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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001화 (1,001/1,214)
  • 1001화. 공간표기(空間標記)

    유소모주가 주문을 읊조리고 다시 수중의 백골 구슬을 결인하자 핏빛 광망이 어린 제비가 나무로 들어가듯이 날아서 동굴 안에 있는 유소모주 일파의 호족 몸으로 녹아 들어갔다.

    이 호족들의 몸도 갑자기 털이 자라서 밖에 있던 그 호족들처럼 야수화가 됐는데 동굴 안에 있는 호족들은 눈빛이 여전히 또렷하여서 이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유소모주가 이 광경을 보고는 한숨 돌렸는지 표정이 풀렸다.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이렇게 호조의 힘을 흡수하는 게 역시 훨씬 안전하군요!”

    검은 대진 안의 호족들이 흥분된 표정으로 유소모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별것 아니다. 계속해서 법진을 운공하여 일족이 최대한 빨리 호조의 힘에 적응할 수 있게 해라!”

    “네!”

    호족들이 늠름하게 답하고는 계속해서 검은색 법진을 발동했다.

    “나는 저들 체내에 담긴 호조의 힘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해야 하니 다른 것을 신경 쓸 틈이 없다. 바깥의 일은 그대에게 처리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회색 옷의 인영이 짧게 답하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

    한데 동굴 안의 사람들은 검은색 법진에 집중하느라 옆에 있던 미소가 어느새 자리에 앉았다는 것도, 눈에서 혈광을 발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도 반조의 상황인 것 같았으나 야수화가 되지는 않았다.

    한편, 청구성 정상의 조령 제단 안에서는 아무도 제어하지 않게 되자 호조 조각상이 뿜어내던 혈광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나 조각상의 혈홍색 광망은 사라지지 않고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청구성 너머 더 먼 곳까지 흘러갔다.

    * * *

    연합군 주둔지. 심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막사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모든 문파의 수사와 청구 호족은 이미 서로를 죽이는 데 혈안에 돼 있어 누구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고, 한바탕 싸움을 피할 방법이 없을 듯했다.

    심협은 청구 호족에 호감이 있었는데 몇 번의 대전을 겪으면서 그도 더 이상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게 됐다.

    하지만 장안성 습격과 천기성 사건, 지금 청구 호족의 기습까지, 이 모든 상황을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배후를 밝혀내고 사로잡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터였다. 또한, 원천강이 자신을 청구산으로 보낸 것에는 분명 목적이 있을 테니 이 일도 밝혀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심협이 갑자기 눈을 치켜뜨더니 곧장 소요경 안으로 들어갔다.

    * * *

    소요경 공간 깊은 곳.

    명화연노가 우르릉거리며 흔들렸고, 아래에서는 하얀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바로 건곤현화탑의 육정신화였다. 심협은 당시 천언궁에서 현화탑을 얻은 뒤 안에 담긴 육정신화를 절반 정도 뽑아냈다.

    이 불은 연기용으로는 최상이었다. 전설의 태상 노군도 팔괘로에서 이 불꽃으로 수많은 신병과 무기를 만들어냈다고 하지 않는가.

    화령자는 심협에게 육정신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 달라고 하더니 법보 연단에 들어갔다.

    명화연노의 영문이 빠르게 번쩍였고, 뿜어져 나오는 밝은 노을빛에 반경 10여 장이 적홍색으로 물들었다.

    화령자는 연노 상공에 떠 있었는데,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끝난 거야? 이번에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심협이 명화연노 옆에 나타나 물었다.

    화령자는 심협을 노려볼 기력도 없는지 말없이 결인했다.

    연노의 뚜껑이 떠오르더니 보라색과 초록색 빛무리가 안에서 뿜어져 나와 소요경 안을 쉬지 않고 날아다니면서 맑고 흥겨운 소리를 냈다.

    심협은 눈을 반짝이더니 손을 들어 흡입력을 발했다. 그러자 두 개의 빛무리가 끌려왔다. 안에 있는 물건을 보니 커다란 보라색 깃발과 초록색 율척이었다.

    보라색 깃발은 혈백원번(血魄元幡)으로, 그 위에는 하얀 해골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고, 아직 제련하지 않아서 보라색 광망이 안에서 새어 나왔다.

    보라색 광망이 닿자 심협은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졌고, 주위의 천기영기가 몰려와 몸 곳곳의 경맥으로 주입돼 법력과 기혈의 흐름을 빠르게 했다.

    “이건 무슨 신통이지?”

    심협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화령자가 이전에 혈백원번의 신통에 대해 말해줬는데, 이 깃발은 수속성 법보로 방어력이 매우 뛰어나 기혈번이나 천두금준 이상이라고 했다.

    이 깃발은 공격에도 쓸 수 있는데, 혈도의 지보라 혈도의 극치인 혈원(血源)의 힘을 시전함으로써 만물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지영기를 몸으로 흘려보내 법력과 기혈의 운공을 빠르게 해주는 신통은 화령자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육정신화는 역시 연기에 가장 적합한 불꽃이었다. 이번 연기는 내 평생 가장 성공한 연기 중 하나였어. 이 혈백원번은 64도 금제를 제련했을 뿐만 아니라 금제들을 하나로 합쳐 훗날 선기로 올라갈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화령자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상품 법보가 선기로 올라가려면 64도 금제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야?”

    “그렇지. 허나 그건 정말 어렵고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보통의 연기사였다면 모든 조건이 갖춰져도 최소 몇 년은 걸릴 일이지.”

    화령자가 거만한 목소리로 거드름을 피웠다.

    “정말 고맙군. 고생했어.”

    심협은 그제야 이번 연기가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를 알아채고는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치하했다.

    “혈백원번의 금제가 하나가 되면서 새로운 신통이 탄생했다. 나는 이걸 혈신부체(血神附體)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신통은 천지영기를 몸으로 넣어 단시간에 실력을 크게 증폭시켜줄 게다. 혈신부체의 효과와 조종은 혈백원번을 사용하는 자와 긴밀한 연관이 있지. 네 지금 경지면 실력을 3할 정도는 올려줄 거다.”

    “놀라운 신통이군! 그런데…… 혈신부체를 사용하고 나면 후환이 있을까?”

    “당연히 없지! 혈신부체가 소모하는 것은 천지영기일 뿐, 그걸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방금 전까지는 그저 기쁜 정도였다면, 이제 심협은 크게 흥분했다.

    제어하는 자의 실력을 3할이나 높여준다면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칠 터. 심지어 후환이 없다는 것은 혈백원번을 사용하는 자의 법력만 충분하다면 쉬지 않고 시전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역시 연기술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군. 대단해!”

    심협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축지척도 정련했으니 이전과는 좀 다를 거다.”

    화령자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심협은 축지척을 들고 결인하여 제련을 시작하자마자 감탄했다.

    천언궁에서 축지척을 얻은 뒤, 그는 이 법보의 제련을 시도해봤지만, 그 과정이 너무 어려워 1도의 금제를 제련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데 지금 제련해보니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했고, 힘을 내기도 전에 2도 금제가 풀릴 기미를 보였다.

    “순수한 공간 법보는 매우 적어서 삼계 전체에도 몇 안 되고, 그나마도 대다수는 다른 속성 영재와 혼합하여 만들지. 본래 축지척도 마찬가지로 대지현정(大地玄晶)을 혼합하여 만들었다. 너는 토속성 신통이나 공법을 수련하지 않았으니 축지척을 연화기가 어려웠을 게다. 한데 묵혼비와 청천연은 모두 현목(玄木)을 혼합하여 만든 공간 법보인데, 내가 두 법보를 축지척에 넣어 그 안의 대지현정을 대신하게 했다. 넌 을목선둔을 대성했으니 이제 축지척을 제련하는 게 훨씬 쉬워졌을 게야.”

    화령자는 심협의 멍한 모습을 보고는 그 이유를 안다는 듯 설명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고맙군.”

    심협은 그제야 어째서 축지척의 색깔에 이렇게 크게 변했는지 알게 됐다.

    그는 계속해서 전력을 다해 연화했고, 금방 45도 금제를 연화해 축지척 장악을 시작했다.

    그는 법력을 운공하여 주입했다. 그러자 초록 빛이 그의 몸을 뒤덮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소요경 밖 막사에 나타났다. 축지척은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 소요경 같은 공간 법보도 그를 가둬둘 수 없었던 것이다.

    “훌륭해!”

    심협은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다시 축지척을 발동해 그곳에서 사라졌다.

    심협이 나타난 곳은 조양곡에서 수십 리 떨어진 어느 산골짜기의 허공이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이제 갓 제련을 시작한 것임에도 오십 리를 날아오다니, 완전히 연화한다면 백 리도 가능하겠어!”

    게다가 축지척은 을목신통 같은 둔술과는 전혀 달라서, 공간을 넘나드는 이런 법보를 막을 수 있는 금제나 수단은 극히 드물었다. 쉽게 말해 축지척만 제대로 다룬다면 삼계에서 그가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할 곳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심협은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축지척에 묵혼비와 청천연을 넣어서 공간의 힘이 크게 증폭하고 네 을목선둔의 진을 참고해서 공간표기(空間標記) 능력도 추가할 수 있었다.”

    “공간표기? 이건가?”

    심협의 손에 들린 축지척에서 초록색 빛이 갑자기 빛났다. 이어서 초록색 그림이 눈앞에 떠오르더니 빠르게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이 그림과 공간이 서로 하나가 되니 기운 파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축지척이 아니었다면 그로서는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이 표기를 미리 남겨두면 천 리 안에서는 축지척으로 순식간에 올 수 있을 게다. 그리고 공간표기에 상고 현은(玄隱) 부문을 적용했으니 허공과 거의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있지. 태을 수사도 사전에 알지 못한다면 발견하기 어려울 게다.”

    화령자의 득의양양한 말에 심협의 눈이 반짝였다.

    한데 그가 이 능력을 확인해보려는 순간, 뒤편 허공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심협은 표정이 돌변해 곧장 피했고, 머리 위에서 혈광을 발짝이며 혈백원번을 소환해 핏빛 광막으로 몸을 보호했다.

    “저예요, 오라버니.”

    검은 그림자 안에서 섭채주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채주?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심협이 안도하고는 혈백원번을 넣으며 웃었다.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는 현재 연연나금의로 기운을 은폐하고 있었다. 더욱이 주위에서는 탐색용 금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섭채주가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곤륜경 덕분이에요. 청구 호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 보타산 제자들이 많이 다쳤어요. 그래서 기습에 대비해 곤륜경으로 진영 주위에 탐색 신통을 설치해놨어요.”

    섭채주가 곤륜경을 꺼내 결인했다. 그러자 주위의 허공에 기척도 없이 가느다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리저리 교차하며 먼 곳까지 퍼져 있는 것을 보니 진영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무슨 탐색 신통이야?”

    심협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곤륜경 안에 있는 무도 신통 암영천라망(暗影天羅網)이에요. 강력한 감지 능력이 있어서 잠행술이든 오행둔술이든 심지어 공간 법보든, 이 금제를 지나가는 것은 모두 감지할 수 있어요.”

    “무족은 역시 상고 시기의 한 시대를 제패했던 일족 답구나! 그런데 나는 왜 이 암영의 기운을 못 느꼈지?”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지만, 이내 의아한 듯 물었다.

    “암영천라망은 흡자 조무의 흑암의 힘으로 만든 것이니 밤에는 누구도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없어요. 심지어 태을경이라 해도요.”

    “곤륜경은 실로 대단한 보물이구나!”

    심협은 감탄을 쏟아냈다.

    “맞아요. 곤륜경은 지금껏 제가 손에 넣은 그 어떤 법보보다 훨씬 현묘해서 제련할수록 오히려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예요.”

    섭채주는 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거울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 오라버니. 이 야심한 밤에 여기에서 뭐 하세요? 방금 오라버니가 사용한 둔법은 실로 현묘해서 암영천라망으로도 감지하지 못할 뻔했어요.”

    “별거 아니야. 화령자가 축지척을 새롭게 제련해줘서 시험해보고 있었어.”

    심협이 축지척을 들어 올리자 섭채주는 겉모습이 완전히 바뀐 이 법보를 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갑자기 번개처럼 돌아서며 먼 곳을 바라봤다.

    “거기 누구냐! 당장 나와라!”

    그녀가 차갑게 외치는 동시에 오른손에 금빛이 반짝이면서 약목신궁이 나타났다.

    금빛 화살이 손에서 떠나더니 쏜살같이 수십 장을 날아가 허공을 뚫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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