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화. 어림도 없는 소리
선미 쪽의 바다 요괴는 이미 사람 모습으로 돌아와 수식족 아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 다만 그는 팔과 얼굴 곳곳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빠른 속도로 딱지가 앉더니 흉터가 생겼다.
심협도 일어섰는데, 팔부터 어깨, 가슴 반쪽까지 염수화맥의 불꽃에 녹아내려 뼈가 드러난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력이 충분한 상태였기에 대개박술을 운공하여 녹아내린 살을 빠르게 회복했다.
이를 옆에서 바라보던 바다 요괴와 어린 수식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 심협 자신도 의외였는데, 살과 피부의 손상을 회복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염수화맥에 타버린 팔이 완전히 무감각했던 터라 직접 보지 않았다면 팔을 다친 줄도 몰랐을 터였다.
심협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백여 장 높이에 반투명한 정석이 깔린 것 같았고, 정석 아래 한 겹의 투명한 광막이 위아래의 공간을 나누는 듯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해저의 동굴이었다.
저 위에 염수화맥이 있어서 동굴 안은 제법 환했는데, 동굴의 폭은 수백 장에 불과했다.
주위 벽에는 붉은색 문로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염수화맥의 요암이 흘러 동굴 안은 온도가 매우 높았다.
그때, 전방의 보선에서 오흠이 용궁 수사들을 이끌고 뛰어 내려왔다.
“흥! 지금껏 잘도 나를 속였구나!”
오흠이 성난 눈으로 심협을 노려봤다. 옆에 선 오전은 금색 장도를 주망칠의 목에 대고 있었다.
주망칠은 겁에 질려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못 했다.
“그를 놔주면 이들을 데리고 떠날 테니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어떻겠나?”
“놔달라고? 참 쉽게 말하구나, 심협.”
오흠이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수식족을 구하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더는 기운을 숨기지 못했으니 정체를 들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그도 더는 시치미 떼지 않고 몸의 기운을 순식간에 폭발시켰다. 그러자 방대한 영압이 펼쳐져 보이지 않는 기세가 용궁 사람들을 압박했다.
“진선 후기!”
오흠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기억대로라면 저번에 동해 용궁에서 싸웠을 때는 진선 초기에 불과했거늘, 어떻게 그사이에 진선 후기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용궁의 다른 수사들도 표정이 굳어갔다.
사실 이런 반응이야말로 원했던 바이기에 심협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이대로 주망칠을 놔준다면 최상일 터였다. 수식족을 구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굳이 남해 용궁과 죽기 살기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눈속임을 쓴 거냐?”
“이게 눈속임으로 보이나?”
“눈속임이든 아니든 그래봐야 진선 후기에 불과한 너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오흠은 뼈가 드러난 심협의 팔을 보고는 눈을 반짝이며 말하더니 오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을 대열에 합류시킨 장본인으로서 오전은 벌을 받을까 잔뜩 걱정하고 있었기에 오흠의 눈짓을 보고는 곧바로 눈에서 흉광을 번뜩이며 장도로 주망칠의 목을 베려 했다.
주망칠은 목덜미가 차가워지자 속으로 한탄했다.
‘끝이구나.’
하지만 다음 순간, 장도를 든 오전의 손이 그 자리에 멈췄고, 검은색 그림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거꾸로 든 검은색 귀도를 그의 목에 댔다.
“어, 언제……?”
오흠 역시 깜짝 놀랐다.
“그를 놔줘라.”
귀장 조비극이 차갑게 말하자 오전은 목덜미를 타고 몰려오는 한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어쩔 수 없이 칼날을 치웠다.
주망칠은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어서 가시오.”
조비극이 낮게 말하자 주망칠은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처럼 비틀거리며 뛰어나갔다.
거의 동시에 갑자기 땅에서 두 개의 금색 용조가 튀어나와 하나는 조비극을, 하나는 주망칠을 잡으려 했다.
조비극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손으로 오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귀도로 그의 목을 베려 했다.
챙!
오전의 목에 걸린 금색 비늘 모양 목걸이가 갑자기 번득이더니 금색 광망이 되어 칼날을 막아내면서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한편, 주망칠은 갑자기 튀어나온 용의 발톱을 피하지 못하고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 순간 심협이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몸을 숙여 손바닥으로 땅을 내리쳤다.
심협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금빛이 폭발하자 금룡의 발톱이 생겨나 바닥에서 튀어나온 용의 발톱과 충돌했다.
콰쾅!
격렬한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주망칠은 훌훌 튕겨 날아갔지만, 땅에 떨어지기 전에 갑자기 튀어나온 촉수가 그를 휘감아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는 몸을 가누고는 고개를 들어 심협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휴우, 내 눈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구나.”
그 무렵, 충돌음이 사라졌고, 심협과 조비극은 동시에 물러나 나란히 섰다.
심협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팔에는 감각이 돌아왔지만, 그로 인해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법력을 발동할수록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런 심협을 보면서 오흠은 자기도 모르게 망설였다.
한데 그때, 주위의 공간이 갑자기 크게 흔들리더니 강력하기 그지없는 영력 파동이 덮쳐왔다.
모두가 이 힘을 감지하고는 깜짝 놀라 동시에 보선 뒤쪽을 돌아봤다.
“저들을 죽여라!”
오흠은 크게 외치더니 자신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곧장 보선 뒤로 향했다.
“내가 가볼 테니 이들을 보호하라.”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귀장에게 명했다.
“알겠습니다!”
조비극은 짧게 포권하더니 주망칠 등의 앞으로 나섰다.
앞에서 수많은 용궁 수사들이 돌진해왔다. 심협이 손을 크게 휘두르자 10여 자루의 순양비검이 검광이 되어 그들에게로 날아갔다.
용궁 수사들은 일제히 법보를 꺼내 막았지만, 도저히 대적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심협은 그들이 뒤로 물러선 틈에 쏜살같이 오흠 부자를 뒤쫓았다.
그의 뒤에서 장룡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협은 부상 당한 팔이 계속 욱신거렸고 법력이 흐를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치솟아 식은땀이 절로 났다.
하지만 지금은 부상을 돌볼 틈이 없었다. 방금 폭발한 영력 파동에서 조룡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조룡의 잔혼이 오홍의 몸에 남아 있다면 저자가 찾던 물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보선을 넘어서자 백여 장 떨어진 곳에 벽이 나타났는데, 마치 나무 같은 모습에 거미줄처럼 빼곡한 화맥이 바닥의 기묘한 석대로 모여들고 있었다.
석대는 연꽃처럼 생겼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열다섯 개의 꽃잎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주홍빛을 띠었다. 꽃술 중심에는 두 개의 구불구불한 용 뿔이 있었는데, 조룡의 기운은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룡척목(祖龍尺木)! 역시 조룡척목이었어!”
이미 석대 앞에 도착하여 그 물건을 바라보고 있던 오흠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오전 역시 흥분한 기색으로 마른침을 삼켜댔다.
그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조룡이 남긴 유산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오늘 마침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룡척목을 찾아냈으니 그 감동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말에 용은 척목이 없으면 승천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뿔이 없다고 해서 용이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이 용족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척목이 있고 없고는 용족에게 있어서 계급이 하늘과 땅으로 나뉜다. 더욱이 이것은 보통 척목이 아니라 조룡의 척목이 아닌가.
“조룡척목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심협은 의문이 들었다.
연대 앞에 선 오흠의 두 눈에는 오직 붉은색과 금색, 두 개의 용뿔만 보였다. 다른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협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오흠은 손을 들어 연대 위의 용뿔을 잡으려 했다.
오흠의 팔이 붉은 연대에 들어가자 뜨거운 기운이 연꽃잎에서 뿜어져 나와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그의 팔로 몰려들었다.
“으아아아!”
비명과 함께 오흠의 소매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고, 팔의 비늘도 붉게 타버렸다. 그는 용의 뿔에 닿기도 전에 팔을 거둬야만 했다.
이를 본 심협은 안도했고, 사월보를 시전하여 최대한 빨리 연대로 향했다.
심협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오흠은 용의 뿔을 내버려둔 채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용의 발톱이 허공에 나타나 심협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심협 또한 용의 발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고, 격렬한 충돌음이 울렸다.
금색 용의 발톱이 폭음과 함께 사라졌고, 심협은 뒤로 밀려났다.
“심협, 꼭 이렇게 우리 남해 용궁의 적이 되어야겠느냐?”
“오흠 도우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마다 공교롭게도 나와 마주치다니, 그저 도우의 운이 나쁜 것을 탓하시오.”
심협이 장난스레 씩 웃으며 대꾸했다.
“심협, 여기 이 염수화맥은 어렵게 한번 폭발할 때만 들어올 기회가 생긴다. 다만 그 시간은 길지 않으니 용암이 다시 돌아오면 이곳은 다시 염수 용암이 들어차지. 그리되면 너도 살아남지 못한다.”
오흠이 분노를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오, 그렇소? 그럼 좋은 방법이 있소. 내게 조룡척목을 넘기고 오흠 도우는 얼른 빠져나가는 거요?”
“어림도 없는 소리!”
오흠의 표정이 굳어졌다. 분노의 불꽃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올 듯했다.
“부왕, 저놈과 말을 섞어서 뭐합니까? 제가 저놈을 막을 테니 부왕께서는 보물을 취하십시오.”
“건방진 것!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오흠이 그를 질책하고는 다시 심협에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번에 날 방해하지 않으면 남해 용궁이 네게 빚을 진 것으로 여기고 용궁의 보물창고에서 세 개의 보물을 주마. 어떠냐?”
“자기 친형도 아무렇지 않게 배신하는 놈의 약속을 당신이라면 믿겠나?”
심협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매정하게 소리쳤다.
“이놈이…….”
오흠이 화를 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오전이 번개처럼 끝이 구부러진 창을 든 채 돌진했다. 마치 고목이 얽힌 듯한 창대가 인상적인 창이었다.
오전이 법력을 쏟아붓자, 창을 쥔 곳에서 전광이 흘러나와 창끝으로 주입되었다.
파지직!
창끝에서 뿜어져 나간 전망(電芒)이 거대한 전광(電光)이 되어 심협에게 떨어졌다.
심협이 막 피하려는데, 전광이 갑자기 커져 몇 줄기 눈부신 은색 번개가 되더니 법진처럼 그를 뒤덮었다.
피할 길이 없어진 심협의 몸에서 혈색 광망이 번득이자 혈백원번이 허공에 나타났다. 이 깃발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혈광은 팽창하더니 광막을 이루어 은색 번개를 막아냈다.
펑! 퍼펑! 콰르릉!
강렬한 폭음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고, 은색 전광과 혈색 광망이 서로 뒤섞였다.
“부왕, 이자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벽력(霹靂)이 제게 있는 한 이놈은 절대로 부왕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전이 결연한 눈빛으로 소리치자 오흠은 그런 아들이 대견했다.
그는 바로 돌아서서 다시 붉은 연대로 다가가더니 손을 휘둘러 삼각형 모양의 은백색 깃발을 꺼내고는 법력을 주입했다.
잠시 후, 연대를 향해 이 깃발을 휘두르자 강력하고도 차가운 기운이 섞인 수많은 설화빙정(雪花氷晶)이 붉은 연대로 휘몰아쳤다.
작렬하는 기운과 냉기가 뒤섞인 빙설이 충돌하자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본래 선명한 붉은색이었던 연대는 한빙에도 불구하고 차가워지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듯이 더욱 붉은 불꽃을 피워올렸다.
불꽃이 타오르면서 그 위로 흩날리던 빙정은 순식간에 증발했고, 삼각형 깃발에서도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오흠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때, 연대 뒤쪽 돌벽으로 향한 그의 시선에 붉은 화맥이 연대와 이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이 연대의 힘의 근원처럼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황금월(黃金鉞)을 꺼내 들고는 돌벽 앞으로 다가갔다.
팔에서 용의 비늘이 솟구치면서 순수한 법력이 오른팔에 모여들어 황금월에 주입되자 부월이 가볍게 떨리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오흠이 눈을 번득이며 황금월을 크게 휘둘렀다.
금빛 황금월은 예리한 광망을 뿜어내며 그대로 돌벽의 붉은색 화맥에 떨어졌다.
챙!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금빛이 번득이고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평범해 보이는 돌벽은 괴력의 부월에도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화맥이 잘려나가 그 안에 흐르던 화맥은 마치 힘을 잃은 것처럼 용암이 점점 식어갔다.
오흠은 효과가 있는 듯하자 기뻐하며 다시 부월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