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화. 밀담
쾅!
굉음이 울리더니 금색 태양이 그곳에서 번쩍였다. 강력한 기운에 주위의 허공까지 흔들렸는데, 마치 물이 끓는 것만 같았다.
회색 그림자가 허공에서 밀려나더니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저자는……?”
심협의 눈이 푸른 빛으로 번득였고, 이내 회색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누구냐!”
“청구 호족의 첩자다!”
짧은 외침들에 이어 연합군 쪽에서 몇 개의 강력한 둔광이 번개처럼 날아와 회색 그림자를 향해 돌진했다. 약목신궁의 공격이 워낙 요란했기에 연합군 측의 고수들이 바로 눈치챈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곧장 연연나금의를 발동하여 모습을 감췄다.
섭채주는 심협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방해하지는 않았다.
몇 개의 강력한 둔광에서 녹과 흑, 두 개의 빛이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와 눈 깜짝할 사이에 회색 그림자 앞에 나타났다. 바로 강신천과 칠살이었다. 두 사람이 신창 비룡재천과 형천지역창을 교차하며 회색 그림자를 베자 주위의 허공이 길게 찢어졌다.
깜짝 놀란 회색 그림자는 두 개의 신창을 향해 양손에서 공 같은 회색 빛을 쏘아 보냈다.
펑! 펑!두 번의 폭음과 함께 회색 빛이 폭발했고, 비룡재천과 형천지역창도 뒤로 밀려났다.
회색 그림자는 마치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몸을 틀어 두 자루 신창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가더니 번개처럼 도망치려 했다.
“어딜 가려고!”
칠살이 호통을 치며 형천지역창에서 흡인력을 발하는 흑망을 뿜어냈다. 주위에 생겨난 강력한 기류의 회오리가 웅 하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회색 그림자 뒤에 이르렀다.
앞선 전투에서 너무도 많은 마왕채 제자들이 죽거나 다쳤기에 청구 호족을 향한 칠살의 분노는 매우 깊었다. 저자가 비록 첩자에 불과하다 해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회색 그림자가 형천지역창에 붙들리려는 순간, 초록색 빛이 회색 그림자 뒤에서 반짝였다. 거의 동시에 검은색 광망이 형천지역창을 쳐냈다.
쾅!
굉음과 함께 천지를 뒤덮는 검은 빛이 폭발했고, 기류는 회오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회오리가 지나는 곳마다 산과 땅이 무너지고 빼곡한 숲이 광풍에 뿌리가 뽑혔다.
형천지역창은 더욱 빠른 속도로 칠살을 향해 날아갔는데, 강력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뒤로 몇 장을 밀려난 후에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이건…… 마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앞에서 폭발한 검은 빛에서 칠살은 또 다른 순수한 마기를 느꼈는데, 그 기운은 심지어 자신보다도 강력했다.
강신천도 다가와 눈부신 금빛과 함께 이정의 법보 영롱보탑을 꺼냈다.
허공에 갑자기 금빛이 비치자 주위의 검은 빛과 맹렬한 기류가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 회색 그림자도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강신천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신식으로 반경 수십 리를 뒤덮어 남은 기운 파동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쓸어간 것처럼, 상대가 사용한 마기 외에는 다른 모든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금 그 초록색 빛은 뭐였지? 거기에 공간의 힘이 담겨 있는 게 느껴졌어. 아무래도 누군가 공간 법보를 이용하여 그 회색 그림자를 구해낸 모양이군. 자네는 그 빛이 뭔지 알아봤나?”
“아니. 전혀…….”
강신천의 물음에 칠살이 고개를 저었다.
육화명과 백소천을 비롯한 다른 문파의 고수도 막 다가왔는데,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중 누구도 초록색 빛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섭 도우, 도우가 가장 먼저 발견하지 않았소? 뭔가 알아낸 게 있으……?”
강신천은 섭채주가 있는 곳을 돌아보며 묻다가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일순 멍해졌다.
섭채주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섭 도우는 방금 암영둔술로 사라졌소. 그 초록 빛을 쫓아간 모양이오.”
백소천이 말했다.
그는 뒤늦게 도착한 터라 싸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에 섭채주가 둔행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좀 전의 그자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니 혼자 쫓아가면 위험할 텐데…… 섭 도우가 괜찮을지 모르겠소.”
다른 사람들도 걱정이 됐지만, 섭채주는 이미 사라진 후였고, 매우 현묘한 암영둔술의 흔적을 쫓기는 어려웠으니 방법이 없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사람들을 보내 섭 도우와 그 두 사람을 쫓읍시다.”
강신천의 말에 수사들은 진영 부근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 * *
주둔지 깊은 곳, 심협의 막사 안. 초록색 빛이 번뜩이더니 심협과 그 회색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와줘서 고맙소, 심형. 정말로 죽는 줄 알았소. 한데 여기는 어디요?”
회색 그림자는 심각한 이야기를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하고는 몸의 회색빛을 지웠다. 그는 바로 호불귀였다.
“연합군 안의 내 처소요.”
“날 왜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오? 저들에게 걸리면 난 정말 끝장이오!”
호불귀가 깜짝 놀라더니 이번에는 잔뜩 긴장해 사방을 둘러봤다.
“다른 수사들은 아마 호형을 찾느라 바쁠 테니 당분간은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않을 거요. 호형이 위험을 무릅쓰고 날 찾아온 건 분명히 중요한 일일 테니 어서 말해보시오.”
“하긴……. 사실 며칠 동안 청구국을 몰래 조사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소.”
호불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방 안에 검은 빛이 번득이며 솟아났다.
안색이 돌변한 호불귀가 반사적으로 은빛을 뿜어내며 번개처럼 날아가 검은 빛을 베려 했다.
검은 빛이 짙어지더니 웅 하며 울렸고, 대번에 몇 장 크기의 어두운 영역으로 변했다. 강력한 은빛이 우뚝 멈추며 본체를 드러냈는데, 초승달 모양의 은색 세검(細劍)이었다.
호불귀가 손에서 회색 빛을 발하며 다시 검은 빛의 영역을 공격하려 했다.
한데 심협이 그 앞에 나타나 호불귀의 공격을 막아내며 다급히 말했다.
“호형! 채주! 모두 멈추시오! 같은 편이오!”
“호형? 오라버니가 전에 말했던 그 청구국의 호불귀라는 분인가요?”
섭채주가 검은 빛의 영역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물었다.
“호형이 호족이긴 하지만 청구국 사람은 아니야. 이전에 나와 함께 청구산에 왔다가 나는 천기성으로 향했고, 호형은 여기 남아서 조사를 이어가기로 했지. 호형은 적이 아니야.”
호불귀도 섭채주를 살펴보더니 손을 내렸다.
“어쨌든 결국 호족이잖아요. 오라버니 막사로 데려온 것은 너무 위험해요. 연합군에는 안 그래도 오라버니가 너무 청구 호족 편을 든다고 수군대는 자들이 많아요. 오라버니의 전공이 너무 크니까 다들 대놓고는 말은 안 하지만 지금 호족과 같이 있는 걸 보게 된다면 의심을 피하지 못할 거에요.”
섭채주가 전음으로 말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심협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섭채주를 안심시키며 전음으로 답했다.
심협이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임을 알기에 섭채주도 그제야 안심하고는 호불귀에게 인사했다.
“호 도우, 오라버니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방금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결인하여 검은 빛의 영역을 없애고는 은색 세검을 돌려줬다.
호불귀는 심협과 섭채주 사이의 전음을 듣지 못했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지금 청구 호족과 문파는 이미 물과 불 같은 사이이니, 이럴 때 심협을 찾아온 것이 들통난다면 확실히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심협 외에는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호불귀도 서둘러 예를 올렸다.
“시간이 없으니 예의는 그쯤 차립시다. 호형, 청구국에서 알아냈다는 중요한 사실이 무엇이오?”
심협이 소매를 뿌리치자 금빛이 막사 안을 뒤덮었다.
섭채주도 곤륜경을 발동하여 검은 빛을 뿜어내 방 전체를 뒤덮어 외부에서의 탐사를 차단했다.
“저는 밖에서 망을 볼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빛 안으로 들어갔다.
“심형이 떠난 뒤로 청구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정해졌소. 청구국 국주 일파는 완전히 제압돼 권력을 잃었고, 지금 청구국을 이끄는 자는 유소모주요. 청구국 국주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한 것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게지.”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청구 호족의 태도가 갑자기 그렇게 강경하게 바뀐 거였어.”
심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유소모주는 실로 노련하고 용의주도하오. 며칠 동안 쭉 장안성 습격과 그녀의 관계를 알아내려 했지만, 더 조사하기 전에 그 단서가 사라져 버렸소.”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되면 유소모주의 혐의는 더 커진 셈이다.
“아마 심형도 모를 것 같은데, 이번에 호족이 외부에서 온 수사들을 공격한 것도 사실은 국주의 명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뜻이었소.”
실제로 몰랐던 이야기였기에 심협은 솔깃했다.
“유소모주요?”
“그건 아직 알아내지 못했으나 그를 가능성이 가장 크오.”
“청구국은 이미 유소모주의 손에 넘어갔으니 그녀가 아니라면 청구 호족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이건 확실하니 더 알아볼 필요도 없겠소.”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자 호불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소모주가 그토록 강경하게 공격한 것은 연합군 쪽에 지원군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호형이 보기에 청구 호족이 이 싸움을 계속할 것 같소?”
“그럴 공산이 매우 크오. 청구국 국주의 죽음이 청구 호족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소. 유소모주가 뒤에서 은밀히 부추기면 다시 싸움이 일어날 거요.”
심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고, 혼자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원천강은 자신에게 청구산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지금 봐서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청구국 국주가 자진할 때 도산설도 청구산으로 돌아왔소. 그녀의 실력도 범상치 않을 텐데 지금 어쩌고 있소?”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도산설? 그건 모르겠소. 아마 청구국 국주의 곁을 지키고 있지 않겠소?”
호불귀의 대답에 심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산설과는 장안성에서 한 번 마주친 것뿐이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는 섬세하고 의지가 강해 모친이 수사들의 핍박에 자진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이상 절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호불귀의 말대로 청구국 국주 옆을 지키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소모주 한 명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도산설까지 합세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심형은 도산설을 만난 적이 있소?”
호불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장안 호란 때 장안성에서 만난 적이 있소.”
심협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
“도산설이 그때 장안에 있었군.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호불귀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서 심협은 잘 듣지 못했다.
“호형, 뭐라고 했소?”
“아, 아무것도 아니오.”
“한데 그녀가 청구국 국주의 딸이었을 줄은 몰랐소. 이전의 장안 호란 때도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아닐 거요. 내가 알기로는 도산설이 청구산을 떠난 게 청구 호족이 잃어버린 매우 중요한 물건을 찾기 위함이라고 들었소.”
“그게 뭔지 알고 있소?”
심협은 도산설과 교환한 하얀 옥석이 떠올라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소.”
호불귀는 고개를 저었다.
“심형, 오늘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은 청구산 상황을 말해주는 것 외에도 사실 다른 부탁이 있어서요.”
호불귀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편하게 말해보시오.”
한데 막 입을 열려던 호불귀는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지더니 온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근육이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하더니 피부에 푸른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두 귀도 길어졌다.
심협이 서둘러 그의 몸을 살폈다.
호불귀는 중독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술법에 당한 흔적도 없었는데 왠지 모르지만 요력이 빠르게 운공되며 폭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