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이변
“오라버니, 소개가 늦었어요. 제 쌍둥이 언니 유비연(柳飛燕)이에요.”
“유비연!”
유비서의 소개에 심협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울 요괴는 그 고경을 유비연이라는 사람이 줬다고 했지. 이 사람인가?’
그가 당황한 짧은 시간에 기운이 약간 새어나가자 유비서가 이를 감지하고는 흠칫 놀랐다.
“아! 오라버니가 그…… 곰 요괴였군요!”
심협은 정신을 차리고는 웃었지만,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바로 심 도우군요. 그래서 우리를 도와 그 도마뱀 요괴를 죽인 거였군요. 한데, 그 일검은 내 안력으로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역시 심 도우는 실력이 대단하군요! 자, 어서 나와 대련해요!”
유비연은 여동생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비연!”
손 파파가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오만한 유비연도 손 파파는 무서웠는지 혀를 내밀고는 고개를 숙였다.
“심 도우, 비연의 성격이 워낙 직설적이라 평소에도 그저 수련과 싸움밖에 모른다네. 도우가 이해해 주게.”
“파파가 계속 못 싸우게 하니까 진선 후기에 발목이 잡혀 있는 거라고요!”
파파의 말에 유비연이 불만을 토했다.
“그 대단하다는 네 안력으로 심 도우가 이미 태을 경지에 도달한 것은 못 알아본 게냐? 네가 심 도우의 일합이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심 오라버니, 진짜…… 벌써 태을 경지의 선배가 된 거예요?”
율율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심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연은 경악한 얼굴로 심협을 이리저리 살폈는데, 어이없게도 오히려 전의를 불태웠다.
“비연, 심 도우는 우리 여아촌의 귀빈이니 무례하게 굴지 마라!”
“네, 네!”
유비연은 얼른 대답했지만, 이글거리는 두 눈은 여전히 심협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알았으면 썩 물러가!”
손 파파가 손을 휘저으며 차갑게 말하자 유비연은 입술을 쭉 내밀더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사하고는 돌아섰다.
심협은 지금까지 저런 호탕한 성격의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심 도우, 자네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진전이 빠르군.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다 한들 이렇게 빠를 수는 없을 텐데…….”
손 파파도 궁금했는지 결국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심협은 말해주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멋쩍게 웃었다.
“이해하네. 기연, 경력, 자질 그리고 고된 경험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겠지.”
손 파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한데 만요맹이 왜 여아촌을 공격한 겁니까?”
“다른 이유가 있겠나? 약탈을 하려는 게지. 한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닐세. 만요맹이란 곳은 나타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에는 오합지졸인 줄 알았거늘, 태을 경지의 대요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듣기로는 저 유웅곤과 같은 태을 초기의 부맹주가 둘이고 그 위에 맹주가 있다는데, 그자는 한 번도 대외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어서 진짜 정체와 경지를 아무도 모른다네.”
손 파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족은 강자를 모시는 특징이 있으니 태을 경지의 요물들을 통솔하는 맹주라면 절대 그 아래는 아닐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처음에는 동해 해역에서만 활동하더니 최근에는 갑자기 육지로 진입해서 우리 주위의 중소 세력 대부분이 이미 멸문했다네. 이제는 우리 여아촌까지 공격하는군.”
“이 정도 일을 벌인 것을 보면 배후에 마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마족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네.”
심협의 의견에 손 파파는 잠시 고민한 끝에 답했다.
심협은 반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지금 삼계에 나타나는 각종 소란은 모두 치우 마족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심 도우는 동해에 무슨 일로 온 건가?”
손 파파가 갑자기 물었다.
심협은 동해지연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과 하얀 빛에 휩쓸려 이곳으로 보내졌음을 설명했다. 한데 이 말을 들은 손 파파는 굳은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손 파파, 혹시 동해지연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조금은 알고 있네.”
손 파파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심협이 포권하며 묻자 손 파파는 그의 손을 끌어 내리면서 웃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세.”
그리고는 앞장서서 심협을 데리고 광장 뒤쪽 대전으로 향했다. 유비서와 율율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 * *
동해 깊숙한 곳. 먹구름 가득한 해역에 검은색 섬 하나가 외로이 떠 있었다. 검은색 암초가 가득하고, 식물은 극히 적어 매우 황량해 보였다. 다만 섬 곳곳에는 크고 작은 석전(石殿)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로 수많은 요족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 절벽과 가까운 이곳에는 특이하게 생긴 커다란 원형 석전이 세워져 있었고, 바깥을 수많은 요병이 지키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둔광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짧은 머리칼의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유웅곤이었다.
“부 맹주님을 뵙습니다.”
대전 밖의 모든 요족이 그를 보고는 일제히 예를 올렸다.
유웅곤은 그들을 상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곧장 대전으로 들어갔다.
석전 안은 어두웠고, 가운데 바닥에는 검은색 암석으로 된 둥근 제단이 있었다. 제단 안에서 모닥불이 타오르면서 흔들리는 불꽃이 주위의 벽을 비추었다.
제단 맞은편. 검은 돌을 조각해 만든 커다란 왕좌에는 검은 그림자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몸에 검은 여우 외피를 입었고, 머리에는 높은 관을 쓰고 있었으며, 손에는 백옥자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유웅곤이 제단 맞은편에 서서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어떻게, 여아촌은 점령했나?”
분명히 온화한 말투인데 유웅곤은 몸이 떨려왔다.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맹주에게 그는 알 수 없는 경외감이 들었다.
“신의 실책으로 여아촌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유웅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했다.
“오?”
그 말이 의외였는지 검은 그림자는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본래 여아촌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는데, 어디서 불러왔는지 갑자기 태을의 고수가 나타났습니다. 그자가 저보다 막강해 저의 공격을 너무도 쉽게 막아 냈습니다.”
유웅곤의 설명에 검은 그림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전 안은 바로 조용해졌다.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함에 유웅곤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맹주님, 신이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맹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 하기에 실력을 보존하고 힘을 쓸 때를 기다리고자 돌아왔습니다. 감히 부상을 입은 채 상대와 싸우다가는…….”
유웅곤은 황급히 설명하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래, 잘했다. 앞으로의 일이 더 중하지. 이번에 중상을 입어서 계획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면 정말로 네게 죄를 물었을 것이다.”
그제야 유웅곤은 마침내 안도할 수 있었다.
“맹주님, 안심하십시오. 금전과 함께 힘을 합쳐서 반드시 그자를 제거하고 여아촌을 멸망시키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예, 맹주님.”
유웅곤은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따질까 봐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우리 만요맹에 가입하는 요족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 머지않아 동해를 평정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여아촌을 멸망시키지 못했어도 우리의 전체적인 포석에는 전혀 영향이 없지.”
“맹주님께서 이끌어주신다면 동해 용궁도 문제없을 겁니다.”
“아첨은 그만하거라. 앞으로 우리는 맹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큰일을 할 것이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우리 만요맹은 삼계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고, 그리 되면 천정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게다.”
그 말을 듣자 유웅곤은 전의가 불타올랐다. 맹주가 말한 미래를 하루빨리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돌아가 정양하고 머지않아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라.”
“맹주님, 어디로 가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동해지연.”
만요맹 맹주는 말을 마치고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 * *
여아촌의 어느 대전.
손 파파와 심협이 앉아 있었고 율율이 조용히 그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손 파파, 동해지연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심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서두르지 말고 우선 내게 말해주게. 동해지연에 가서 뭘 하려는 건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족이 그곳에서 어떤 음모를 꾸민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오늘날 삼계 곳곳이 불안정한 것은 사실 배후에 치우 일파 마족이 있지요. 그러니 그들이 이번에 심상치 않은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닌가 걱정돼 알아보러 간 것입니다.”
심협이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랬군…….”
손 파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아까 자네가 동해지연에 혼란한 공간의 힘이 충만하다 하지 않았는가? 그건 아마 수십 년 전에 그곳에서 일어난 이변 때문일 걸세.”
“수십 년 전의 이변이요?”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지진이라 그 여파가 지대했고, 동해에는 높이가 무려 백 장이나 되는 파도가 일어 내륙까지 덮쳤지. 여아촌에도 피해를 줬다네. 훗날 직접 동해로 조사하러 가봤지. 그때 동해지연에 이변이 생겨 수많은 공간 통로가 나타난 것을 확인했네.”
“그럼 그 지진은 단순한 천재지변이었나요? 아니면 다른 이유로 발생한 것인가요?”
손 파파가 머뭇거리더니 손을 꺼냈는데, 그 위에는 검푸른 색의 비늘이 놓여 있었다. 비늘 위로 광택이 흐르고 독특한 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마치 흑요석을 다듬어 만든 것 같았다.
“이것은 그때 동해지연을 조사하다가 찾아낸 걸세.”
손 파파는 검푸른 비늘을 심협에게 건넸다.
이 비늘을 손에 쥐자 보기와 달리 매우 묵직하고 차가웠다. 심지어 그 안에 혈기의 힘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본체에서 떨어진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이 정도 혈기의 기운이 남아 있다니, 이 비늘은 도대체 뭡니까?”
“나도 정확히 알 수가 없네. 다만, 당시 동해지연 전체에 그것의 기운이 남아 있다가 나중에 천천히 사라진 것을 봐서는 그것의 본체가 바로 그 이변을 일으킨 원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네.”
심협은 비늘을 매만지면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아촌의 장로가 대전으로 들어와 외부 수사 몇 명들이 마을 밖에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어떤 사람들이죠?”
“인간족 남녀 하나씩에 나머지 셋은 모두 요족인데, 그중 한 명은 내뿜는 기운이 기이하여 정체를 알 수가 없었네.”
장로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자네 동료들인가?”
손 파파가 심협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자는 아마 동해의 새로운 용왕 오홍일 겁니다.”
“그들을 들여보내게.”
잠시 후, 그 장로가 그들을 데리고 대전으로 들어왔다.
“채주야!”
심협은 막 들어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는 바로 달려갔다.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알고 보니 공간 통로에서 나온 것은 모두 비슷했지만 서로 시간에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 원구가 계속 바닷가 주위를 수색하던 중 모두 모이게 됐고, 심협을 찾으러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