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54화 (1,054/1,214)
  • 1054화. 마음이 가다

    심협은 바로 해도를 꺼내 축융분지가 있는 곳을 표시해 건넸다.

    “여기 회복 단약이 있으니 전해주십시오.”

    심협은 백옥자병(白玉瓷甁)을 수식족 수령에게 건네며 말했다.

    수식족 수령은 군말 없이 받아 들었고, 서로 감사 인사를 한 뒤 각자의 길을 떠났다.

    심협은 십도가 이미 부서진 것을 보자 주망칠을 돌려보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를 보타산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학 영역 전체가 짙은 안개와 수증기에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가 돌아서서 어검을 타고 보타산으로 향하려는데, 앞에서 두 개의 둔광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심형!”

    멀리서 외침이 들려오더니 둔광 하나가 먼저 다가왔는데, 바로 흑곰 요괴였다.

    그의 뒤를 따라온 사람은 놀랍게도 우린선자였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심형, 여기서 또 무슨 소란을 피웠기에 대학십도 주민들이 모두 밖으로 도망친 건가? 그들 말로는 섬이 무너졌다던데?”

    흑곰 요괴는 안개로 가득한 바다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린선자도 궁금증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게…… 말하자면 기니까, 돌아가는 길에 자세히 말해주겠소.”

    “알겠네.”

    흑곰 요괴는 우린선자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 사람은 보타산으로 향했다.

    심협은 보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겨우 이틀 만에 그런 많은 일이 있었을 줄이야!”

    흑곰 요괴가 놀란 듯 외쳐고, 우린선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수화명단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만 알고 있어서 조금 고생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우여곡절을 겪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수식족의 변고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 그들을 구해내지 못했겠지요. 덕분에 공덕 하나 쌓은 셈입니다.”

    심협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이번에 오흠에게서 조룡척목 하나와 붉은 연대를 빼앗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해 용궁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염수화맥 깊은 곳에 묻힌 것이 나중에 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들었다.

    “선자님, 이게 이번에 얻어 온 수화명단입니다. 아직 자세히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대략 백 개는 될 겁니다.”

    심협은 수식족 아이가 준 수화명단을 전부 꺼내 건넸다.

    우린선자는 받아서 훑어보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 개가 아니라 백삼십 개가 넘는군요. 태청단을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태청단이요?”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져 되물었다. 우린선자가 수화명단을 찾아오라고 한 이유가 태청단을 만들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태청단은 태을 경지로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는 단약이라 저도 제작에 성공할 자신이 없습니다. 충분한 준비를 하는 수밖에요. 이 수화명단은 비록 약에 쓰이는 영재는 아니지만, 단로의 물과 불, 음양 변화의 균형을 맞추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연료를 추가하는, 뭐 그런 건가?”

    흑곰 요괴도 의아해한 듯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이렇게 많은 수화명단이 필요한 거야.”

    우린선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랬군요. 선자께서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진즉 그렇게 말했으면 좋잖아! 나는 또 내가 심형의 체면을 구긴 것 같아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흑곰 요괴가 우린선자에게 원망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당신이 그의 신분을 말했을 때부터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게 누가 채주의 도려가 되라고 했나? 단지 수화명단, 이것만큼은 내가 직접 구할 수 없는 거니까, 일종의 시험도 해볼 겸 그랬던 거지.”

    “어쩐지…… 뭐, 섭 도우 덕분에 내 체면이 섰군그래.”

    “곰탱이, 체면이 그렇게 중요하면 앞으로 나한테 연단 같은 건 맡기지 말지?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따위로 나오면 네놈한테 독단(毒丹)을 먹여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가게 해주지.”

    우린선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말하자 흑곰 요괴는 기겁하며 목을 움츠렸다.

    “아, 알겠어. 알겠다고.”

    “태청단을 만들려면 최소 7일은 걸리고, 길면 몇 달이 걸릴 테니 오늘부터 폐관하며 제작에 전념할게요. 성공 여부는 반반이니, 그건 그대의 운에 달려있습니다.”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실패해도 괘념치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태청단 제작에는 백 개면 충분하니 남은 수화명단은 가지고 가세요. 수식족이 이주하면서 남해에서는 수화명단이 사라진 것과 다름없으니 나중에 값이 크게 오를 겁니다.”

    “선자님께서 받아주십시오. 태청단을 제작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송구한데 어찌 빈손으로 부탁드리겠습니까? 또한, 수화명단은 제게는 별다른 쓸모가 없습니다. 아, 이 구판(九瓣) 지심화련은 보수로 드리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심협은 지심화련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네머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우린선자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는지 흔쾌히 받고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녀가 떠나간 후에도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흑곰 요괴를 흘깃 본 심협은 씩 웃었다.

    “흑 도우, 지금 보니까 그녀에게 마음이 있나 봅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디서 그런 망발을!”

    흑곰은 기겁했고, 가뜩이나 까만 얼굴이 더욱 까매졌다.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내 보기에 우린선자도 흑 도우를 대하는 태도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그, 그게 정말인가?”

    흑곰 요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나 이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요족의 몸이 아닌가. 보타산 제자들이 평소 공경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외감을 감출 수가 없네. 우린선자도 단한(丹鶴)의 부류이고 또 같은 요족이니 남들보다 조금 더 친한 것뿐일세.”

    “흑 도우, 보타산 전체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린선자를 찾아와 단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수사가 몇이나 되오?”

    심협의 물음에 흑곰 요괴는 조용히 속으로 꼽아 봤는데, 확실히 몇 명 되지 않았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힘내시오.”

    심협이 어깨를 두드리며 웃더니 성큼성큼 숙소로 돌아갔고, 흑곰 요괴는 혼자 남아서는 바보처럼 실실 웃어댔다.

    * * *

    저녁 무렵. 심협은 홀로 방에서 부상을 살폈다.

    염수화맥에 화상을 입은 팔은 법력을 흘려보낼 때마다 여전히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한참 뒤, 그는 가부좌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요경 공간을 열었다. 그 안에 넣어둔 붉은 연대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한데 빛의 문이 열리자마자 누군가 황급히 튀어나와 심협에게 정면으로 달려들며 욕설을 퍼붓는 게 아닌가!

    “이 망할 심가야, 날 태워 죽일 생각이냐? 갑자기 저딴 걸 집어넣으면 어쩌자는 게냐!”

    화령자가 곡현성반을 들고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곡현성반에서는 광망이 흐르고 물줄기 같은 푸른 빛이 진반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나와 푸른빛의 복잡한 법진을 이루었다.

    법진 중앙에는 열 자루의 순양비검이 어지럽게 교차하여 만든 가마가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색 연대가 놓여 있었다. 연대는 마치 성화(星火)가 호흡하는 것처럼 붉은 빛이 은은하게 반짝이며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심협이 짐짓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뭐? 무슨 일? 저, 저 위험한 염수화정(炎燧火晶)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뭐? 무슨 일?”

    화령자는 화를 삭이지 못해 얼굴이 시뻘게졌다.

    “염수화정? 그게 뭔데?”

    심협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것 말이다! 저거! 희귀한 화속성 영재! 연기사들이 꿈에서도 갈망하는 극품 영재!”

    화령자는 화가 난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심협에게 설명했다.

    “극품 영재!”

    심협의 눈이 커졌다.

    “보통은 심해의 화맥에서 만 년 이상을 지나야 탄생하는 물건이다. 평소에는 해저의 중압을 받아 괜찮지만, 심해를 벗어나면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해야만 한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가져온 게냐?”

    “그…… 난 전혀 몰랐는데…….”

    “아오, 화상아!”

    화령자는 기가 막혀서 손가락질을 했지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갑자기 머리 하나가 소요경 공간에서 불쑥 나오더니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 깜빡했네.”

    심협이 뒤를 보더니 이마를 툭 쳤다. 그리고는 주망칠의 팔을 잡아당겼다.

    “심…… 선배님.”

    주망칠은 겁을 먹은 것처럼 우물쭈물했다.

    한낱 대승기 수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자신이 심협 앞에서 보였던 방만한 언행을 생각하면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주형, 그러지 마시오. 하던 대로 심형이라 부르면 됩니다.”

    심협은 그를 끌어다가 탁자 옆에 앉히며 말했다.

    “심…… 형. 지금 중요한 일을 의논 중인 것 같으니 내 방해하지 않고 바로 낙하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주망칠은 앉는 시늉만 하더니 바로 일어나며 말했다.

    “주형, 정말 미안한데…… 대학십도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네? 뭐가 어떻게 됐다고요?”

    “낙하도가…… 사라졌습니다.”

    심협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는 어디입니까?”

    주망칠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는 보타산입니다.”

    주망칠은 심협이 농담을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주형, 남해 용궁 수사들이 주형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십도가 온전했어도 아마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심협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건 아는데…… 집에 남겨둔 술들이 아까워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계획 같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수행에 희망이 없어서 대학 쪽으로 가서 빈둥거리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서 또 그렇게 살아야죠. 뭐, 괜찮습니다.”

    주망칠이 웃으며 말하자 심협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니면 갈 만한 곳을 추천해주겠습니다.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마실 술은 있을 겁니다.”

    “그게 어디입니까?”

    주망칠이 흥미를 느낀 듯 물었다.

    “대당의 등주 춘화현에 있는 춘추관이라는 작은 종문입니다. 제가 서찰을 써주면 문제없을 테니 그곳에서 한가로이 종문을 모시며 지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망칠은 심협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그곳에 가면…… 전의 그…… 선가옥량도 마실 수 있습니까?”

    “그…… 궁금한 게 그겁니까? 그렇게 많은 선가 옥량이 있겠습니까? 대신 영약 양주(釀酒)는 문제없이 마실 수 있을 겁니다.”

    주망칠이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고민하는 건지 궁금했던 심협은 어이가 없어 기가 찰 지경이었다.

    “됐습니다. 어쩔 수 없죠. 종문을 모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주망칠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틀쯤 쉬었다가 출발하시죠.”

    “아, 아닙니다..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심형은 배경이 있지만, 저는 남해에 계속 남아 있을 배짱이 없습니다.”

    주망칠이 황급히 손을 내젓자 심협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부적지 한 장을 꺼내 무언가를 그린 후 봉투에 담았다.

    “이 서찰을 가지고 춘추관의 관주인 진명을 찾아가십시오. 그에게 서찰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됩니까? 무슨 신물 같은 건 필요 없을까요?”

    “이 서찰에 제 신념을 담아 놨으니 자초지종을 알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심형.”

    주망칠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는 바로 떠나려 했다. 심협은 그를 배웅하면서 단약을 건넸다.

    “주형, 경지를 돌파할 때까지 그리 머지 않았으니 술만 마시지 말고 부지런히 부족함을 채워 장생대도(長生大道)에 힘써 보십시오.”

    주망칠은 그의 당부에 감동이 몰려왔다. 자신을 수련의 길로 이끌어준 산수 스승이 사망한 이후로 이렇게 성심성의껏 대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망칠이 진중하게 포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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