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화. 반호(半狐)
이 붉은색 물체는 화홍색의 영목이었는데, 하나는 몇 척 길이에 허벅지처럼 굵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조금 얇았지만 크기는 큰 차이가 없었다. 불꽃 같은 붉은 빛이 반짝이는 화린목이었다.
두 개의 화린목은 도산설과의 거래로 손에 넣은 것과 비슷했으니 만년 급이 분명했다. 그런 화린목이 돌 탁자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고, 광막이 막고 있어도 뜨거운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심협은 세 번째 순양검진이 아직 미완성이었기에 새로운 비검을 만들기 위해 줄곧 화린목을 찾아다녔지만 얻지 못했다. 한데 설마 여기서 찾게 될 줄이야!
이 두 개의 만년화린목이면 10여 자루의 순양검배를 만들기에 충분했고, 건곤현화탑에서 뽑아낸 수많은 육정신화라면 10여 자루의 순양검배를 순양검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만약 10여 자루의 순양검을 더 만들 수 있다면 그의 실력은 또 크게 정진할 터. 순양칠살검진을 익힐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이런 생각에 심협은 기뻐하며 아홉 자루의 순양검을 꺼냈고, 구검합일 신통으로 만든 붉은색 대검으로 화린목 주위의 하얀 광막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하는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고 하얀색 광막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지만 광막은 여전히 부서지지 않았다.
심협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초록색 보도, 홍명도를 한 손으로 쥐고 휘둘렀다. 홍명도가 초록색 빛의 선이 되어 광막의 균열을 강하게 내리쳤다.
꽝!
하얀 광막이 대번에 절반으로 부서졌다.
심협은 홍명도의 위력에 흡족했다. 다만, 화령자가 이 도는 사특하다 했으니 자주 쓰지 않기로 했다.
소매에서 금빛을 내보내 두 조각의 만년화린목을 휘감아 거둔 심협은 신식을 펼쳐 다른 곳도 살펴봤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화린목은 없었다.
심협도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순양검과 홍명도를 거두고는 축지척으로 대문의 금제를 뚫고 청석 대전 밖으로 나왔다.
마침 백소천이 그 앞에 서 있었는데, 허공에 몇 가지 보물이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보니 대문의 금제를 파훼하려는 것 같았다.
“심형, 자네……?”
백소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심협과 축지척을 번갈아봤다.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호불귀를 구할 때 어쩔 수 없이 축지척의 기운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까 모두를 데리고 청구성으로 돌아올 때도 섭채주의 곤륜경을 이용하여 들어온 것인데 여기서 이렇게 들통나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호불귀의 존재가 그들에게 숨길 정도의 큰 비밀은 아닌 듯했다.
“이전에 우리 주둔지에 접근했던 자의 이름은 호불귀입니다. 반사동 제자이자 내 벗이기도 하지. 호족이긴 하나 청구 호족은 아니오. 지금까지 청구산에 남아 정보를 캐내던 중으로, 주둔지에 들어온 것도 그 정보를 내게 알리려던 것이었소. 그러다가 채주에게 발견되면서 오해가 생긴 게요.”
심협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호불귀? 나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네. 반사동의 젊은 세대 중 걸출한 제자라 했지. 자네가 청구산에 안배해둔 동역자가 그 친구였군.”
심협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백소천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의도하여 안배한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남길 원했소.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호불귀는 어떤 문파에도 적의가 없다오.”
“그럼 그자가 알아낸 정보는 뭔가?”
심협은 숨김없이 호불귀에게서 들었던 것을 전부 말했고, 백소천은 적잖이 놀랐다.
“그럼 호불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겐가?”
“채주와 이곳에 숨어들었을 때 길을 안내해주고는 나와 채주에게 주둔지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라고 했소. 그는 이곳에 남아서 더 상황을 살펴본다 했는데 지금까지 보이지 않으니 적에게 잡힌 게 아닐까 걱정이오.”
“스스로 남기를 원했다면 자신을 지킬 수단이 있다는 것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러길 바랄 뿐이오.”
심협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방금 이 대문을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나? 안에 뭔가 있던가?”
백소천은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화제를 돌렸다.
“안에 청구 호족의 보물이 있는데 모두 강력한 금제에 봉인되어 있어서 간신히 금제 하나를 부수고 영목 하나를 가지고 왔소. 전부 챙기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거요.”
내심 기대에 찼던 백소천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지금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청구 호족의 상황을 알아내는 것이니 보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채주와 호불귀를 찾으러 가보겠소.”
심협은 인사를 남기고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가려 했다.
한데 그가 대전을 떠나가기도 전에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형, 잠깐!”
백소천이 기묘한 표정으로 쫓아왔다.
“백형, 무슨 일 있소?”
심협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심형, 아까 삼성멸마 신통을 시전할 때 사용한 부채 이름이 뭔가? 혹시 어디서 얻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성한선이라는 부채로, 어느 비경에서 우연히 얻었소. 백형은 그 보물을 아시오?”
“성한선? 이름은 처음 듣네만,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혹시…… 잠시 살펴봐도 되겠나?”
백소천이 머뭇거리다가 공수하며 물었다.
백소천의 말을 들은 심협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드러났다. 수사들은 하나같이 법보를 중히 여긴다. 성한선 같은 강력한 지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이런 요구는 당혹스러웠다.
“나도 지나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네. 다만, 몇 년 전부터 꿈속에서 별빛의 보선(寶扇)을 계속 봐왔는데, 그게 그 부채와 너무도 비슷하게 생겨서 말일세. 비록 내 꿈에 왜 별빛 보선이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물건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어 보여서 그렇다네. 부탁일세.”
백소천의 간곡한 부탁에 심협은 마음이 풀렸다. 그는 백소천을 잘 아는데, 결코 허튼 거짓이나 말할 사람은 아니다. 그가 꿈속에서 성한선을 봤다면 이 물건이 그에게는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성한선이 얻기 어려운 법보인 것은 맞지만 심협으로서는 특별히 중시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꺼내서 백소천에게 주려는데, 갑자기 앞에서 법력이 충돌하는 굉음과 성난 포효가 들려왔다.
“육형!”
표정이 돌변한 심협은 곧장 달려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 편전 앞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가기도 전에 편전의 문 절반이 쾅 하며 부서지더니 육화명이 튕겨 나왔다. 그의 앞에 떠 있던 노란색 방패는 부서졌고, 가슴의 몇 줄기 상처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육형!”
심협이 서둘러 다가가 육화명을 받았다.
“크아아!”
야수의 포효가 대전 안에서 들려오더니 혈광이 튀어나왔는데, 온몸이 혈운으로 뒤덮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는 그것은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진선 후기의 방대한 흉살(凶煞)의 요기가 뿜어져 나왔다.
“육형을 돌봐주시오!”
심협이 뒤따라오던 백소천에게 육화명을 넘긴 뒤 곧바로 핏빛의 물체를 향해 소매를 휘둘렀다.
빼곡한 붉은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전방 수십 장을 뒤덮더니 핏빛의 물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핏빛 물체는 피하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곧장 검기를 향해 달려들더니 연이은 충격음을 내며 순양검기를 부수고는 순식간에 심협에게 돌진해왔다.
거대한 혈홍색 손톱이 혈운에서 튀어나오더니 잔상을 가득 남기며 심협의 머리를 움켜쥐려고 날아왔다.
“심형, 조심하게! 그 괴물의 몸은 매우 단단하니 접근전은 위험해!”
육화명의 허약해진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미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심협은 곧장 혈백원번을 꺼내 몸 앞을 막고는 위력을 최대로 발동했다.
혈백원번에서 성난 파도 같은 소리와 함께 몇 겹이나 쌓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파도 같은 혈광이 흘러나왔다. 마치 핏빛의 깃발 안에 대해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발톱이 혈백원번을 내리치자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허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혈백원번은 잠깐 흔들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육화명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강력한 발톱에 자신의 황암순(黃巖盾)조차 가볍게 부서졌거늘, 심협의 저 핏빛 깃발은 대체 어떤 보물이기에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한편, 심협의 법결의 바뀌자 혈백원번이 크게 출렁이며 혈광을 뿜어냈고, 혈랑(血浪)의 파문이 뿜어져 나왔다.
발톱 모양의 혈광이 쏜살같이 날아가 핏빛 물체를 공격해 뒤로 튕겨냈다.
혈백원번을 만들 때 심협은 화령자에게 보타산의 파란불경을 참고해 비슷한 신통을 시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바 있었다.
심협이 소매를 휘두르자 두 자루의 순양검이 번개처럼 날아가 핏빛 물체의 몸을 베었다.
챙! 챙!
두 번의 금속음이 들리더니 두 자루 순양검이 그대로 튕겨 나왔다.
심협은 싸늘한 눈으로 결인하여 두 검을 안정시키고는 법결에 변화를 주었다. 그러자 두 자루 순양검이 살짝 떨리더니 붉은색 검사로 변하여 핏빛 물체를 휘감고 강하게 베었다.
피식!
가벼운 소리와 함께 핏빛 물체 주위에 있던 혈운이 완전히 찢겨나가면서 본체가 드러났다. 그 정체는 반인반호(半人半狐)의 괴물이었다.
“호족?”
심협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검사에 긁혔음에도 반호 괴물의 몸에는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이 괴물은 성난 포효와 함께 두 발로 땅을 강하게 디뎠는데, 그 자리에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다음 순간, 괴물은 핏빛 잔상으로 변해 돌진해왔다.
그러나 심협은 이미 괴물의 속도에 익숙해졌기에 혈백원번을 발동하여 순식간에 괴물 앞에 나타나더니 겹겹의 혈랑을 휘몰아쳐 다시 물러가게 했다.
반호 괴물이 몸을 가누기도 전에 허리춤에서 검은 빛과 함께 검은색 마환이 날아가 몸통을 조였다.
구유마환에서 칠흑 같은 마염이 불타오르더니 빠르게 줄어들어 반호 괴물의 몸을 깊게 파고들었다. 이와 동시에 작은 은색 종이 괴물 머리 위에 나타나 울리면서 신혼을 혼란에 빠트릴 음파를 퍼뜨렸다.
반호 괴물의 두 눈이 흐려지더니 그 자리에 우뚝 굳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괴물의 몸에서 혈광이 용솟음쳤고, 신지가 회복되면서 구유마환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부림쳤다.
그 순간, 초록빛 도의 허상이 괴물 옆에 나타나더니 번개처럼 목을 베고 지나갔다.
몸부림치던 반호 괴물이 우뚝 멈추더니 이윽고 머리가 옆으로 떨어졌다. 잘린 목에서는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고, 커다란 몸이 쓰러졌다.
괴물의 기운이 사라지자 육화명은 경악했다.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반호 괴물을 몇 초(招) 만에 죽이다니, 심협의 실력이 저 정도였단 말인가!
자신에게도 아직 강력한 수단이 남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로 자신감을 잃고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심협이 초록색 도의 허상을 다시 불러들였다.
명홍도에는 혈광이 묻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어렴풋이 투명한 작은 여우 허상이 보였다. 반호 괴물의 신혼으로,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안으로 흡수되어 갔다.
명홍도에서 만족한 듯한 떨림이 들려오더니 감도는 살기는 더 짙어졌고, 초록빛 도신(刀身)이 혈광색을 띠기 시작했다.
심협의 눈가가 떨려왔다.
‘벤 자의 신혼과 정혈을 흡수하다니, 이 명홍도는 역시 사특하구나.’
다만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는 곧장 육화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육형, 저 괴물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저 편전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땅에서 갑자기 은빛이 솟더니 저 괴물이 튀어나왔네.”
이미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육화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심협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때, 멀지 않은 곳의 땅에서 갑자기 눈부신 은빛이 번득이더니 또다시 반인반호의 괴물이 나타났다.
여기만 아니라 청구성 곳곳에서 은빛이 연달아 번득이더니 반인반호의 괴물들이 출몰했다.
“이게 도대체……?”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