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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055화 (1,055/1,214)

1055화. 첫 번째 피

주망칠을 보타산 밖까지 배웅한 뒤, 심협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화령자가 아직도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심협, 내 지금까지 네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라 생각했는데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화는 좀 풀렸어?”

“안 풀면 어쩌겠나? 내가 네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있겠냐?”

화령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겠어, 알겠어. 그럼 이제 말해봐. 이 염수화정으로 순양비검을 만들 수 있을까?”

화령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론대로라면 염수화정은 절정급 화속성 영재이니 순양비검을 만들면 품질이 절대 낮지 않을 게다. 다만…… 이 염수화정은 많이 달라.”

“왜? 무슨 흠이라도 있어?”

“아니, 순도가 너무 높아. 내가 다르다고 한 것은 이것의 어디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순양비검을 만들기에는 아깝다는 거다.”

그 말에 심협은 내심 속으로 툴툴거렸다.

‘아무리 좋은 영재라도 나한테 쓸모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거지, 쓰지도 않고 그냥 놔둘 거면 나무토막이랑 뭐가 달라?’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다.

“너의 순양비검에 담긴 신조 주작과 태양 금오는 모두 어렵게 얻었지. 그렇지?”

“그렇지.”

“만약 내가 이 염수화정에서 영지가 있는 영체를 탄생시킨다면 검령으로 삼을 수 있겠나?”

화령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심협음 흠칫 놀랐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오흠과 조룡척목을 두고 다툴 때 염수화정에서 두 개의 불꽃이 나뉘어 쫓아왔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뭔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화령자의 말대로라면 그 불꽃들은 지능을 지닌 영체와 같은 것이고, 바로 그 영체를 뽑아내겠다는 의미였다.

화령자는 심협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아쉽게도 곧바로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다.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이 염수화정의 영체는 이제 갓 생긴 영식과 같아서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진정한 기령이 될 수 있을지는 조화를 봐야 알 수 있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군.”

염수화정을 바라보는 심협의 표정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보듯 자애로웠다.

“그럼 검을 만들까 말까?”

“안 해도 돼.”

화령자의 물음에 심혐은 고개를 저었다. 검이야 만년 화린목으로도 충분하지만 검령은 바란다고 다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염수화령(炎燧火靈)을 키우는 걸 도와줄 수도 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심협이 짐짓 존대까지 섞어가며 말하자 화령자는 그를 힐끗 흘겨보고는 천천히 말했다.

“이 염수화정은 만 년이 되었으니 힘은 이미 충분하다. 지금 부족한 것은 영성의 점화(點化)인데, 그건 네가 완성을 도울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소통.”

“소통? 어떻게? 말을 걸어? 아니면 신념으로 교류해야 하나? 아니, 지금 이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그런 능력이 있으면 내가 점화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저 넌 앞으로 이레에 한 번씩 심두혈(心頭血)을 뽑아내 신념을 주입한 뒤에 순양비검의 태양진화로 그 피를 염수화정에 녹아들게 하면 된다.”

“그거면 돼?”

“얼음이 석 자나 자랐다면 하루 만에 언 것이 아니다. 10년, 어쩌면 수백 년간 공을 들여야 성공할 수 있지.”

“이레에 심두혈 한 방울이면 문제는 없는데……. 성공하면 어떻게 알 수가 있지?”

“언젠가 갑자기 반응이 느껴질 것이다. 그럼 성공이 머지않은 셈이지. 이 방법은 비록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성공 가능성도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성공한다면 그렇게 생겨난 영체들은 너와 강한 유대감이 생겨서 검령으로 만들 때 어떤 반항도 없을 게다.”

“영체들? 그 말은 생겨날 염수화령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야?”

“염수화정의 형태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데, 이건 연대 모양을 하고 있는 데다 열다섯 개의 꽃잎이 있으니 생겨난 화령도 아마 열다섯 개일 가능성이 크다. 허나 하나만 탄생할 가능성도 있지. 그것도 네 기연에 달렸다.”

“하나여도 괜찮아.”

심협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좋아, 그럼 한번 해봐라. 이 화정은 아직 불안정하니 내가 옆에서 제어를 도와주마.”

“고맙군.”

심협은 바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더니 마음을 가라앉히며 심두혈을 모으기 시작했다.

반 각(1각은 약 15분) 정도 지났을 때, 심협은 두 손가락을 세웠다. 검지 끝에 금빛의 피가 천천히 모여들었다. 바로 그의 심두혈이었다.

“좋아, 그걸 보내라.”

화령자가 옆에서 지켜보며 알려줬다.

심협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금빛 심두혈이 날아가 곡현성반의 법진을 뚫고 염수화정에 툭 떨어졌다.

치익!

가벼운 소리가 울리더니 금색 피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고, 순식간에 염수화정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됐어?”

“이제 태양진화로 불을 질러.”

심협이 바로 신념을 일으키자 염수화정을 받치고 있는 순양비검에서 금색 불꽃이 화르륵 타올라 금방 붉은색 연대 전체를 뒤덮었다.

금색 불꽃 안에서도 그 피는 가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두드러졌고, 염수화정도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심협은 심지어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는데, 염수화정에서 한 줄기 붉은색 불꽃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조금씩 그의 그 심두혈을 삼켰다.

한순간에 금색 피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 불꽃은 더욱 크게 흔들렸는데, 심협이 보기에는 즐거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불꽃은 금방 어두워지면서 염수화정도 점점 어두워졌다. 태양진화가 아무리 계속 불을 뿜어내도 더는 아까처럼 투명해지지 않았다.

한참을 태우고 나자 심협도 흥미가 사라져 태양진화를 거뒀다.

“너무 기죽지 마라.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천천히 키우면 된다.”

“그래야겠군.”

심협도 단번에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표정이 급변한 화령자가 붉은색 연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심협도 갑자기 긴장하며 돌아봤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화령자가 갑자기 씩 웃더니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아직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심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네 녀석의 운은 믿을 수가 없구나. 심두혈 한 방울을 흡수한 것뿐인데 염수화정이 안정되었다.”

뒤이어 화령자가 손을 휘두르자 곡형성반의 금제 법진이 바로 사라졌다.

밖으로 드러난 염수화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고, 어떤 영력 파동도 뿜어내지 않았다.

“곡현성반으로 계속 진정시켜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얌전해질 줄이야. 이건 영체의 영성이 이미 매우 강하다는 의미이니, 머지않아 진정한 기령이 탄생할 게다.”

화령자가 껄껄 웃으며 말하자 심협도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바로 손을 휘둘러 모든 순양비검을 거두었고, 염수화정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만져봤다.

“그래, 그렇게 가지고 다니면서 7일 동안 심두혈로 제련하면 된다.”

“잊지 않을게.”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염수화정을 집어넣었다.

화령자도 곧장 소요경으로 돌아갔다.

심협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룡척목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폈다.

척목은 진홍색이었고 위에는 고대 나무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척목에는 분명히 희미한 용족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봉인에 제압당해서인지 그 기운은 매우 약했다.

법력을 주입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기에 심협은 바로 그만뒀다. 다음에 동해에 가게 되면 조룡척목을 오홍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의 몸에는 조룡의 잔혼이 서식하고 있으니 이것의 비밀을 풀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은 혼자 연구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 *

순식간에 49일이 지났다.

새벽. 자신의 방에서 가부좌하고 있는 심협의 앞에 염수화정이 떠 있었다. 열 자루의 순양비검이 불꽃을 뿜어내며 주위를 맴돌아 금색 피를 화정에 녹아들게 했다.

화정이 피를 조금씩 흡수할수록 순양비검의 태양진화도 점점 꺼져갔다.

그때, 심협이 흠칫 놀랐다. 염수화정의 불덩이가 어느새 분화되어 열다섯 개의 미약한 불꽃으로 변하더니 꽃잎들을 향해 나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열다섯 개의 기령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건가?”

화령자를 불러 함께 살펴보려는데,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형! 심형!”

심협은 흑곰 요괴의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염수화정을 거두고 일어나 마중 나갔다. 흑곰의 얼굴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흑 도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왜 이렇게 신이 났소?”

“어서 가세. 우린선자가 물건이 완성되었다 하네.”

흑곰 요괴는 바로 심협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태청단이 완성되었다고?”

심협도 기뻐하며 곧장 흑곰 요괴와 함께 산골짜기로 향했다.

일전에 왔을 때는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모든 금제가 활짝 열려 있어 두 사람은 곧바로 골짜기의 단려(丹廬)로 향했다.

흑곰 요괴는 길을 잘 아는 듯 심협을 데리고 곧장 단방으로 들어갔다. 단방 안에는 3층 높이 정도의 순금 단로가 보였다. 그 위는 구름이 가득했고, 구름 안에서는 은은한 노을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린선자는 설백의 우선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는데, 안색이 창백하고 약간 초췌했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그녀의 눈이 자긍심과 기쁨으로 반짝였다.

“심 도우, 운이 좋았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적어도 석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49일 만에 완성했습니다.”

“제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선자님의 수법이 절묘하고 연단술이 뛰어난 덕분이겠지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심협이 포권하며 허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우린선자는 사양하지 않고 같이 절을 하고는 들고 있는 우선을 단로 쪽으로 휘둘렀다.

하얀 회오리바람이 단로 가장 아래로 들어가더니 단로 안의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더 짙은 안개가 단로 꼭대기에서 솟아올라 구름처럼 자욱해졌다.

“완성되긴 했지만, 몇 개나 완성되었을지는 아직 모르겠군요.”

“한 개뿐이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한 개요? 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우린선자가 웃으며 말하자마자 줄곧 강렬하게 요동치던 단로의 덮개가 마침내 높이 날아올랐고, 세 개의 금빛 찬란한 구슬이 단로에서 날아올라 곧장 위의 구름으로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구름이 흩어지면서 기이한 향이 퍼졌다. 일곱 빛깔 노을이 뭉쳐진 둥근 무지개가 세 개의 단약을 중심으로 맴돌았다.

이를 본 심협이 기뻐하며 손을 들고 꽉 쥐자 보이지 않은 힘이 허공으로 날아가 세 개의 단약을 휘감고는 다시 돌아왔다.

영단이 떠나가자 단로 위에 생겨난 이상 현상도 함께 사라졌다.

세 개의 단약이 심협 앞에서 점점 차가워졌고, 금빛도 천천히 흩어지면서 비취 유리 같은 단약이 나타났다. 영롱한 청록빛 단약이었다.

단약 안에는 가느다란 금실이 교차하고 있었는데, 매우 눈부셨다.

흑곰 요괴도 고개를 내밀어 심협 수중의 단약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가의 침을 닦았다.

“세 개라……. 나쁘지 않군요. 제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우린선자가 가볍게 두어 번 기침을 했다.

“감사합니다, 선자님.”

“그리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우리 채주를 잘 대해주세요.”

“채주는 제 도려이니 절대 힘들게 하지 않을 겁니다.”

“태청단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폐관하여 돌파할 계획인가요?”

“예. 진선 후기에 오래 머물렀으니 돌파를 시도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흑곰 요괴가 투덜거렸다.

“자네의 수행 속도는 정말 부럽기도 하고 또 놀라울 정도군. 처음 봤을 때 그 비리비리했던 친구가 이제 태을 경지의 수사가 되려고 하다니. 폐관에서 나오면 심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심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을로 들어서는 것이 어디 쉽겠소? 태청단 외에도 많은 준비를 해야 하고 중간에 절대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지요. 반드시 단숨에 일사천리로 해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심형, 내가 호법을 서줄 테니 자네는 안심하고 폐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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