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화. 음모
도산설이 한참을 바라본 뒤 엄숙한 표정으로 제단 앞으로 걸어가 세 개의 호령옥을 꺼내 바닥의 세 군데 홈에 하나씩 꽂았다.
이어서 도산설은 제단에서 물러나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제단 중앙에 있던 구미선호 그림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사람만 한 선호 조각상이 천천히 땅 위로 올라왔다.
세 개의 호령옥에서 하얀 영광이 뿜어져 나와 선호 조각상으로 모였다.
곧이어 주위의 백옥 돌기둥 10여 개에 새겨진 부문에서도 연달아 빛이 나더니 기둥 끝에 있는 만년등의 불꽃이 더 커져 제단 전체를 환하게 비췄다.
구미선호 조각상의 두 눈에서 영광이 번득이더니 조각상의 겉을 희미한 광망이 뒤덮었다.
지켜보던 도산설은 조각상 위에 더 커다란, 허화한 선호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호조의 영임을 단번에 눈치챈 그녀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후배 도산설이 다시 태어난 노조님을 알현합니다.”
도산설이 공손히 말했다.
“조령을 깨우다니, 네 죄를 알렷다?”
허화한 선호가 질책하듯이 말했다.
“불초한 후손의 소행을 용서하십시오. 멸망의 위기에 처한 청구 호족을 구하고자 부득이하게 노조님을 깨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허화한 선호의 미간에서 광망이 뿜어져 나와 도산설의 몸을 뒤덮었다.
깜짝 놀란 도산설은 마치 상대에게 모든 것을 간파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복수를 원하느냐?”
“그렇습니다.”
호족의 존망? 그런 것은 알 바 아니었다. 이전에 호령옥을 찾아다닌 것은 일족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오로지 어머니의 복수만이 그녀를 움직였다.
허화한 선호가 다시 말했다.
“내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겠지만 네 복수를 돕는 것은 가능하다. 복수를 위해 너는 어떤 희생을 할 수 있느냐?”
“무엇이든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도산설의 눈에는 증오의 빛이 가득했다.
“순수한 분노……. 좋은 눈빛이구나. 내가 도와주마.”
허화한 선호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칭찬했다.
“감사합니다.”
“아직 이르다. 네게 묻겠다. 요(妖)란 무엇이냐?”
“요는 마의 한 갈래입니다.”
“그건 와전된 것이다. 요는 야수가 변한 것, 인간과 신에 비해 짐승은 강하지만 또 통제하기 어렵다. 그들의 힘은 순수한 본질과 감정에서 나온다. 생령이 없으면 감정을 초월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힘은 무적이다. 허나 야수들은 이성이 부족해 감정에 사로잡히고 본능대로 움직인다. 모든 야수의 노조는 반고 대신의 모든 감정이 변한 것이다. 수족(獸族)은 순수한 감정의 화신이며, 천지의 영기를 흡수하여 형체를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요족이다.”
도산설은 그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렇게 깊은 연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요가 야수에게서 왔고 그 근원이 반고 대신이니 그 자체에 비길 데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힘은 대다수 요족이 스스로 봉인했거나 전승이 끊겨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힘이라뇨? 그건 감정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래. 그 힘은 바로 강력한 감정의 힘이자 아직도 많이 전승되는, 요족이 반조지력(返祖之力)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부디 그 힘을 제게도 주십시오.”
도산설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이 반조의 전승을 받게 되면 네 이성은 감정에 휩쓸려 서서히 삼켜진다.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동시에 야수의 본질에 점점 가까워져 몸에도 야수의 특징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죽음도 불사하겠습니다!”
도산설은 이미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우리 호족의 감정 본질은 질투다. 이로 인해 생기는 불만족, 탐욕, 증오 등의 감정이다. 감정이 순수할수록 네가 얻는 힘은 더 강해진다. 마찬가지로 네가 자아를 잃어도 더 빨라진다. 정말 원하느냐?”
허화한 선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원합니다!”
도산설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화한 선호의 몸에서 갑자기 붉은 광망이 뿜어져 나와 그녀의 머릿속에 직접 스며들었다.
쾅!
천둥소리가 도산설의 식해에서 울려 퍼졌고,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질투의 감정이 씨앗처럼 가슴속에 박히더니 곧바로 싹을 틔우고 광적으로 자라나 그녀의 이성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로 변했다.
도산설은 고개를 들었다. 고운 목은 달빛에 의해 반짝였지만, 두 눈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뾰족한 귀는 두 배로 커졌다. 몸에는 가느다란 솜털이 빠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자라났다. 단전에 터질 듯한 힘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도산설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하하하! 그래, 바로 이거야! 그래, 이 힘은 우리 모든 호족에게 있으니 다른 이들도 이 힘을 얻게 하는 거야! 하하하! 아하하하!”
도산설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성을 잃고 반쯤 미친 듯 웃어댔다.
그녀는 호조 조각상 앞으로 다가가 손을 올리고는 이상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호조 조각상도 피로 물들더니 암홍색 광망을 뿜어냈다. 이 광망에 제단의 바닥과 돌기둥까지 암홍색으로 변했다.
“자, 함께 반조지력의 전승을 받자!”
그녀가 크게 외쳤다.
산 정상의 제단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붉은 빛줄기가 산을 타고 청구국까지 빠르게 퍼져 갔다.
광망이 지나는 곳마다 장로든 평범한 백성이든 호족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 눈이 붉게 물들고 온몸의 털이 빠르게 자라서 야수처럼 변해갔다. 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의 파동도 빠르게 상승하여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이들은 도산설이 아니었기에 법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한 자들은 반조지력에 짓눌려 이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정신을 잃었다.
한동안 고요했던 청구성이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고, 수많은 반호반인(半狐半人) 요족이 늑대 떼처럼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으며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했다.
* * *
“드디어 시작됐구나!”
청구산 아래 어느 외진 곳.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청구산 정상을 올려다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검은 두건이 가리고 있었지만, 상당히 큰 체구에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경지가 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토둔술을 시전하여 땅속으로 들어갔고, 금방 산속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다.
눈앞의 공간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이 동굴은 수백 장에 이를 정도로 컸고, 천연의 동굴처럼 죽순 같은 괴석들이 즐비했다.
크기가 백 장에 이르는 검은 평대가 동굴 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 같았다. 그 아래 굵은 뿌리는 땅을 깊게 파고들어 땅속 깊은 곳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다.
평평한 그루터기에 가득한 검은색 진문이 복잡한 법진을 이룬 채 웅웅대며 빠르게 돌고 있었다.
유소모주와 두 명의 태을경 호족, 10여 명의 진선 장로 그리고 한 무리의 대승기 호족들이 검은색 법진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미소도 그곳에 있었지만,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침상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동굴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핏빛 옥석을 목에 걸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유소모주가 그루터기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는 양손을 차륜처럼 결인했다. 그녀 앞에도 구미 호조(狐祖)의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외형은 조령 제단에 있던 것과 똑같았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실물이 있음에도 마치 허상 같은 느낌이었다.
유소모주의 술법을 따라 호조 조각상 안에서 뿜어져 나온 허환(虛幻)의 검은빛은 아래의 검은색 법진으로 끊임없이 주입되어 갔다.
검은색 법진은 빠르게 돌면서 호조 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빛을 흡수했고, 검은 빛은 아래의 뿌리를 통해 지맥으로 스며들었다.
실오라기 같은 검은 빛줄기들이 먼 곳으로 흩날렸다. 어디까지 뻗어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우 조각상 가슴에 박혀 있는 검은색 구슬에서는 파도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구슬에서는 어떤 장면이 떠올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검은색 여우가 아홉 개의 꼬리를 흔들며 몇 명의 선인 같은 수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만약 심협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면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장안성 안의 상황이었다.
호조 조각상은 구슬 안의 검은색 여우와 똑같이 눈은 광망으로 반짝였고, 표정도 수시로 바뀌었다. 두 존재는 마치 일심동체 같았다.
“도산설이 호조의 영을 소환했습니다.”
회색 옷의 사내가 나무 그루터기 앞으로 내려와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룡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광망이 산벽을 뚫고 이곳까지 퍼져 모든 호족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목에 걸고 있는 혈옥에서 갑자기 뿜어져 나온 빛이 원형의 혈홍색 광막으로 만들어져 몸을 뒤덮었다.
핏빛 광망이 이 광막과 부딪히자 파도가 암초에 부딪힌 것처럼 옆으로 비껴갔고, 동굴 안의 모든 호족은 광망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
회색 옷의 사내는 혈홍색 광막이 없었으나, 조령의 광망이 몸을 스쳐 지나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좋아!”
유소모주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기합을 지르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그러자 선명한 핏빛 부문이 만들어졌고, 순식간에 호조 조각상의 미간으로 들어갔다.
호조 조각상의 검은 빛이 갑자기 몇 배나 강해지고 점점 끈적끈적해졌지만, 밖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다른 호족들이 발동한 법진도 곧바로 바뀌면서 그루터기 위의 법진이 갑자기 멈추더니 반대로 돌았는데, 그 속도는 이전보다 빨랐다.
그루터기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자 뿌리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가볍게 꿈틀거리고 하늘로 통하는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루터기는 순식간에 거대해져 위쪽은 하늘과 연결되었고, 아래는 저승에 닿았으며, 구주의 대지를 전부 뒤덮었다. 그 끝이 어디까지 뻗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루터기의 뿌리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강력한 흡입력이 발산되자 주위의 천지영기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청구산 아래 지맥도 마찬가지로 모든 영력이 흡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쉬지 않고 멀리까지 흐르던 검은 빛이 역류해 그루터기를 타고 다시 호조 조각상으로 흡수되었다.
* * *
수만 리 너머 장안성. 굉음이 쉬지 않고 울려 퍼지더니 대지가 흔들렸고 하늘이 진동했다. 성안의 격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본래 장안성을 뒤덮었던 사상천시대진은 1할 정도로 축소되어 성 서쪽 작은 구역만 겨우 뒤덮고 있었지만, 대신 한층 두꺼워졌고 사상의 허상도 거의 실체처럼 변해 있었다.
대진 안에는 원천강과 이정, 공동선사, 청련선자가 네 줄기 전광으로 변한 채 거대한 검은색 여우와 네 명의 신비한 인물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대진 안에는 이들 아홉뿐이었다.
태을 경지 이상인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위세에 진 안의 집과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졌으며, 땅에는 어지럽게 교차한 칠흑 같은 균열이 가득했다.
주위에는 사상천시대진이 막고 있었지만, 그들의 공격은 여전히 바깥까지 파급력을 미쳤기에 장안성 서쪽은 절반이나 부서진 상태였다.
장안성 백성들은 성 동쪽에 모여 있었고, 일부는 장안성 밖으로 뛰쳐나와 이 희대의 대전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