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58화 (1,058/1,214)
  • 1058화. 선남선녀(善男善女)

    심협이 다시 법력을 주입하자 검은색 씨앗에서 또 검은 빛이 번득이더니 약한 기운을 뿜어냈다.

    화령자는 뒷짐을 진 채 주위를 서성이며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허!”

    “도대체 무슨 상황인데?”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씨앗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말해봐라.”

    화령자의 진중한 목소리에 심협은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심협, 내 추측이 옳다면, 이것은 천지가 개벽할 시기에 남겨진 선천영물 중 하나인 전설의 혼돈흑련(混沌黑蓮)의 씨앗일 가능성이 크다. 이 물건이 만약 제대로 성장한다면 세상 모든 원기를 연화할 수 있을 게다.”

    화령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세상 모든 원기를 연화……? 지금 농담하는 거야?”

    “뭐! 내가 이만큼 진지했던 적이 있느냐! 어딜 봐서 농담이라는 게야!”

    “하! 그럼 정말로 보물을 주운 건가?”

    화령자의 엄숙한 표정을 보며 심협은 기뻐했다.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 세계는 너무 많이 변했고, 환경도 원고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지. 그러니 혼돈흑련 씨앗이 싹을 틔우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비록 뿌리가 자랐지만 진정으로 성장하기까지는 갈 길이 한참 멀다.”

    “뜸 들이지 말고, 어떻게 하면 계속 성장할 수 있는지나 좀 말해줘.”

    “이 물건은 천지가 개벽할 때의 산물이니 아마도 그때 천지에 가득했던 선천원기만이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을 게다.”

    “천지가 개벽한 게 언젠데……. 선천원기는 일찌감치 사라졌거나 선천 지보로 바뀌었을 거 아냐. 그걸 어디서 찾아? 그럼 완전히 기회가 없는 건가?”

    화령자 역시 좋은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듯했으나, 오히려 심협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왜 지금 잎이 나고 눈에 띄게 커졌을까? 수염까지 늘어났고 말이야. 이건 성장이 아닌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네가 태을 경지에 들어섰을 때의 상태와 관련이 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태을로 들어서면서 생긴 변화는 일종의 천지 대련(大煉)이다. 후천이 선천으로 바뀌고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지. 그런 상태에서 네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선천의 힘이 혼돈흑련 씨앗에 변화를 줬을 게다.”

    “그럼 내가 천존 경지에 들어서야만 또다시 후천이 선천으로 변해서 이 싹을 더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건가?”

    “그렇긴 한데,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게다.”

    심협은 이전에 혼돈흑련 씨앗이 효능을 발휘했던 상황들을 자세히 떠올리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니, 틀렸어!”

    “뭐가 틀렸다는 거야?”

    화령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혼돈흑련 씨앗이 이전에 몇 차례 기이한 위력을 발휘했을 때 흡수했던 것은 모두 치우의 힘이었어. 치우의 힘에는 가장 순수하고 선천적인 마기가 담겨 있지. 그러니 혼돈흑련 씨앗은 선천영기든 선천마기든 가리지 않는다는 거지. 아니면 이게 선천의 산물이 아니거나.”

    심협이 혼돈흑련 씨앗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말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일단 시도해 보면 알겠지.”

    심협은 씩 웃더니 소요경에서 혈색 조도를 꺼냈다. 이것은 치우의 마기로, 그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선천마기가 담겨 있었다.

    심협은 혈색 조도를 왼손 손목에 가까이 가져가서는 신념과 법력을 동시에 운공하여 혼돈흑련 씨앗을 발동했다.

    화령자도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혼돈흑련 씨앗이 갑자기 가볍게 떨리더니 검은색 기운이 다시 흘러나왔다. 그 아래 자란 수염은 마치 가느다란 작은 손처럼 심협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뿌리는 심협의 피부를 뚫지 않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혈색 조도를 찔렀다.

    뿌리와 닿는 순간, 혈색 조도가 떨리기 시작했고, 심협의 몸도 흔들렸다.

    곧이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은색 마기가 혈색 조도에서 흘러나오더니 흩어질 기미도 없이 혼돈흑련 뿌리에 달라붙었고, 그대로 심협의 체내로 흘어들어갔다.

    “정말 효과가 있어! 그것도 상당히!”

    심협은 여전히 긴장한 채, 순수하기 그지없는 치우 마기가 뿌리를 타고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마기가 몸에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이상함이 감지되지 않았다.

    모든 마기가 혼돈흑련의 뿌리에 단단히 속박되어 심협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전부 검은색 씨앗으로 들어갔다.

    치우 마기가 전부 뽑혀 나가자 혈색 조도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은 조금 약해졌다. 심협이 위협적이라고 느꼈던 기운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한편, 혼돈흑련의 씨앗에는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윗부분이 갈라지더니 작은 새싹이 튀어나왔고 또 가느다란 입이 펼쳐져 세 개의 잎이 된 것이었다.

    “하하! 정말 되는구나!”

    “저…… 심협. 너무 기뻐하지는 말라고…….”

    아연실색하던 화령자가 갑자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왜?”

    심협이 긴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선천영물인 혼돈흑련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계속 성장하면 조금씩 의식이 생겨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혼돈흑련에 영식이라도 생겨서 나에게 반항할 수도 있다, 그거야?”

    심협은 긴장한 목소리로 묻자 화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게다가…… 선천영기가 아니라 선천마기를 주입하여 기른 영식이라면 분명 매우 난폭해서 성장한 뒤에 네가 제어하지 못하면 오히려 잡아먹힐 수가 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심협은 깜짝 놀라며 바짝 긴장했다.

    “흥! 네가 아무렇게나 꺼낸 물건이 정말로 선천영물을 키울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

    화령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어쩌지? 아직 덜 자랐을 때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 버릴까?”

    “겨우겨우 번식하기에 좋은 환경을 찾았는데 쉽게 옮겨질 것 같냐? 네가 심혈을 기울이고 몸과 정신이 손상을 입으면서까지 꺼낸다 해도 그걸 어디다 옮겨 심게? 그리고 몸에서 벗어나면 혼돈흑련은 바로 시들어서 죽는다.”

    그 말투에서 심협은 화령자가 자신보다 혼돈흑련이 죽는 것을 더 아쉬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나한테 양쪽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해보겠나?”

    화령자가 머뭇거리며 묻자 가뜩이나 기분이 별로였던 심협은 짜증이 솟구쳤다.

    “그런 게 있으면 빨리 좀 말해!”

    “혼돈흑련을 법보처럼 여기고 연화해가는 거다. 만약 정말로 연화에 성공하면 모든 위험이 자연스레 사라지겠지.”

    “음…… 좀 황당하긴 해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군. 혼돈흑련의 영식이 탄생하고 나면 선천 영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 그래, 그렇다면 그때 연화하면 될지도 몰라.”

    심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혼돈흑련을 제련해 완벽하게 장악하겠노라 결심을 굳혔다.

    화령자는 심협이 더는 책임을 묻지 않을 듯하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네가 보타산에 있는 동안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쭉 도천신살대진의 진기를 만들었지. 어제 막 아홉 번째 진기를 완성해서 반쪽짜리라도 도천신살대진을 설치할 수 있게 됐다.”

    “정말? 어서 꺼내서 보여줘.”

    화령자가 손을 휘두르자 아홉 개의 도천신살대기가 일제히 나타나 일렬로 섰다.

    심협은 아홉 개의 진기를 보고는 기분이 풀렸다.

    “화령자, 연기의 도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이거라니까.”

    심협은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케세웠다.

    화령자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껄껄대며 아홉 개의 도천신살대기를 거두어 소요경으로 돌아갔다.

    심협도 주위를 수습하고는 백의동을 나섰다.

    한데 밖으로 나간 그는 놀랐 수밖에 없었는데, 동굴 문밖에는 수백 명이 몰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보타산의 장로들도 적지 않았다.

    “귀한 곳에서 폐관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심협은 모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바로 섭채주의 곁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는 떠나갔다.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길을 비켜줬다. 뒤에서는 아름답다, 부럽다, 잘 어울린다 등등의 말들이 들려왔다.

    “진정한 선남선녀로군!”

    흑곰 요괴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섭채주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도려가 되었지만,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데서, 그것도 수많은 장로, 제자 앞에서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려니 부끄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도려 대회도 열어 주지 못했구나. 수행자들의 규례대로 친우와 어른들을 초대하여 온 천하에 소식을 알리자.”

    심협은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만 제 곁에 있으면 의식 같은 건 다 상관없어요.”

    섭채주의 조용한 목소리에 심협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았다.

    “게다가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요. 스승님이 삼계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데 오라버니는 매번 그 혼란의 중심에 서 있으니…… 제 생각에는 그런 의식은 모든 게 안정된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많은 여자가 그러하듯 그녀도 말로는 의식 같은 것은 개의치 않는다고 했지만, 어찌 정말로 그렇겠는가? 다만 그녀의 말대로 삼계의 상황과 심협의 처지를 알고 있으니 그 근심을 헤아려줬을 뿐이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하자.”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섭채주의 손을 꼭 잡았다.

    * * *

    며칠 후.

    심협은 청련선자를 찾아가 작별을 고하고 보타산을 떠나기로 했다.

    “왜? 뭔가 할 일이 있는 게냐? 이제 막 태을경으로 돌파했으니 며칠 더 경지를 다지고 가는 게 나을 게다.”

    청련선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선배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너도 가려는 거냐?”

    청련선자는 심협 옆에 있는 섭채주에게 물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스승님.”

    섭채주가 조심스레 답했다.

    “심협이 돌아온 이후로 너는 종문에서 수련하는 날보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날이 더 많아졌구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청련선자가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스승님, 제자가 비록 밖으로 돌아다닌다고는 하나 수행을 게을리한 적은 없습니다. 스승님께서도 경험을 쌓으니 수확이 많아지고 경지의 정진도 크다고 칭찬해주셨잖아요.”

    섭채주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청련선자는 정말 그렇기는 했다고 생각했다. 다만, 역시 딸은 나이가 들면 시집을 보내야 하는구나 싶어 한숨과 아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마침내 그녀도 몇 마디 더 당부하고는 두 사람을 보내주었다.

    * * *

    음령산맥의 고분 앞에서 초록 빛이 솟아나더니 빠르게 펼쳐지면서 초록색 법진이 만들어졌고, 곧 두 사람이 나왔다. 바로 심협과 섭채주였다.

    한데 두 사람은 이내 표정이 돌변했다.

    음령산의 눈에 보이는 곳마다 짙은 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이 안개는 매우 음한하여 거의 모든 초목이 얼어 죽었고, 땅과 바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이런 음무(陰霧)는 없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왜 이렇게 변한 걸까요?”

    섭채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이 고분에는 이전 왕조의 수많은 대군이 묻혀 있고 땅속 깊은 곳의 음맥은 지부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본래 천하제일의 음살의 터였어. 다만, 이곳의 지세(地勢)가 천성적으로 금고의 기세를 지녀 9할의 음기를 땅속에 가둬두었고, 새어 나온 음기는 1할도 되지 않았지. 지금 상황을 보니까 땅속 묘궁(墓宮)에 변고가 생기면서 대량의 음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

    심협이 생각 끝에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을 경지로 들어선 이후로 그의 신식의 힘은 다시 크게 올라 이전보다 열 배는 더 잘 감지할 수 있었다. 특히 태을기는 지맥과 소통하는 신통이 있으니 신식을 훑어보는 것만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음기의 내력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묘궁 깊은 곳은 마치 절대적인 힘이 모든 것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 그의 힘으로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없었다.

    “그 동굴과 관련이 있을까요?”

    “가보면 알게 되겠지.”

    심협은 섭채주의 손을 잡고 몸에서 초록 빛을 번득였고, 두 사람은 다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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