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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044화 (1,044/1,214)

1044화. 연단대사

심협이 손을 들어 산하사직도를 꺼내려 하자 검은 손이 불쑥 타와서 그의 손을 막았다.

심협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손오공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 좀 친 것이다. 노손은 지금 화과산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선조께서 나더러 말을 전해달라시기에 이리로 온 것뿐이다.”

손오공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어떤 말씀입니까?”

“선조께서 말씀하시길, 지금 세상 사람들이 산하사직도가 방촌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도 밖에다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덕분에 오히려 산하사직도는 더 안전해졌다. 그래서 선조께서 우선 네게 맡겨두기로 했다.”

“어찌 그럽니까? 제게 있는 게 어떻게 선조님께서 직접 보관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겠습니까?”

“내 생각도 선조님과 같다. 이번에 장안성과 천기성 모두 습격을 받아 모든 문파가 경계를 강화했고 삼계의 혼란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다. 방촌산은 명성이 높아 쉽게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샀고, 또 이전의 피해가 가볍지 않아 산하사직도를 종문에 놓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분간 제가 대신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손오공의 말에 심협은 잠시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기에 바로 말했다.

“그나저나 네 성취가 이렇게 높아졌다니, 놀랍구나. 이제 곧 태을기로 들어서겠는데?”

“어디 그렇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경지 돌파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방촌산에 들렀다가 보타산으로 가서 태청단 연단을 부탁할 생각이었습니다.”

“태청단이 있으면 확실히 괜찮지.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이다. 태을 경지로 들어서는 것은 다른 경지와는 달리…….”

손오공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뭔가 중요한 지도가 있을까 싶어 기대하던 심협은 슬슬 안달이 났다. 비록 꿈속에서 태을기로 돌파해보긴 했지만, 꿈속에서는 자질이 탁월하여 현실과는 달랐다. 게다가 이런 경험은 진주보다 귀한데 누가 싫어하겠나?

“대성, 왜 말을 하다가 마십니까……?”

“그게 말이지…… 숨기려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태을의 깨달음이 다 달라서 괜히 네게 악영향을 줄까 봐 그런다.”

“그렇군요.”

“허나 네 심성과 지금의 상태면 문제없을 게다.”

손오공이 웃으며 말했다.

“대성의 덕담에 감사드립니다.”

“자, 말도 전했으니 나도 이제 가야겠다.”

손오공은 인사를 남기고는 한 바퀴 돌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빠르다!”

심협과 섭채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방촌산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바로 방향을 돌려 곧장 남해로 비주를 몰았다.

* * *

보타산.

훌쩍 한 달이 지났다.

자죽림 밖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에 흑곰 요괴가 하얀색 조롱박 단약을 꼭 안고 나무 그늘에 다리를 꼬고 앞뒤로 흔들며 한가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금빛 찬란한 금궤단(金匱丹)을 손에 든 채 나무 그늘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통해 바라보았는데, 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흑곰 도우,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흑곰 요괴는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금단을 꽉 쥐고는 돌아봤다.

역광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흑곰 요괴는 그래도 한눈에 알아봤다.

“하하, 심형! 이게 얼마 만인가!”

흑곰 요괴가 의자에서 일어나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가온 자는 물론 심협이었다.

“장안성에서 채주와 함께 왔소.”

“심형, 다 들었네. 채주, 그 아이랑 이미 도려가 되었다지?”

흑곰 요괴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언제 도려결성대회(道侶結成大會)를 열 생각인가?”

“채주가 돌아오자마자 스승님께 붙들려 폐관하러 가는 바람에 아직 의논하지 못했소. 다만 여기 오래 머물 계획은 아니니 시간이 안 맞으면 후일을 기약해야겠지.”

“그것도 괜찮지.”

흑곰 요괴가 배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담소도 나눌 겸 부탁도 할 겸 흑곰 도우를 찾아왔소.”

“오, 무슨 일인가? 편하게 말해보게.”

“흑곰 도우, 전에 내 화련단을 만들어준 연단대사를 기억하오?”

“물론 기억하지. 한데, 왜? 연단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나 그분께 다시 한번 연단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왔다오.”

“저번의 화련단으로 부족했나?”

“이번에 그 대사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태청단이오.”

“오, 태청단이라. 태청…… 응?”

흑곰 요괴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해 고개를 번쩍 들었고, 심협을 이리저리 살폈다.

“심형, 설마……?”

지금까지 심협은 기운 파동을 숨기고 있었기에 흑곰 요괴는 그의 경지 변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소. 폐관하여 태을 경지로 들어설 준비를 하는 중이오.”

“하하! 심형, 도대체 어떻게 수련한 겐가?”

“우연도 있고 기연도 있고…… 말하자면 길다오.”

“얼마 전에 내가 우린(羽璘) 장로에게 금궤단을 만들어달라고 했을 때도 적잖은 대가를 치렀지. 지난번에는 그녀도 두 그루 지심화련을 봐서 도와줬던 거라네. 그래서 이번에도 부탁을 들어줄지 확신을 못 하겠네.”

흑곰 요괴는 캐묻지 않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건 걱정 마시오. 지심화련은 한 그루 더 있으니, 우린 장로님과 흑곰 도우에게 대가 없이 수고해달라고 하지는 않을 거요.”

“그렇다면 희망이 있군. 같이 그녀를 만나러 가보세.”

흑곰 요괴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부탁하오.”

흑곰 요괴는 곧바로 앞장서서 자죽림 길을 따라 낙가산(珞珈山)을 벗어나 뒷산으로 향했고, 심협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산속을 지나 인적이 드물고 건물이 없는 작은 산골짜기 밖에 도착했다.

심협의 두 눈이 반짝였다. 산골짜기 입구의 땅에 법진의 광망이 번득였는데, 더 안으로 들어가자 양쪽 산벽에는 부적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우린 장로라는 분은 포진(布陣)과 화부(畵符)의 도에 특출난 분이군.”

심협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흑곰 요괴는 그 말에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지만, 이내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 심형, 내가 불러볼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이렇게 말하더니 정말로 목을 가다듬고는 크게 외쳤다.

“우린 선자, 흑곰이 뵙기를 청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홍조처럼 산골짜기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흑곰 요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선자, 흑곰이 뵙기를 청합니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다 사라지도 전에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망할 곰탱이야, 이번에는 또 뭘 귀찮게 하려는 거야? 저번에는 다짜고짜 안으로 쳐들어왔으면서 왜 이번에는 밖에서 시끄럽게 구는 건데?”

이 말을 듣자 흑곰 요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구멍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심협은 속으로 실소했다.

“흑곰 도우과 우린 선자가 이렇게 친한 사이일 줄은 몰랐소.”

“우린 선자, 오늘은 내가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도우가 자네의 명성을 듣고 연단을 부탁하러 천 리를 날아왔다네.”

흑곰 요괴가 머쓱하게 웃더니 산골짜기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이 곰탱아, 욕심도 작작 부려! 며칠 전에도 금궤단을 제련해줬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망할 놈이 연단을 부탁한다는 거야? 내가 네놈 개인 연단사인 줄 아냐?”

우린 선자는 더욱 화를 냈다.

“우린 선자, 그게 아니라…… 저번에 화련단 부탁한 적 있지? 그 지심화련을 줬던 심 도우가 부탁하러 왔다네.”

흑곰 요괴는 허둥대며 말했다.

“이번에는 무슨 단약인데?”

한참 동안 조용하더니 우린 선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선자님께 태청단 제작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심협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산골짜기에서 갑자기 둔광이 빠르게 날아와 곧장 산골짜기 입구에 설치된 결계 장막을 뚫고 내려왔다.

둔광에서는 설백의 날개옷을 입은 미모의 여인이 나타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심협을 살폈다.

“태청단을 부탁하고 싶다고요? 단방은?”

“여기 있습니다.”

우린 선자의 질문에 심협은 망설이지 않고 단방을 꺼내 건넸다.

“호쾌한 사람이군요.”

우린 선자는 감탄하더니 태청단의 단방을 받아 자세히 살폈다.

“단방은 문제없군요. 태청단 단방이 맞습니다. 다만…….”

우린 선자는 머뭇거리며 말을 끊었다.

“왜 그러시죠?”

“재료가 하나같이 진귀한 천재지보인데 정말로 다 모았습니까?”

우린 선자가 눈을 치켜뜨며 심협을 바라봤다.

“단방에 필요한 재료는 전부 모았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영광이 반짝이더니 대라불수와 옥맥구향충 등의 영재들이 나타나서 영롱한 광채와 팽배한 영력을 뿜어냈다. 잔잔한 파동이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옆에서 바라보던 흑곰 요괴의 눈이 커지더니 침을 꼴깍 삼켰고, 우린 선자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선자님, 연단을 도와주신다면 감사의 뜻으로 두 그루의 지심화련을 드리겠습니다.”

심협이 그 틈에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상치 못한 우린 선자의 말이 들려왔다.

“영재와 단방을 모두 거두시죠. 태청단 연단은 도와드리지 못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태청단은 태을 경지로 들어설 때 필요한 영단이라 연단이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껏 제작에 성공한 선례가 없는데 기껏해야 두 번 시도해볼 정도의 영재뿐이니, 자칫하면 영재만 낭비하는 꼴입니다.”

우린 선자는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시선은 영재들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사실 연단해보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심협의 얼굴에도 망설임이 떠올랐다. 태청단의 영재를 모으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우린 선자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 했다.

한데 그때, 흑곰 요괴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우린 선자, 단도(丹道)에는 보타산의 일인자라고 자부하더니, 쫄았나?”

“이 곰탱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선자가 돌아서며 노려보자 흑곰 요괴는 재빨리 덧붙였다.

“우린 선자, 다른 건 모르겠고 연단에 있어서는 자네는 항상 이거였다고.”

흑곰 요괴는 바보처럼 헤헤 하고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선자님의 단도 수준이 어떠한 지는 제가 함부로 평가할 수 없지만, 연단에 있어서 성패(成敗)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선자님께 부탁드리기로 한 이상 실패도 각오하고 있으니 도와주십시오. 성패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심협도 생각 끝에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우린 선자는 표정이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아, 내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군. 이 도우의 성은 심이고 이름은 협이라네.”

이를 본 흑곰 요괴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서둘러 소개했다.

한데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우린 선자의 표정이 이내 변했다.

“이자가 그 심협?”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했지만 심협은 바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놈이 섭채주를 뺏어간 그 심협?’

그 뜻이 분명했다.

“네, 제가 그 심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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