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2화. 지음지암(至陰至暗)
심협은 가볍게 웃고는 손가락을 튕겨 예망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원구는 두 다리가 풀리면서 엉덩방아를 찧고는 씩 웃었다.
“다른 건 됐고, 내가 장안성에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너는 내 법보 공간에 피해 있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그 법보 공간이 그때 어떤 이상(異狀)을 보였나?”
그날 옥침이 부서질 때, 원구는 천책 공간에 숨어 있었다. 옥침이 부서질 때 천책 공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심협은 매우 궁금했다. 어쩌면 옥침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금색 공간 말입니까? 그날 저는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공간이 갑자기 심하게 일그러지면서 폭발하더니 모든 공간을 망라하는 통로가 나타났죠. 저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휩쓸려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동해 구역이었습니다.”
원구는 몇 년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숨김없이 말했다.
그 말에 심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금색 공간이 부서진 것이야 이상할 게 없지만, 공간의 통로가 나타났다는 것은 당황스러웠다.
“그 공간 통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는가?”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금빛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안에는 어렴풋이 금색 부문이 보였는데…….”
원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공간 통로의 모습을 대략 묘사했다.
“그리고 또?”
“음…… 아,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에 금색 정광이 저와 함께 공간 통로로 들어가는 걸 본 것 같습니다.”
원구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금색 정광? 확실해?”
심협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장담은 못 합니다. 저도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으니 잘못 봤을 수도 있지요. 동해에서 깨어난 이후로 조사해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 찾았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심 도우는 동해 용궁에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원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에 오형에게서 빌린 것도 돌려줄 겸, 그에게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
심협은 천책 공간에 대해 생각하느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오홍…… 벗을 만나는 자리이니 제가 방해하면 안 되겠군요. 방금 그 공간 안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시겠습니까?”
“왜, 오형을 만나면 안 될 잘못이라도 한 모양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와 오홍 도우는 강호에서 만났고, 비록 도우처럼 생사를 함께한 정은 없으나 그래도 벗인데 제가 왜 그를 피하겠습니까?”
원구가 굳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보면 되겠네.”
원구가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발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원구는 매우 다급한 얼굴로 숨을 곳을 찾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심협 뒤에 움츠려서 숨었다.
잠시 후, 키가 큰 누군가가 불쑥 들어왔다. 바로 오홍이었다.
그는 자금색 용포를 입었고, 머리에는 현월용관(玄月龍冠)을 쓰고 있어 용왕으로서의 위엄이 넘쳤고, 경지도 상당히 정진하여 태을 경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하! 심형, 못 본 사이에 풍채가 더 훤해졌소. 이분은…… 보타산의 섭 도우시군요! 심형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
오홍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고, 심협이 일어나 인사하려는데 오홍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원구를 보고는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원구와 오홍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그 연유를 알 것 같았다.
“하하…… 하…… 오홍 도우, 오랜만입니다.”
원구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곧게 폈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동해 용궁을 속이고 그 많은 진귀한 재료를 훔쳐 달아나 놓고는 감히 다시 돌아오다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오홍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홍 도우,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그때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부득불 동해 용궁을 떠났을 뿐, 보물을 훔쳐 잠적할 뜻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내 이번에 심 도우와 함께 온 것도 일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여기, 열 마리의 벽해고(碧海蠱)입니다. 나머지 스무 마리는 한 달 안에 드리지요.”
원구가 환하게 웃더니 초록색 나무 상자를 건넸다.
심협은 그제야 원구가 왜 오홍과의 만남을 피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원구는 오홍을 속여 동해 용궁의 영재를 훔쳐 달아났었던 것이었다. 과거의 원구도 믿을 만한 자는 아니었으나 이 정도의 사기꾼인 줄은 그도 몰랐다.
허나 심협을 놀라게 한 것은 원구가 만들었다는 벽해고였다. 그것도 수십 마리를 만들어내다니, 그의 고술이 이 정도 경지까지 정진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벽해고는 <약선집>에 기록되어 있는 7품 고충으로, 숙주의 기혈의 힘을 저장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돌려주는 능력이 있다. 이는 진선의 존재에게도 효과가 있었고, 특히 요족처럼 육신 수련에 집중하는 종족에게는 더욱 유용했다.
그 무렵, 나무 상자를 받아 열어본 오홍은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한 달이다.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면 이전의 친분 따위로 그냥 넘어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라.”
오홍이 원구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네.”
원구는 다시 목을 움츠리며 심협의 뒤로 돌아가 숨었다.
“벽혈고를 만들 수 있었어?”
심협이 전음으로 물었다.
“제 신혼은 불완전해서 경지의 정진이 워낙 느리니 대부분의 시간을 고충을 만드는 데 투자했죠.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그때 깨어난 이후부터는 고충 제작이 순조로워졌고 성공률도 이전보다 몇 배나 높아졌습니다. 7품 고충은 말할 것도 없고 8품 고충까지도 만들 수 있습니다.”
원구의 의기양양한 대답에 심협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8품 고충은 태을 존재에게도 유용하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나와 원구 도우는 몇 번의 거래로 왕래가 있었는데 우스운 꼴을 보였소.”
오홍이 심협을 돌아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아니오.”
심협 또한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웃었다.
섭채주는 오홍과 원구를 잘 알지 못했기에 가만히 심협 옆에 서 있었다.
“오형, 심혈구이주를 돌려주러 왔소. 정말 큰 도움이 됐소.”
심협은 하얀 옥갑을 꺼내 건넸다.
오홍은 심협이 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옥갑을 받자 뚜껑을 열었다. 사나운 용의 기운 파동이 새어 나왔다. 옥갑 중앙의 심혈구이주가 뿜어내는 용의 기운에 이끌려 주위에서는 물의 기운이 끊임없이 요동쳤다. 심협이 빌려 가기 전 상태 그대로였고, 영력도 거의 사라지지 않았다.
“심 도우는 정말 믿음이 가오.”
오홍은 안도하며 뚜껑을 닫고 옥갑을 챙겨 넣었다.
심혈구이주는 용해 용궁의 지보라 그가 외부인에게 빌려줬을 때 용궁의 수많은 사람이 수군댔고, 심지어 원망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한데 이제 보물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줄곧 불편했던 마음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오형이 아낌없이 빌려준 덕에 큰 도움이 되었소.”
“그러고 보니 심형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소?”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오홍의 물음에 심협은 웃으며 포권했다.
“그럼 다행이오.”
오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일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담을 나눴고, 장안성과 청구성의 상황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사실 심혈구이주를 돌려줄 겸, 몇 가지 오형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왔다오.”
어느 정도 겉치레를 한 후, 심협은 본론을 꺼냈다.
“편하게 말씀하시오.”
“용궁에 오는 길에 우연히 원구를 만났는데 물고기 요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소. 그가 말하길, 동해에 만요맹이라는 세력이 나타나 꽤나 소란을 피우고 있다더군요. 심지어 동해 구역의 모든 인간족 수사를 쓸어버리겠다고 선포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이오. 만요맹은 내력이 신비로워 갑자기 튀어나왔소. 현재 동해 요족 대부분이 가입했고, 우리 동해 용궁에도 초대를 보냈소.”
“확실히 겁이 없군요. 오형도 합류할 생각입니까?”
“흥! 우리 동해 용궁은 천정이 책봉한 정신(正神)이거늘, 어찌 그런 정체불명의 요맹에 가입하겠소? 그저 이전의 격변으로 세가 많이 약해져 지금은 그 만요맹이란 곳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뿐이오.”
오홍은 가당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갓 대권을 장악하자마자 만요맹이 자신들에게 가입하라고 한 것은 동해의 패주인 동해 용궁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오홍에게는 굴욕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천정에 알려 이 일을 처리해달라 청하지 않았나요?”
옆에서 섭채주가 물었다.
동해 만요맹이 이대로 세가 강해지고 안하무인으로 군다면 보타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녀는 조만간 이 사실을 종문에 보고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이미 보고했소. 한데 천정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군요.”
오홍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천정이 다른 일로 바빠서 그런 것일 테니 좀 늦더라도 답이 내려올 거요. 그러니 오형은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오.”
심협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방촌산과 장안성 모두 신마의 우물 입구가 공격을 받았고, 요족이 수많은 소란을 일으켰으며, 호조가 돌아왔다. 천정은 그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쁠 테니 만요맹의 소란이 지나치게 크지만 않으면 천정도 당장은 신경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길 바랄 뿐이오.”
오홍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오형께 물어볼 게 하나 더 있는데, 혹시 동해지연이란 곳을 아십니까?”
심협은 화제를 돌렸다.
그는 이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만요맹은 자신과 큰 관계가 없고, 그 세력이 아무리 커져도 대당에 위협이 될 리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해지연? 부왕께서 언급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소. 전설적인 장소로, 동해의 지음지암(至陰至暗)한 곳이라고 들었지.”
오홍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그럼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습니까?”
“그건 들어보지 못했소. 부왕께서도 동해지연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셨던 것 같구려.”
심협은 내심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형은 북명거린이 무엇인지 아시오?”
“북명거린? 그게 뭐요? 영재인가?”
오홍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심협은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동해에서 동해지연과 북명거린의 단서를 얻으려 했지만, 바람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오홍도 동해지연을 모르면 어디 가서 찾아봐야 한단 말인가.
그때, 웅장한 목소리가 갑자기 방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 심협, 저 오홍이 당대 동해의 용왕이긴 하나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데 그런 상고의 비밀을 알 리가 있겠는가!”
섭채주와 원구는 흠칫 놀랐다.
“어이, 늙은 괴물. 지금 뭐라고 했어?”
오홍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애송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니 입 다물고 있거라.”
오홍의 미간에서 붉은 빛이 번득이더니 주먹만 한 붉은색 용의 머리, 조룡의 혼이 튀어나와 차갑게 비웃었다.
오홍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조룡 선배? 동해지연과 북명거린에 대해 알고 있는 겁니까?”
심협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당연한 일! 본존은 조룡이다. 본존의 세력권인 동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으냐!”
조룡의 혼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가르침을 주십시오”
심협이 공수하며 말했다.
“알려달라고? 본존이 지금 이 꼴이 된 게 다 네놈 때문인 것을 잊었느냐? 한데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조룡의 혼이 그를 힐끗 노려보더니 흥 하며 말했다.
“그럼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보시죠.”
심협이 서두르는 기색 없이 씩 웃으며 말했다. 조룡의 혼이 먼저 튀어나와 끼어들었다는 것은 분명 뭔가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