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38화 (1,038/1,214)
  • 1038화. 호란 전날 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협은 천천히 깨어났다. 그곳은 여전히 땅속 동굴이었고, 화령자와 조비극, 천살시왕 등이 가만히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심협이 완전히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물었다.

    “반 각도 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과거로 못 돌아간 건가?”

    화령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맞아, 그냥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아. 이럴 리가 없는데…… 방금 옥침의 변화는 저번에 천기성에서 꿈에 들 때와 똑같았어.”

    심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부좌를 튼 채 옥침을 감지해봤다.

    별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아 여전히 가득 찬 상태였다.

    그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꿈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옥침에 담긴 별의 힘도 줄어들지 않는 듯했다.

    “주인님, 괜찮으시다면 이번에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문제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비극의 제안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금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조비극과 화령자는 그 말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 네게 들었던 천기성에서 꿈에 들어갔던 과정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어디가 다른데?”

    “저번에는 만벽 장로가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그러니 넘어가는 시간과 장소가 모두 구체적이었지. 허나 이번에는 그저 사흘 전만을 바랐고, 구체적인 이유와 목적을 언급하지 않았지. 나도 시공 법칙은 잘 모르지만, 어쩌면 구체적인 지향점이 있어야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일리가 있어.”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옥침 안의 금제를 발동했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밀려오자 다시 한번 졸음이 몰려왔다.

    “유소짐이 여기에 금제를 설치하던 상황을 보고 싶어. 요소모주가 여기에 금제를 설치했던 때가…….”

    심협은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잠이 들었다.

    * * *

    큰 산이 짓누르는 것처럼 온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눈도 잘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연무량천기진의 설치는 어떻게 됐습니까?”

    노인의 목소리였다.

    “거의 완성됐소. 지금 사람을 시켜 대진과 연결할 감응주(感應珠)를 만들고 있지요. 그것이 완성되면 세 분께서 장안성과 천기성을 비롯한 성들의 땅속 영맥 안에 설치해주십시오. 그럼 모든 준비가 끝납니다.”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유소짐!”

    심협은 퍼뜩 정신이 들면서 의식이 완전히 또렷해졌다.

    이곳 땅속 동굴이었는데, 화령자와 조비극은 보이지 않았고, 어딘가 달랐다. 사라진 세계수가 그곳에 있었고, 수백 명의 호족이 그루터기 위에 바쁘게 부문을 새기고 있었다.

    ‘성공이다!’

    심협은 마치 유년 시절로 돌아온 것처럼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옥침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미래로 갈 때면 항상 제어할 수 없어서 우왕좌왕했는데, 마침내 옥침의 시공간 신통을 완벽하게 제어해낸 것이다. 이제는 원할 때 자유롭게 쓸 수 있으리라.

    심협은 깊게 숨을 들이마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루터기에는 몇 사람이 서 있었다. 선두에는 하얀 옷을 입은 유소짐이 있었고, 옆으로 허리가 굽은 노인과 키가 큰 사내 그리고 젊은 여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묘령의 여자는 다름아닌 마수수였다.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은 낯설지만, 체형은 익숙했다. 십중팔구 창궁 비경에서 마수수와 함께 있던 유천과 홍굴일 터였다.

    세 사람 모두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전에 싸웠던 그 세 명의 마족과 똑같은 옷이었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싶더니, 저들이었군.’

    심협은 차갑게 웃었다.

    그곳에는 그들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더욱이 심협도 잘 알고 있는 자로, 몸은 사람이요 머리는 용인 경하 용왕이었다.

    ‘저자도 여기 있다는 건 연화대회 이전인 모양이군.’

    심협은 그렇게 생각했다.

    “장안성 쪽은 오형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천이 경하 용왕에게 공수했다.

    “유천 도우, 안심하시오. 내 치우 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소! 저번에는 원천강 때문에 당 황제가 무사했지만, 이번에는 대당의 용기(龍氣)를 완전히 뽑아내고 대당의 이(李)씨 놈들과 원천강까지 모조리 죽임으로써 내 목숨을 구해준 대인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리다!”

    경하 용왕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당 조정과 대당 관부의 고수들은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서 몇 번이고 빠져나갔으나 지금은 장안성에 원천강과 진선 장로들뿐이니 도우를 방해할 자는 없을 겁니다. 허나 이미 천존에 도달한 원천강이 장안성에 있으니 오형은 신중에 신중을 더하셔야 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이날을 위해 백 년에 걸쳐 원천강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경하 용왕의 자신감에 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장안성에서 곧 연화대회가 열리니 다른 문파의 적지 않은 고수들이 장안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동해에 심어둔 첩자에 의하면 심협도 동해 용궁을 떠나 장안성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그자는 경지가 높지 않으나 수단이 다양하고 지략이 뛰어나니, 혹시라도 장안성에서 마주친다면 조심하십시오.”

    마수수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흥! 그때는 원천강의 힘을 빌려 운 좋게 내게 상처를 입혔다만, 그놈 혼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혹여 마주친다면 내 반드시 복수하겠다!”

    경하 용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자 마수수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하지만 경하 용왕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수하고는 금빛이 되어 장안성 쪽으로 날아갔다.

    “장안성은 오형에게 맡기면 될 것 같으니 나머지는 우리가 나누어 맡으면 되겠군. 마 도우, 천기성은 그대에게 맡기겠네. 반드시 만벽 장로를 죽이고 그자의 북명거린(北冥巨鱗)을 빼앗아와야 하네!”

    “알겠습니다. 실수는 없을 겁니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는 표정이 변했다.

    ‘마수수가 만벽 장로를 죽인 이유가 북명거린이라는 것 때문이었군? 그게 뭐지? 마수수가 위험을 감수하고 천기성에 들어와 빼앗을 가치가 있는 보물인가?’

    그는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천이 화제를 돌렸다.

    “보상국과 비구국(比丘國)은 나와 홍굴이 맡도록 하지.”

    유천의 말에 홍굴이 고개를 끄덕였고, 세 사람은 이내 검은 빛줄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들이 떠나가고 남은 유소짐은 뒷짐을 진 채, 그루터기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호족들을 바라봤다.

    심협은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하자 세계수 그루터기로 날아가 위에 새겨진 금제 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깊은 잠에 빠졌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 심협은 이미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옆에는 화령자와 조비극이 서 있었다.

    “성공했나?”

    화령자가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응, 덕분에…….”

    심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화령자와 조비극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협이 정말로 시공간을 넘어갔다가 돌아왔다지 않는가! 삼계에는 각종 선법과 묘술이 부지기수이지만 시공간을 넘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살아서 이런 진귀한 장면을 직접 봤으니 흥분할 만도 했다.

    “이번에도 중요한 장면을 보고 왔어?”

    화령자가 설레는 목소리로 물었다.

    심협은 이번에 꿈에서 봤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했다. 비록 짧고 간략한 대화를 엿들은 것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매우 중요했기에 화령자와 조비극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화령자, 북명거린이 뭔지 알아?”

    “그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북명은 북명해(北冥海)를 말하는 건가? 그곳은 북구노주(北俱蘆洲)에서도 북쪽 극한의 바다인데……. 북명거린이라……. 글자를 봐서는 북명해에 사는 어떤 괴수의 비늘인가?”

    화령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심협은 마음이 무거웠다. 유천과 마수수 등의 분위기로 보아 북명거린은 매우 중요한 것인 듯했다. 또 어떤 음모를 꾸미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화령자조차 북명거린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니 당장은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도 없었다.

    그는 우선 옥간을 꺼내 신식을 넣고는 꿈에서 봤던 진문을 새겼다.

    “이게 꿈에서 봤던 세계수 그루터기 위에 있던 진문이야. 시간이 촉박해서 일부밖에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게 대연무량천기진일까?”

    심협은 옥간을 화령자에게 건넸다. 북명거린의 단서를 찾아낼 수 없으니 이제 남은 단서는 이 금제 부문뿐이었다.

    화령자는 옥간을 받고 신식을 넣더니, 잠시 후 눈을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진문이 조금 섞여 있긴 하나 대연무량천기진이 맞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 이상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게 없군.”

    심협은 내심 실망했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 아닌가.

    옥침을 살펴보니 별의 힘이 모두 소진된 상태라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하니 여기서 한 달을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동굴을 다시 한번 샅샅이 살핀 후에야 그는 장안성으로 향했다.

    * * *

    삼계 어딘가의 초록이 짙은 숲속. 대나무가 가득 자란 숲은 마치 천지간을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인 듯했다.

    높고 끊임없이 이어진 산봉우리를 따라 대나무의 바다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자 대나무숲이 파도처럼 흔들리면서 솨아아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바다에 몰아치는 거센 파도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나무 숲 깊은 곳의 외딴집.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도산설이 누워 있었다. 기운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일어날 기미는 없었다.

    호불귀는 옆에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운공하는 중이었다. 그는 부상을 완전히 회복했고, 기운은 3할 정도 더 강해져 있었다. 어떤 신통을 시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양손을 결인하자 몸 주위에 영광이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여섯 개의 푸른 여우 꼬리는 마치 여섯 개의 팔이 인사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호조의 힘은 역시 신기하구나. 체내 혈맥의 힘을 순수하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경지까지 크게 정진시켜주었어. 그때 흡수한 호조의 힘이 너무 적었다는 게 아쉬울 뿐. 안 그랬으면 단숨에 진선 후기까지 돌파했을 텐데…….”

    호불귀가 눈을 뜨고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이 갑자기 떨리더니 온몸 곳곳에 현묘한 회오리 같은 푸른 문로가 떠올랐고, 여섯 개의 꼬리에도 푸른 부문이 떠올라 희미하게 빛났다. 평범한 부문과 달리 부문마다 푸른빛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고, 겉에는 미세한 금은색 무늬가 감돌았다. 이 무늬가 반짝일 때마다 부근의 허공이 희미해졌다.

    호불귀를 중심으로 반경 10여 리의 천지영기가 여섯 개의 꼬리를 향해 미친 듯이 몰려왔다.

    여섯 개의 꼬리는 흔들림을 멈췄고, 그 위로 떠오른 부문들이 빠르게 한곳으로 모여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꼬리마다 채찍 같은 푸른 무늬가 떠올랐다.

    주위의 천지영기는 더 이상 모여들지 않았지만, 웅웅 떨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숭고한 존재를 향해 절을 하는 듯했다.

    “이 부문은 뭐지?”

    호불귀는 몸에서 일어나는 연이은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법칙 부문이다. 그 정도 혈맥의 힘으로 법칙 신통 각성 초입에 들어서다니, 너와 같은 반요에게 그런 자질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 하얀 빛이 번쩍였다. 뒤이어 나타난 사람은 바로 미소였다.

    “너는!”

    호불귀는 안색이 크게 변했고, 여섯 개의 꼬리가 반사적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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