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3화. 절반의 척목
“네 녀석 실력의 정진이 상당히 빨라서 벌써 태을 경지에 도달했으니 내가 널 동해지연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 대신, 먼저 내 두 가지 조건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날 오홍의 머릿속에서 풀어주고 내가 빙의할 수 있는 몸을 찾아내라.”
역시나 조룡의 혼은 곧바로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오홍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당신과 오형의 신혼은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당신이 나가면 그도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않나!”
심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황제내경 연구에 몰두해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이 공법을 기초로 하면 조룡의 혼을 분리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는 가능한 한 자신이 이 신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내 그동안 오홍에게 피해 주지 않는 상태로 그의 몸에서 분리할 방법을 찾아냈다. 다만, 이 술법을 시전하기는 매우 까다로워서 태을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형, 어떻게 생각합니까?”
심협은 오홍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전음으로 물었다.
조룡의 혼은 비록 위협적이긴 해도 시야나 식견은 거대한 보물창고와 같았다.
“내가 다치지 않고 조룡의 혼을 빼낼 수 있다면 오히려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요.”
오홍이 바로 대답했다.
조룡의 혼이 그의 몸에 있는 것은 결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근이었기에 만약 벗어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 조건은 승낙하죠. 또 하나는 뭡니까?”
심협은 오홍이 불만이 없는 듯하자 조룡의 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에서 내 본원의 힘이 담긴 보물이 느껴진다. 그걸 내게 넘겨라.”
조룡의 혼은 눈빛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이걸 말하는 겁니까?”
심협이 가만히 조룡척목을 꺼냈다.
“그래, 이건 내 용뿔로 만든 거다! 내게 다오!”
조룡의 혼은 지금까지와 달리 진정으로 감격한 모습이었다.
한편, 오홍도 조룡척목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룡의 척목에 별다른 미련이 없었던 심협이 바로 던져주려는 순간이었다.
“심형, 절반만 남겨 주시오! 조룡의 혼을 빼내는 더 효과적인 방법을 내가 알고 있으니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거래가 될 거요.”
심협의 머릿속에서 오홍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협은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조룡척목을 내려놓았다.
“이 척목을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리 쉽게 줄 수 있나.”
“뭐라! 그건 원래 내 것이다!”
조룡의 혼이 화를 냈다.
“그야 옛날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허나 증거가 없지 않소? 게다가 쭉 남해 해저에 숨겨져 있던 것을 고생해가며 찾아낸 건 바로 나요.”
심협이 척목을 손 위에서 살짝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조룡의 혼은 화가 솟구쳤지만, 지금은 잔혼에 불과했기에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동해지연의 위치뿐이었다.
“원하는 게 뭐냐?”
조룡의 혼은 분노를 누르며 말했다.
“이건 나한테도 필요하니 절반만 주겠습니다.”
“……좋다.”
조룡의 혼은 분노로 이가 갈렸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심협은 씩 웃고는 손을 들더니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붉은 검광이 척목을 정확하게 반으로 잘랐고, 그중 하나가 조룡의 혼 앞으로 날아갔다.
조룡의 혼은 입을 벌려 절반의 척목을 꿀꺽 삼키더니 순식간에 오홍의 머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오홍이 바로 양손을 결인하자 입에서 나온 금빛이 이마로 녹아 들어갔다. 그의 미간에서 갑자기 금색 부문이 떠오르더니 아홉 마리 금룡이 맴도는 광경이 나타났는데, 모종의 봉인 비법 같았다.
조룡의 혼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더니 금색 봉인에 완전히 봉인되었다.
이를 본 심협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조룡의 혼이 동해지연에 대해서는 말해주기로 했어도 북해거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못 했지만, 천천히 물어도 늦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동해 용궁의 구룡봉혼술(九龍封魂術)로 당분간 조룡의 혼을 봉인하고 외부의 감지를 모두 차단할 수 있소. 심형, 남은 척목을 내게 보여줄 수 있겠소?”
오홍이 미간에 떠오른 무늬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더니 심협이 들고 있는 절반의 조룡척목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오형도 이게 필요한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 경지가 이미 진선 후기 절정에 도달해 태을 경지까지 반걸음도 남지 않았소. 이 척목에 담긴 조룡의 힘이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요.”
오홍이 흥분하며 조룡의 척목을 받고는 말했다.
심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홍에게 척목을 넘긴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용궁의 보물과 교환할 의향이 있으니 심형이 골라보시오.”
오홍은 척목을 자세히 살펴보며 크게 기뻐하다가 고개를 휙 들며 말했다.
“내게는 별 쓸모가 없으니 오형께 필요하다면 기꺼이 드리리다. 대신 만년화린목과 구천금정, 천화급 불꽃을 모아주시길 부탁하오.”
그는 이미 화생사와 천기성에 이 보물을 모아 달라고 부탁해놨는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오홍에게도 같은 것을 부탁했다.
“알겠소, 내 바로 명령을 내리겠소.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오.”
오홍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오.”
“봉인의 힘이 사라지기 전에 이 조룡의 척목을 연화해야 하니 짧으면 7일, 길면 보름은 걸릴 듯하오. 그동안 심형과 섭 소저는 용궁에서 편히 쉬고 계시오.”
심협도 급할 것은 없었기에 섭채주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홍은 조룡의 척목을 연화하는 일이 급했기에 서둘러 신하에게 심협 일행을 거처로 안내하도록 지시하고는 바로 폐관하러 갔다.
* * *
거처는 심협이 과거에 묵었던 동해의 별원으로, 오홍은 이곳 외에 세 개의 동부를 마련해줬다.
심협이 동부 입구에 서서 소매를 휘두르자 푸른빛이 연달아 부근에 떨어졌고, 빛이 펼쳐지면서 몇 겹의 금제 광막이 되었다.
“오라버니, 폐관하려고요?”
“법보를 몇 개 만들 계획인데, 며칠 걸릴 거야.”
“법보요? 설마…… 마음 놓고 만들어요. 제가 밖에서 호법을 설게요.”
섭채주는 심협이 어떤 법보를 만들려는지 이해한 듯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이곳은 동해 용궁이니 큰 위험은 없을 거야. 조비극에게 호법을 서게 하면 돼. 채주, 너도 경지가 진선기 절정에 도달했으니 어서 태을 경지로 들어서야지.”
심협은 웃으며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알고 있는데 태을 경지가 도달하고 싶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섭채주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녀라고 왜 태을 경지에 도달하고 싶지 않겠는가. 창궁 비경에서 나온 이후로 청련선자는 제자의 경지가 진선 절정에 도달한 것을 보고는 바로 태을 경지로 도달할 수 있는 각종 방법과 단약을 준비했지만,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도울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게.”
심협이 섭채주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원구는 어이가 없었다. 태을 경지로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저런 큰소리를 한단 말인가? 자기 여자 앞이라고 허풍을 떠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그럴 능력이 있는 것인가?
“알겠어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섭채주는 심협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웃으며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그럼 저도 이만 쉬러 가겠습니다.”
원구는 아직도 심협이 무서웠기에 헛기침을 하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
“또 볼 일이 있는 겁니까?”
심협이 갑자기 불러세우자 원구는 심장이 덜컥하며 우뚝 멈춰 섰다.
“네 동부로 가서 얘기하지.”
심협이 앞장서자 원구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원구의 동부에 들어온 심협은 손을 휘둘러 방 주위에 금제를 설치했다. 외부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됐다.
“시, 심 도우! 대체 무…… 무슨 일입니까?”
원구는 가슴이 철렁해 더듬더듬 물었으나, 심협은 대답 대신 서적 한 권을 꺼내서 던졌다.
원구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고는 힐끗 살폈는데,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서적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가 꿈에도 그리던 <약선집> 전권(全卷)이었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이 서적을 펼쳤고, 심협이 옆에 있는 것도 잊은 듯 정신없이 읽다가 한참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심 도우, 그날 우리 약속은 도우 곁에 백 년 동안 머물면서 도와야 <약선집>을 준다는 것이었죠. 비록 그 이후로 백 년이 지나긴 했지만 내내 도우 곁에 머물며 돕지도 못했는데 왜……?”
원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백 년 동안 난 쭉 장안성에 잠들어 있었으니 너를 탓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약선집>은 내게 쓸모도 없지. 그러니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심 도우.”
원구는 몸을 가볍게 떨며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의 고술은 이미 대성했지만, 완벽하지 않은 <약선집>으로 연구한 탓에 약선종의 연고술(煉蠱術)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한데 이제 <약선집> 전권을 얻었으니 약간의 깨달음만 얻게 된다면 그의 고술은 한 단계 더 나아갈 터였다.
“별것 아니다. 그나저나 고술에 비하면 경지는 정진이 상당히 느리구나.”
심협은 원구의 두 눈을 자세히 살핀 후에 말했다.
“제 사정은 심 도우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당시 원구는 죽었고 저는 본명고 안에 남아 있던 신혼의 힘으로 이 몸을 차지한 것뿐이라 신혼이 불완전합니다. 그동안 자원을 모아서 간신히 대승 절정에 도달하긴 했지만, 더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더군요.”
“신혼이 불완전하면 확실히 대도는 가망이 없지. 허나 혼백을 고치고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혼백을 고치고 완전하게 하다니요? 그건 여와 성인의 명혼술(命魂術)만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 하늘에 통달한 수법을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원구가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나한테 방법이 있긴 해. 전설의 명혼술만큼 현묘하지는 않지만, 네 상태를 약간 조절할 수는 있지. 네가 날 믿는다면 시도해 보겠다.”
그의 말대로 <황제내경> 소문편에는 신혼을 복원하는 비법이 있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원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입술을 떨며 물었다.
“장담은 못 하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다. 결정은 네 몫이다.”
심협의 담담한 목소리에 원구의 표정에서 흥분이 사라졌고, 그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신혼은 본래 매우 약한 존재다. 그러니 신혼에 사용하는 수단은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하다. 하물며 그의 신혼은 불완전한 상태라 그 위험 또한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다. 한데 심협이 장담을 못 한다 하니 머뭇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여기서 포기하면 앞으로 영원히 진선기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원구의 표정은 짧은 순간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그는 신혼을 복원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고, 대량의 진귀한 단약와 선과를 먹기도 했다. 이전에 용궁의 영재를 훔쳐서 달아났던 것도 일약재에서 진귀한 영과와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그 영과의 효용은 역시나 비범해 복용하고 나니 외모가 노인의 모습에서 지금과 같은 중년으로 변했지만, 근본적인 신혼의 문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신혼만 문제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사실 대승 절정의 고사는 어딜 가든 예우를 받으니 원구는 제법 만족하며 지냈지만, 수명 문제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육신은 가뜩이나 수명이 길지 않았다. 지난 백 년 동안 온갖 수단을 써서 수명을 늘리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기껏해야 60년 정도 남았을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원구가 이를 악물고 공수하며 말했다.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도박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심협은 말없이 손짓으로 원구를 자신 앞에 앉히더니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손바닥에서 밝은 초록색 빛이 번득이더니 원구의 머리를 뒤덮었다.
원구는 자신의 신혼에 따뜻한 물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따스하고 더없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방법이 있긴 있나 보네.’
심협에 대한 믿음이 조금은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