 다시 침상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는 법결을 맺어 회복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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