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5화. 흡수
심협의 무심한 말에 호불귀는 서둘러 대답하고는 감사의 인사를 남긴 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도산설을 안고 둔술로 빠져나가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잠깐! 내 호형에게 부탁할 게 있소.”
심협이 갑자기 그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오?”
호불귀는 가슴이 철렁해 우뚝 멈춰 서고는 조마조마하며 물었다.
“도산설이 깨어나면 나 대신 그녀가 어디서 직녀선 법보를 얻었는지 좀 물어봐 주겠소?”
“그것뿐이오? 알겠소. 내 그리 하리다.”
“그럼 부탁하오.”
심협이 공수하며 말하자 호불귀는 곧장 둔술로 날아갔다.
“오라버니, 어째서 도산설을 풀어준 거예요?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원한이 깊을 테니 나중에 경지를 회복하면 보복하러 오면 어쩌려고요?”
“도산설은 이미 경지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회복할 가능성이 크지 않아. 호조의 힘이 있을 때도 내 상대가 아니었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심협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도산설이 오라버니야 어떻게 못 하겠지만, 오라버니 뒤에는 춘추관도 있잖아요. 그녀가 춘추관에 손을 쓰면 그 결과는 참담할 거예요.”
“도산설의 성정이 독하긴 하나 시비(是非)를 못 가리는 사람은 아니야. 나와 맺은 원한은 나와 풀려고 하지 다른 사람까지 건드리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나도 그냥 풀어준 거야. 그리고 어쨌든 호불귀는 나의 벗이고 또 반사동의 제자이니 인정을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심협의 설명에 섭채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령자, 뭔가 좀 알아냈어? 이곳에 어떤 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거야?”
심협은 세계수 그루터기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진문이 너무 많이 망가져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남은 진문을 봐서는 대연무량천기진일 가능성이 크다.”
“대연무량천기진! 그 진의 근원이 여기였던 건가? 그래서 청구산 정상에 진법의 흔적이 없는데도 미소가 대연무량천기진을 소환할 수 있었군!”
섭채주도 날아와 발밑의 금제를 자세히 살펴봤다.
“대량무량천기진은 풍수(風水) 대진이라 지맥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곳에 세계수까지 있다니. 그렇게 많은 감정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드디어 알 것 같다.”
“어디서 온 건데?”
“각지의 인간족 성에서 모은 게지. 삼계 중생 중 인간족의 감정의 힘이 가장 강하니까. 아무래도 호족이 장안성과 천기성 등을 공격한 이유도 혼란을 틈타 성 아래의 영맥에 감정을 모으는 도구를 설치하기 위해서였을 게다.”
“어째서 그렇게 요란하게 했을까요? 몰래 설치해도 되지 않나요?”
“지맥에 감정을 모으는 도구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이곳의 대연무량천기진과 연결해야만 감정의 힘을 모아서 보낼 수가 있지. 다만, 이 작업은 지맥에 큰 소란이 일어나 쉽게 다른 사람에게 발각될 수 있으니 일부러 소동을 벌인 것 같다.”
화령자는 성격이 괴팍하고 쉽게 짜증을 내지만, 심협과의 관계 때문에 섭채주의 물음에는 반드시 대답해줬다.
‘청구 호족은 이 모든 일을 빈틈없이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모두를 속였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진즉 알았더라면 호조를 상대할 때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이곳은 너무 넓으니 사람을 보내서 샅샅이 살펴보게 할까요?”
“청구 호족이 이곳의 법진을 부쉈다는 것은 이곳을 버렸다는 의미일 테니 단서를 남기지는 않았을 거야.”
섭채주의 물음에 심협이 고개를 저었다.
단서를 찾는 것은 나중이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곳을 알리면 세계수를 독차지할 수 없게 된다.
섭채주도 심협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이 거대한 세계수 그루터기에 그녀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이렇게 큰 세계수를 재료로 한다면 얼마나 많은 극품 목속성 보석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세 사람의 마음이 맞았으니 바로 세계수 뿌리를 캐기 시작했다.
심협은 검결을 맺어 몇 개의 날카로운 검기로 굵은 나무뿌리를 베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무뿌리는 반 척 정도만 베였을 뿐으로, 이는 전체의 2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계수는 그의 예상보다 단단해서 검기만으로 베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는 소매를 휘둘러 열여섯 자루의 순양검을 전부 꺼냈다. 열여섯 줄기의 눈부신 검홍이 날아가면서 펑, 펑 하는 굉음이 연이어 울려 퍼진 뒤에야 몇 장 길이의 두꺼운 나무뿌리가 떨어져 나왔다.
심협은 바로 소매를 휘둘러 소요경에 챙겨 넣고는 바로 다음 나무뿌리를 베기 시작했다.
한편, 섭채주는 2척 크기의 금륜을 꺼냈다. 순금 법보 주위에는 차가운 빛이 반짝이는 톱니가 달려 있어서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이 금륜이 나무뿌리 주위를 돌면서 순식간에 절반을 잘랐다.
그때, 화령자가 곡현성반의 금속성 법진을 발동하자 금색 도의 허상이 날아가 옆에 있는 나무뿌리를 모조리 베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몇 덩이의 나무뿌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세계수는 너무도 커서 세 사람이 벤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나무뿌리를 모두 베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봤다. 이곳에 내려온 지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육화명 등이 청구성 약탈을 마쳤을 것이다. 더 머뭇거렸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계수는 여기 있으니 일단은 나가죠. 나중에 다시 가지러 오는 게 좋겠어요.”
섭채주의 제안에 심협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화령자가 끼어들었다.
“세계수는 매우 진귀하다. 땅 깊은 곳에 있다 해도 다른 사람이 찾아내지 못할 거란 보장이 없어. 봉인 신통으로 기운을 완전히 봉인해두마.”
“좋은 생각이야. 부탁해.”
심협도 마침 그게 걱정이었기에 기뻐했다.
“이 봉인 비술은 나 혼자 시전하려면 힘드니 네 도움이 필요하다.”
화령자가 심협에게 말하며 곡현성반을 결인하자 하얀색 법진이 솟아올라 세계수를 뒤덮었다.
그가 곡현성반 위에 가부좌를 틀고는 쉬지 않고 결인하자 네 줄기의 하얀빛의 문이 세계수 전후좌우에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심협의 옆이었기에 그는 방금 잘려나간 나무뿌리의 잘린 부분으로 이동했다.
“법력을 다른 두 개의 빛의 문에 주입하면 된다.”
화령자가 소매를 휘두르자 두 줄기 붉은 빛이 근처에 있는 두 개의 빛의 문으로 들어갔다.
심협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손을 앞에 있는 빛의 문에 댔고, 왼손을 결인했다. 금빛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빛의 문으로 날아갔다.
하얀 법진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손바닥만 한 수많은 하얀색 부문이 뻗어 나와 살아 있는 것처럼 나무뿌리로 빠르게 퍼졌다. 이 부문이 지나가는 곳마다 세계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심협은 화령자의 뛰어난 수단에 감탄하며 계속해서 법력을 발동하여 그를 도왔다.
한데 그때, 그의 오른손 경맥에 있던 검은색 씨앗이 갑자기 떨리더니 검은색 뿌리가 빠르게 날아가 세계수 뿌리를 푹 찔렀다.
콰직! 콰직!
세계수 뿌리가 갑자기 부서지더니 혼탁한 기체가 되어 검은색 씨앗에 전부 흡수되었다.
검은색 뿌리가 조금 커지면서 격렬하게 떨려왔다. 오랫동안 굶은 사람이 갑자기 진수성찬을 먹어치우는 것만 같았다.
씨앗의 검은색 뿌리들이 세계수 그루터기의 줄기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검은 뿌리가 박힌 곳마다 세계수 줄기는 빠르게 부서지고 무너져 전부 혼탁한 기체가 되어 검은색 씨앗으로 흡수되었다.
이 씨앗은 빠르게 자라났고, 뿌리 끝에는 심지어 검은색 싹이 돋았다.
“심협, 지금 뭐 하는 거냐?”
화령자의 안색이 돌변했고 섭채주도 의아해했다.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야!”
심협도 괴로워하며 법맥 안의 검은색 씨앗을 제어하려 했지만, 이 씨앗은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마치 발작이라도 한 것처럼 강하게 떨려왔다.
검은색 씨앗은 혼탁한 기체로 변한 세계수를 흡수할수록 점점 커졌고, 싹도 빠르게 자라서 몇 호흡 뒤에는 검은색 새싹이 되었다.
두 개의 둥근 잎이 자라나 칠흑 같은 검은빛을 띠었고, 점점 더 커졌다.
심협은 이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두 개의 검은색 입이 가볍게 떨리더니 방대한 영력을 심협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거듭된 전투로 소모한 원기를 전부 채웠을 뿐만 아니라 온몸의 경맥이 팽창했다.
심협은 깜짝 놀라 서둘러 가부좌를 틀고 황정경으로 그 영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영력은 방대할 뿐만 아니라 매우 순수하여 그의 경지를 빠르게 정진시켰고, 잠시 후 그는 진선 후기 절정에 도달했다.
그 순간, 본래 뿌리를 내리고 있던 지하 동굴의 세계수 그루터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가느다란 뿌리 하나까지 검은 씨앗에 전부 흡수되었다.
이 씨앗의 외형은 크게 변하여 기이한 검은색 새싹이 되었고, 두 개의 둥근 잎이 펼쳐졌다. 어두운 뿌리도 몇 배나 두꺼워져 공간마저 부수려는 것처럼 허공에 뿌리를 내렸다.
심협은 씨앗의 변화를 감지하고는 적잖이 불안해졌다.
검은색 씨앗에서 수염이 자랐을 때 싹이 틀지도 모른다고 추측은 했지만, 그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니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협,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화령자가 곡현성반을 거두고는 날아왔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심협은 머뭇거리다가 검은색 씨앗에 대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섭채주는 보타산의 소종주이니 평소에 적지 않은 보타산의 비화 서적을 접했지만, 이 씨앗에 대한 내용은 본 적이 없었다.
화령자도 이 물건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해 검은색 씨앗이 변한 새싹을 살펴보고도 의혹만 커졌다.
두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한 것은 이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기에 심협은 내심 실망했다.
“내 비록 그 씨앗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의 뿌리를 흡수한 뒤로 원기의 일부가 네 몸에 녹아든 것을 보면 최소한 당분간은 네게 해를 끼칠 물건은 아닌 것 같다.”
화령자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말했다.
“그러길 바라야지.”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세계수가 흡수되면서 도천신살대진을 만든다는 계획이 또 많이 미뤄졌다는 것뿐이다.”
“도천신살대진? 설마 세계수의 뿌리로 도천신살대진의 진기를 만들 생각이었던 거야?”
“세계수는 오랫동안 청구 호족 땅속에 있으면서 대량의 요족 음기를 흡수했으니 최절정의 음속성 영재나 다름없다. 도천신살대진의 진기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아까처럼 많은 양이라면 본래 최절정급 도천신살대진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검은 씨앗 때문에 부서졌으니 남은 양으로는 기껏해야 서너 개의 평범한 진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야.”
화령자가 유감이라는 듯 혀를 찼다.
“오라버니, 도천신살대진을 만들 생각이세요? 그 진의 진도가 있어요?”
섭채주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응, 어떤 비경에서 우연히 얻었어.”
심협이 모호하게 설명했다.
“도천신살대진은 상고 제일의 흉진일 뿐만 아니라 역천의 위력이 있으니 만들 수 있다면 좋겠죠. 제 세계수 조각도 오라버니가 가지세요.”
섭채주가 잠시 생각하더니 세 개의 세계수 나무뿌리를 건넸다.
“너도 이걸로 보석을 만든다면서? 받을 수 없어.”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아직 하나 남았잖아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요?”
섭채주가 웃으며 그렇게 말한 후에야 심협은 나무뿌리를 건네받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요경 안으로 넣어 화령자에게 건넸다.
세계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세 사람은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바로 동굴을 나와 청구산 정상으로 돌아갔다.
육화명 등이 초조한 기색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들을 보고는 안도했다.
“심형, 섭 도우. 어디 다녀오는……?”
육화명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멍하니 심협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