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4화. 이유
“오라버니, 보타산은 이 보석비술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이 비술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돼요. 안 그러면 곤란해질 거예요.”
섭추재가 다시 전음으로 말했다.
“난 보석비술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야. 보타산의 보석비술이 그렇게 중요하면 나한테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심협이 살짝 웃으며 나무라듯 말했다.
“오라버니가 외부인도 아닌데 어때요? 그리고 저는 보타산의 소종주이니 종문이 알게 돼도 절 어쩌지는 못할 거예요.”
법체쌍수 이후로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심협의 위치가 보타산을 뛰어넘었다.
심협은 고개를 젓고는 바로 옥간을 넣었다.
그때, 땅에 엎드려 있던 화령자의 얼굴에 흥분이 들어찼다.
“뭔가 알아낸 거야?”
심협이 서둘러 물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 아래에 조령 조각상과 서로 호응하는 무언가가 있다. 둘 사이에 모종의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 다만, 땅속을 강력하고 혼란스러운 영력 파동이 뒤덮고 있어서 제대로 탐색할 수가 없군.”
“땅속에 뭐가 있다고?”
“땅속이면……?”
옆에 있던 섭채주는 뭔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변했다.
“같이 가서 살펴보자.”
심협의 제안에 화령자와 섭채주 모두 반대하지 않았다.
심협이 소매를 휘둘러 두 사람과 세계수 파편을 소요경에 넣고는 조용히 산 아래로 내려와 둔지술로 땅속으로 들어갔다.
화령자의 지시를 따라 그는 땅속을 한참이나 뚫고 지나갔고, 청구산 땅 아래 어느 깊은 곳까지 파고든 후에야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심협은 한 겹의 결계를 통과하는 것처럼 발끝이 텅 빈 느낌을 받으며 거대한 땅속 동굴로 들어섰고,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 동굴은 매우 커서 적어도 수천 장에 이르렀고, 땅속에 있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밝아서 내부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석벽마다 굵고 가는 나무뿌리가 퍼져 있었는데, 여러 갈래의 교차하는 길처럼 서로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다만 그것들은 하나의 주맥(主脈)으로 모여들었다.
이 주맥은 굵기가 10장도 넘는 거대한 나무뿌리였는데, 100장에 이르는 길이가 한쪽 벽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뿌리의 끝이 균열 사이를 파고든 것으로 보니 주요 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검은색 나무뿌리는 모두 동굴 중심으로 연결됐는데, 그곳에는 땅 위로 튀어나온 커다랗고 시커먼 그루터기가 있었다. 보기에는 평평하고 커다란 검은색 대 같았는데, 거대한 법진처럼 그 위에는 복잡한 진문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어지럽게 교차하는 칼자국으로 인해 진문의 절반은 부서져 있었고, 그루터기에 놓여 있는 호조 조각상도 부서져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부순 것 같았다.
“오라버니, 여기는 제가 전에 그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서 잠입했던 그 동굴이에요.”
섭채주가 심협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대한 검은색 나무그루터기를 살폈다.
이 그루터기의 재질은 산정상에 있던 조령 조각상과 똑같았다.
그가 깜짝 놀라 다시 살펴보니 이 나무그루터기는 정말로 세계수였다.
심협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작은 세계수 조각만 해도 매우 진귀해 선호연(仙狐涎), 풍뇌선조 같은 중보와 교환할 수 있거늘, 이 정도 그루터기라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단 말인가!
섭채주도 이 그루터기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만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세계수를 접했기에 이 나무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화 선배님, 세계수는 곤륜산에서 자랐다고 하지 않았나요? 뿌리만 남았다고는 해도 왜 여기에 세계수가 있는 거죠?”
“세계수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뿌리가 이렇게 작은 걸 보니 아무래도 작은 세계수였던 모양이군. 상고 시기 곤륜산에 있던, 하늘을 관통하는 세계수와는 비할 게 못 된다.”
그 말을 들은 섭채주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조령 조각상과 이 아래가 연결되어 있나 했더니 땅속에 세계수의 뿌리가 있어서였군. 다만 안타깝게도 이미 모든 생기가 잘렸어.”
화령자는 근처의 검은색 나무뿌리 옆으로 날아가 가볍게 어루만지며 혀를 찼다.
심협도 잘린 나무 옆으로 다가가 어루만지더니 갑자기 동굴 석벽의 어느 곳을 바라봤다.
“누구냐? 나와라!”
그는 크게 외치며 소매를 휘둘렀다.
파공음이 크게 울려 퍼지더니 빼곡한 붉은색 검광이 순식간에 날아가 석벽을 베었다.
쿠르릉!
석벽 전체가 무너지면서 먼지가 잔뜩 일어나더니 누군가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호형?”
심협은 상대가 호불귀임을 알아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호불귀는 기색이 좋지 않았고 표정도 매우 창백한 것이 혈색이 전혀 없었다. 기운도 들쑥날쑥한 게 매우 불안정했다.
그의 몸에는 하얀색 커다란 고리가 감돌면서 하얀 빛이 일렁였고, 주위에 불꽃 같은 칼날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떤 이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나오려고 했는데 심형의 공격이 워낙 빨라서 이 풍화권(風火圈)으로 막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소.”
호불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호형, 여기는 어떻게 온 것이오?”
심협이 호불귀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유소짐의 공격에 중상을 입었었는데, 산 곳곳에 연합군이 퍼져 있으니 숨어 다니다가 우연히 여기를 찾아내서 숨어 있었소. 한데 심형이야말로 여기는 어떻게 온 것이오? 전투는 어떻게 됐소?”
“유소짐은 이미 죽었고 청구 호족 절반은 신비로운 존재가 데리고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오.”
“유소짐이 죽다니! 누가 그녀를 쓰러트린 것이오?”
“체내의 호조의 힘이 어지러워져서 스스로 생기가 끊겨서 죽었소.”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자업자득이구려. 그나저나 심형은 이 동굴을 어떻게 찾아낸 것이오?”
호불귀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산 위에서 이곳의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살펴보러 왔소. 도산설은 어디 가고 호형 혼자요?”
“그 교활한 여자는 상처가 생각보다 가벼웠는지 내가 치료하는 중에 도망갔소.”
“정말이오?”
심협이 씩 웃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한 자루 순양검이 빠르게 호불귀 앞으로 날아가 잔상을 남기며 그의 오른팔을 스쳐 지나갔다.
호불귀가 깜짝 놀라 서둘러 뒤로 피했지만, 순양검의 속도가 더 빨라서 날카로운 검망이 독사의 혀처럼 그의 오른쪽 소매를 휘감았다.
찌익!
호불귀의 소매가 찢어지자 푸른 빛이 부서지면서 누군가가 안에서 떨어졌다. 바로 도산설이었다.
“건곤수(乾坤袖)?”
섭채주가 놀라서 외쳤지만, 화령자는 세계수 그루터기로 날아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는 진문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산설은 혼절한 상태였고, 푸른 머리카락은 이미 백발이 되어 매우 허약해 보였다. 기운도 매우 불안정했고, 지금도 점점 약해지는 중이라 이대로 뒀다가는 금방 목숨이 끊길 것 같았다.
심협이 차가운 눈빛으로 도산설을 노려봤다.
“심형, 도산설은 경맥이 거의 다 끊어져서 경지가 9할이나 사라졌소. 그러니 부디 그녀의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호불귀가 서둘러 도산설 앞을 막아섰다.
“도산설은 청구산 사건의 주모자 중 하나이자 수많은 연합군을 죽인 장본인이오. 호형이 비록 호족 혈맥이라고는 해도 반사동의 제자일진대 어찌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오?”
심협이 순양검을 회수하여 손에 쥔 채 물었다.
“도산설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요력을 주입하지 않으면 얼마 못 버티오. 우선 그녀의 내상을 치료하면서 이유를 말해줘도 되겠소?”
호불귀는 기운이 점점 약해지는 도산설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심협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호불귀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바로 도산설 뒤에 가부좌를 틀었고, 양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법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도산설은 상처가 너무 심했고, 호불귀도 중상을 입은 상태라 얼마 남지 않은 법력으로는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잠시 지켜보던 심협이 다가와 손끝에서 초록색 빛을 쏘아 보냈다. 이 빛은 호불귀의 가슴과 복부 등을 빠르게 찍었고, 마지막으로 등 한가운데를 찔렀다. 그러자 순수한 법력이 파도처럼 주입되었다.
호불귀의 어지럽던 기운이 빠르게 평온해졌고, 창백한 얼굴도 혈색을 되찾았다.
“고맙소, 심형.”
호불귀가 안도하며 심협에게 감사를 표한 뒤, 손가락으로 도산설의 복부 몇 군데를 연달아 점혈했다. 도산설의 기운이 훨씬 평온해졌고, 더는 쇠약해지지 않았다.
“별일 아니니 괘념치 마시오. 자, 이제 이유를 말해보시오. 대답에 따라 내가 그녀를 구할 수도, 죽일 수도 있소.”
심협이 차갑게 말했다.
그가 이전에 도산설을 구했던 것은 청구국 국주가 스스로 신념의 힘을 연화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 도산설은 유소짐의 손에서 도망쳤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빚이 없다. 오히려 대립하는 사이에 가까웠다.
호불귀는 곤란한 표정이었지만, 잠시 머뭇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심형도 청구 호족의 천년 된 호족이 인간족 검객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오. 그 여인의 이름은 도산완연(塗山婉姸), 인간족 검객의 이름은 한강항(韓江航)이오. 그들은…… 내 부모님이라오.”
심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형이 인간족과 호족에게서 태어난 반요라는 말이오?”
이전에 화령자가 호불귀의 호족 혈맥이 순수하지 하지 않으니 반요일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었다.
“그렇소. 당시 그 일은 청구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수많은 호족 장로가 강렬하게 반대했소. 심지어 내 부친을 죽여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인간족과 요족의 결실을 막으려고 했지. 허나 결국 청구국 국주께서 도와준 덕에 우리 부모님은 무사히 청구국을 떠날 수 있었소.”
“그럼 호형은 어째서 반사동 제자가 된 것이오?”
“부모님은 청구국을 떠난 뒤로도 변고를 겪었고, 결국 두 분 모두 돌아가셨소. 나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반사동에 들어가게 되었지. 내가 도산설을 구하려 했던 이유는 청구국 국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나, 그녀가 내 사촌 누이이기 때문이기도 하오.”
“사촌 누이? 그렇다면 호형의 모친이……?”
“그렇소. 어머니, 도산완연은 청구국 국주의 여동생이었소.”
“그런 거였군!”
심협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불귀와 도산설 사이에 이런 관계가 있으니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하려 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후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청구국 국주의 은혜에 보답하라 하셨소. 당초 심형과 청구산에 갔던 것도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었소.”
“심계가 너무 깊은 것 아니오? 어째서 그때 사실을 말하지 않았소? 내가 도산설을 죽였으면 어쩌려고……?”
“이전에는 심형을 속였지만, 지금은 간청해야 하는 입장이니 전부 털어놓아야 하지 않겠소? 게다가 심형은 생각이 깊으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거라 생각했소.”
심협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심형, 도산설은 이미 경지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다시는 인간족에게 복수하지 못할 것이오. 그녀를 풀어줄 수는 없겠소?”
호불귀가 공수하며 애원했다.
“경맥이 모두 끊어져 중상을 입었지만 회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오. 도산설이라면 어떻게든 실력을 회복해 각 문파에 복수하려 할 텐데, 어찌 감당하시려오?”
“그녀를 데리고 중토 대당을 떠날 거요. 만약 그녀가 복수하려는 기미라도 보인다면 전력을 다해 막겠소. 심형, 이제 내게 가족은 그녀뿐이오. 부디…… 그간의 친분을 봐서라도 보내줄 수 없겠소?”
호불귀가 침통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심협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호형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소, 데려가시오.”
“고맙소, 심형. 정말 고맙소.”
“모두 호형의 얼굴을 봐서 보내주는 것뿐이오. 만에 하나 나중에 다시 대당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