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60화 (1,060/1,214)

1060화. 동해지연(東海之淵)

요풍이 한 손에 구슬을 들고 알아듣기 어려운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흑홍색의 가느다란 침이 수도 없이 날아가 365개의 옥기둥에 깊이 박혔다.

방금 전까지 옥기둥에서 빛나던 별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흑홍색 광망이 퍼지자 봉인 옥기둥의 성진 진문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 광경을 본 심협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됐다!”

요풍이 결인을 멈추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있는 소인(小人)이 주문을 외우며 결인했다.

주위의 귀진 안에 있던 짙은 귀기가 용솟음치며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10여 장 크기의 백골 귀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눈앞의 거대한 백골 귀물을 바라보며 심협은 의아했다.

이 귀물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려 있었고, 몸에는 정교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왼손에는 거대한 뼈 방패를, 오른손에는 칠흑의 불꽃이 타오르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기운은 태을의 존재와 견줄 정도였다.

백골 귀물은 나타나자마자 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봉인 옥기둥으로 달려들더니 불꽃이 타오르는 도끼로 그중 하나를 강하게 내리쳤다.

꽈르릉!

옥기둥이 부서지면서 굉음이 울리며 지하 동굴은 더욱 강렬하게 흔들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원기(怨機)와 귀력(鬼力)이 뭉쳐 실제 같은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휘몰아치자 근처에 있는 귀진도 충격에 크게 흔들렸고, 붕괴할 조짐마저 보였다.

백골의 깃발 위에 서 있던 소인은 이 광경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며 열 손가락을 차륜처럼 빠르게 결인했다.

휘리릭!

발아래의 커다란 깃발에서 검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가 주위의 귀진으로 들어가자 귀진의 운공 속도가 갑자기 열 배는 빨라지더니 그 안에 있던 모든 군혼을 가뒀다.

백골의 깃발이 바람을 맞으며 점점 커지더니 그 군혼들을 전부 휘감고는 강력한 흡입력으로 고래가 물을 삼키듯이 전부 빨아들였다.

이를 본 심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저 백골의 깃발은 만귀번과 유사하나 그 위력은 천양지차로구나.’

만귀번의 음기든 기세든 모두 눈앞의 백골 깃발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백골 귀물은 곧장 다음 옥기둥을 향해 돌진했고, 검은 도끼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 봉인 옥기둥도 부서졌고, 수많은 군혼이 다시 떠올랐다.

요풍과 소인은 이를 보고 주위의 귀진과 백골의 깃발을 발동하여 날아오른 군혼을 다시 흡수했다.

반 각도 되지 않아서 모든 봉인 옥기둥이 부서졌고, 안에 있는 귀물은 전부 백골 깃발에 흡수되었다.

“드디어 끝났군. 설마 이런 곳에 이렇게 많은 군혼이 있을 줄이야. 하늘이 날 도왔어!”

소인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날 청구 호족의 첩자를 돕다가 우연히 이 동굴을 발견한 게 행운이지.”

“주천성두대진은 역시 상대하기 까다로웠어. 유계존자(酉鷄尊者)에게서 만귀전륜대진(萬鬼轉輪大陣)과 흑혈귀침(黑血鬼針)을 빌려왔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런 횡재를 두 눈 뜨고 지켜보기만 했겠지.”

소인이 흡족한 듯 웃으며 다시 흑홍의 구슬을 꺼냈다.

부서진 옥기둥에서 흑홍의 가느다란 침이 날아오르더니 돌아와 그 구슬로 들어갔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주천성두대진의 진문은 다 기록했어? 유계존자, 그 늙은이는 주천성두대진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만귀전륜대진과 흑혈귀침을 빌려준 거라고. 그 늙은이에게 책잡히는 건 질색이야.”

“다 기록했으니까 걱정 마.”

요풍의 물음에 소인이 허리춤의 저물대를 톡톡 치며 말했다.

“다행이군.”

요풍이 안도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심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족의 십이존자가 이미 모이기 시작한 건가? 만약 정말로 그들이 모인 거라면 천 년 뒤의 그 참혹한 세계가 재현될지도 몰라.’

그때, 소인이 백골의 깃발을 향해 결인하며 말했다.

“대충 마무리됐으니 난 이제 동해지연(東海之淵)으로 가야겠군. 여기서 헤어지자고.”

깃발이 빠르게 줄어들어 눈 깜짝할 사이 하얀 빛으로 변해 소인의 소매로 들어갔다.

이를 마친 소인은 몸이 검은 그림자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요풍은 눈으로 그를 배웅하고는 몸이 흔들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심협은 곧바로 소인을 쫓아가려 했다. 요풍은 그 정체가 서천황미승(西天黃眉僧)임을 진즉 알아낸 반면 소인의 정체는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방금 두 사람에 대화를 통해 소인도 마족에서 지위가 낮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십이존자중 하나일지도 모르나, 꿈속 세계의 십이존자 중에는 이런 자가 없었으니 반드시 정체를 밝혀내야 했다.

한데 그때, 심협은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고, 곧 의식을 잃었다. 시공간 초월의 시간이 이미 다한 것이었다.

잠시 후, 심협은 천천히 깨어났다. 역시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오라버니, 누가 이 봉인 옥기둥을 부쉈는지 알아내셨어요?”

섭채주가 다가오며 물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꿈속에서 본 것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역시 마족이었군요.”

“심협, 방금 백골의 깃발이 군혼들을 가볍게 흡수했다고 했나?”

불빛이 반짝이더니 화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그 백골의 깃발은 시공간을 넘은 나에게까지 영향을 줬어. 그게 뭔지 알아?”

“내 추측대로라면, 그건 상고 중보 섭혼번(攝魂幡)일 게다. 혼백의 힘을 흡수하는 신통이 있지.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옥침이 시공간을 초월할 때 너의 신혼을 전송한다. 옥침의 힘이 지켜주니 대다수의 물리적인 공격은 피할 수 있지만, 섭혼번에는 섭혼의 법칙이 있어 옥침의 힘으로도 피하지 못했을 테지.”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보자 섭채주는 심협이 꿈속에 들어가 있던 동안 자신이 관찰했던 것들을 말해줬다.

“그렇다면 정말로 내 신혼이 과거로 넘어간 거로군. 그래서 섭혼번의 영향을 받은 거야. 한데 그 섭혼번은 만귀번과 매우 비슷했어.”

“만귀번은 섭혼번의 모조품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안에 담긴 법칙들이 부서졌고, 주요 신통이 귀물을 조종하는 데 집중되어 있어서 섭혼번 같은 혼연천성(渾然天成)의 영동(靈動)의 감은 없었던 게지.”

“그렇군. 섭혼번이 그 군혼들을 가져갔는데 전부 연화해버리게 될까?”

“그건 아닐 거다. 섭혼번의 섭혼 법칙은 주로 신혼을 흡수하기만 하지 연화할 수는 없다. 또한, 방금 네 말을 들어봐서는 그 키 작은 놈은 그 군혼들을 이용하여 어떤 일을 꾸미려는 것 같으니 당분간은 건드리지 않겠지.”

심협은 그 말을 듣고는 내심 안도했다. 앞으로 천존기에 들어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군혼의 힘이 필요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아 와야 했다.

“오라버니, 그 동해지연이란 곳으로 가서 마족 소인을 쫓을 생각이죠?”

섭채주는 심협의 표정을 보고 예상했다.

“그래. 그 군혼들은 내게 매우 중요해. 그리고 그 소인이 동해지연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잖아. 마족은 천하의 공적이고, 나와 마족은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야. 그러니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심협을 또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게 걱정된 섭채주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좋은 생각이다. 태을기에 들어서면서 경지가 더 강해졌으니 보통 수행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깨달음을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게 좋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심협이 화령자의 말에 동의하고는 결연한 눈빛으로 섭채주를 돌아봤다.

“두 분이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네요. 함께 동해로 가요.”

“채주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목숨까지 걸고 모험하지는 않을 거야.”

심협은 섭채주의 손을 꼭 잡으며 안심시켰다.

모든 것이 결정되자 심협은 도천신살대진과 화령자를 거두고는 섭채주와 함께 동해로 출발했다.

* * *

며칠을 날아간 끝에 심협과 섭채주는 마침내 동해에 도착했다.

대당 각지는 청구 호족의 소란으로 난리였지만, 동해는 여전히 평온했다. 하늘 높이 태양이 걸려 있었고, 푸른 바다가 시야 끝까지 펼쳐졌으며, 따스한 바람이 몰려와 나른했다.

“동해는 참 오랜만인데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심협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섭채주는 그동안 심협과 함께 창궁 비경에 갇혀 있었고, 그곳을 떠난 뒤로는 또 사방을 돌아다니며 싸워왔기에 지금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런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라버니, 동해지연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보타산이 있는 남해와 동해는 서로 이웃하고 있어서 이전에 동해에 관련된 서적을 많이 봤지만 동해지연이라는 곳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나도 잘 몰라.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있겠지.”

심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더니 동남쪽을 돌아봤다.

“동해 용궁으로 가서 물어보려고요? 동해 용궁은 동해를 관할하고 있으니 알겠네요.”

섭채주는 심협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둔광으로 변하여 동해 용궁을 향해 날아갔다.

동해 해역 변경은 인적이 드물지만, 종문이 매우 많고 해역 깊은 곳에는 산물이 풍부했다.

바다에 들어간 뒤, 심협과 섭채주 앞에 펼쳐진 길은 섬이 가득한 해로가 아니었다. 수사들이 점점 늘어나 때로는 몇 명에서 십수 명의 수사들을 마주쳤다.

다만 이 수사들은 행색이 다급했고, 부상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경계하며 서둘러 멀리 달아났다.

몇 번이나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심협은 살짝 눈살을 찌푸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죠?”

섭채주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물었다.

“아무래도 평온해 보이는 것과 달리 동해에 무슨 변고가 일어난 모양이야. 물어볼 사람을 찾아야겠어.”

두 사람은 조금 더 나아갔는데, 갑자기 앞에서 격렬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뒤이어 커다란 폭발음과 눈부신 광망도 간간이 보였다. 누군가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음이 분명했다.

심협은 신식으로 살펴보고는 두 눈을 홉떴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싸움터에 도착했다.

여섯 명이 해수면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충돌할 때마다 강풍이 휘몰아쳐 발아래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사방으로 퍼졌다.

그중 네 명은 물고기 머리에 사람 몸을 한 대승기 요족들로, 비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들이 초록색 갈퀴를 휘두를 때마다 푸른 수뇌(水雷)가 뿜어져 나갔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다.

나머지 두 명은 인간이었다. 한 명은 비단옷을 입은 회색 머리 청년으로, 그가 황토색 거북이 방패를 사용할 때마다 심상치 않은 영동이 일었고, 황망이 번쩍이며 두 마리 물고기 요물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지막 한 명은 흑의의 중년 남자였는데, 청년과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그는 법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반경 10여 장에 가득한 짙은 보라색 안개에서 커다란 웅웅 소리가 울렸는데, 보라색 날개가 달린 개미들이었다.

이 날개 달린 개미들이 입에서 보라색 번개를 뿜어내, 나머지 두 물고기 머리 요물의 공격을 막아냈다.

흑의의 중년 남자는 대승기 절정으로, 진선기까지 한 걸음 남긴 상태였다. 회색 머리 청년도 대승 후기라 네 마리 물고기 요물보다 월등했다. 다만 물고기 요물이 수적으로 우세했고,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이에 흑의의 남자와 회색 머리 청년은 열세에 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허공에서 영광이 번쩍이더니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물론 심협과 섭채주였다.

섭채주는 그들을 보고도 담담했지만, 심협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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