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98화 (998/1,214)

998화. 세 개의 호령옥(狐靈玉)

깊은 밤. 적막에 잠긴 청구성에서는 이전과 같은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아름답고 상서롭던 조양곡은 음산했다.

휘영청 뜬 달만이 홀로 외로이 서늘한 빛으로 청구성을 비추는 가운데,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비틀거리며 칠흑처럼 어두운 거리를 지나 호족 제단으로 향했다.

본래 엄중히 감시하던 제단에 오늘은 지키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 그림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가운데 높은 단상까지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새하얀 달빛이 얼굴을 비추자 아련하고도 이색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났지만, 두 눈에는 오직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바로 모친을 잃은 도산설이었다.

그녀가 침입하자 제단 위의 법진이 발동되면서 바닥의 부문이 일제히 번득였고, 불꽃이 치솟아 거대한 화룡으로 변했고, 화령이 그녀를 에워쌌다.

“건방진 후손이로구나. 제단을 침범한 죄를 알고 있으렷다!”

화룡이 커다란 머리를 내밀고 내려다보며 사람의 말로 꾸짖었다.

도산설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들어 화룡과 대치했다.

화룡은 그 모습에 화가 난 것처럼 입에서 뜨거운 기운을 뿜어냈다. 이 열기에 도산설의 옷이 펄럭였고, 머리카락이 흩날렸으며, 두 뺨의 눈물 자국도 말랐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감지하자 슬픔으로 가득했던 도산설의 눈빛에는 점차 원망과 증오가 들어찼다.

화룡은 그녀의 눈빛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점점 땅으로 물러가 사라졌다.

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달도 점점 구름에 가려졌다.

* * *

청구성 대전 밀실에서는 청구 호족 중 살아남은 진선기 이상의 장로가 전부 모여 있었다. 그 수가 무려 20여 명에 이르렀다.

개중에는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항간에는 이미 죽은 게 아니냐는 말이 떠돌던 두 명의 태을 경지 장로도 있었다. 일전에 법진으로 청구국 국주를 감금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정세가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법진을 풀라는 명령을 받고 국주를 놔줬고, 그렇게 그녀를 죽음으로 사죄하게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대장로 유소모주의 지시였다.

“대장로님, 이번에 연합군의 손실이 크니 이제 저들 사문의 장로들이 나설 수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호족 장로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두려울 게 뭐가 있소? 우리가 하는 일은 전부 노조의 뜻이니 노조께서 알아서 이끌어주실 겁니다.”

유소모주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추종자가 그녀 대신 말했다.

“시대의 변화는 이미 조용히 움직이고 있소. 우매한 삼계의 중생들만 모르고 있을 뿐. 인간족과 선족은 마신 치우를 몰아내면서 오랜 번영을 누렸고, 질서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 믿고 있소. 자신들이 삼계의 주인이니 우리더러 영원히 자신들을 섬기라는 게지.”

대전은 조용해졌고, 오직 유소모주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은색 지팡이가 바닥을 찍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직 혼란만이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킬 수 있소. 이번에는 우리 청구 호족은 누구도 섬기지 않을 것이오.”

유소모주가 선언했다.

그녀의 선동적인 말에 본래 청구국 국주를 따르던 몇 명의 장로들도 피가 끓어올랐다.

“대장로님, 우리 청구 일족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흥! 지금의 질서에 불만을 품은 것이 우리 청구 호족뿐인 줄 아시오? 인간족과 선족에게 강제로 굴복한 용족이 정말로 지금 상황에 만족할 것 같냐 말이오!”

유소모주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설마 용족이……?”

질문했던 자는 의아했다. 그의 눈에 인간족과 가장 친밀한 일족이 용족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경하용왕이 일개 범부(凡夫)에게 죽었는데 용족이 불만을 품지 않을 리 있소? 위대한 서해 용왕 태자가 한낱 승려의 탈것이 되어 십만팔천 리를 고행했는데 용족이 굴욕을 못 느꼈겠소? 위대한 동해 용궁 삼태자가 이정의 아들에게 그런 꼴을 당했는데 용족이 원망을 안 품을 것 같소?”

이번에는 소효가 말했다.

“내 이전에 지부에 잠입하여 경하용왕의 잔혼을 찾아내 함께 대당의 용맥을 교란시키고 장안에 난을 일으켰소. 그러니 세상의 눈이 다 청구로 향했지. 목적 없이 그랬겠소? 우리 청구 호족은 모든 문파의 협공을 받고 있으니 다른 요족들이 다음은 자신들 차례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허나 분명 우리의 잘못이 있으니 명분이 저들에게 있다고 본다면……?”

“명분이 무슨 상관이오? 인간족의 기세가 맹렬하여 천 년 넘게 세상 모든 대지는 그들 것이 되었고 우리 요족은 숲이나 산속으로 숨어들었소. 그것도 모자라 몰래 요족을 사냥해 감금하고 가죽과 뼈를 발라내고, 심지어 먹기까지 하고 있으니 복수를 논하자면 우리에게 더 명분이 있지 않겠소?”

소효가 독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도덕군자처럼 약자를 동정하는 척하기를 좋아했소. 우리 국주가 이미 죽음으로 사죄했는데도 저들이 몰아붙여 청구를 멸하려 한다면 다른 요족들, 특히 마족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소?”

유소모주가 매우 담담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저들은 인간족과 선족이 도리를 지키지 않고 권세를 앞세워 약자를 괴롭힌다고 생각할 것이오. 약간의 과장이 섞이면 요족과 마족은 위기감을 느낄 터. 본래도 취약했던 평화는 얼음처럼 녹아내리겠지. 그리되면 천하의 판도가 크게 바뀔 터이니 우리 청구 호족은 그 틈에 일어나면 되오.”

그제야 모두가 유소모주의 말을 이해했다.

“대장로님, 그전에 우리가 인간족과 선족의 분노를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누군가 여전히 걱정되는 듯 물었다.

“그대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으나 그리 걱정할 것 없소. 우리에게도 동맹이 있으니까. 게다가, 잊은 것이오? 우리 청구 호족은 본래 옥호 일족과 달리 환술이 아니라 실제 싸움에 능하지 않소.”

그제야 사람들은 완전히 이해한 듯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견이 많았지만, 이제 그들의 뜻이 모두 하나가 된 것이다.

청구국 국주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모든 문파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권력을 넘겨 유소모주의 야심을 만족시키려고 했던 것이 모두 유소모주의 계략이었으니, 애초에 그녀의 죽음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 *

깊은 밤. 모든 장로가 물러나고, 유소모주는 천천히 대전에서 나와 제단 쪽으로 향했다.

마침 제단 쪽에서 나오다가 유소모주를 마주친 도산설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모친의 죽음이 저 대장로와 관계가 있음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설아, 네가 날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허나 상관없다. 언젠가 너도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옳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유소모주는 도산설의 눈을 피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도산설이 비록 청구국 국주의 딸이긴 하나, 청구 호족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의견만큼은 자신과 매우 비슷함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도산설이 차갑게 말했다

“내일, 나는 네가 청구국 국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호족을 이끌 것이라고 선포할 생각이다. 내 생사도 네 손에 달리게 되는 게지.”

그 말이 매우 의외였는지 도산설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할 것 없다. 상황을 멀리 내다보는 눈은 네가 모친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난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다. 청구 일족의 미래는 네게 맡기마.”

“호령옥(狐靈玉)이 당신에게 있죠? 돌려주세요.”

도산설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며 말했다.

“호령옥은 어디에 쓰려는 거냐?”

유소모주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가 뭘 하려는 건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도산설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묻는 대장로의 태도에 경멸을 느꼈다.

“그 일을 하려면 호령옥 세 개가 다 있어야 한다. 하나는 나에게 있고, 다른 하나는 네 모친에게 있지. 허나 세 번째는 과거 완연(婉姸) 그년과 사통했던 인간족 검객 한강항(韓江航)이 가지고 호족을 떠나서 이미 사라졌다. 내 수년간 찾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지.”

도산설이 손을 내밀자 팔목에 있는 모친의 저물 팔찌에서 광망이 반짝이더니 두 개의 호령옥이 그녀의 손바닥에 나타났다. 그중 하나는 만년화린목으로 심협과 교환한 것이었다.

그녀가 두 개의 화령옥을 꺼내자 유소모주의 눈이 반짝였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정말 하려는 것이냐? 뒷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도산설은 대답 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대장로를 노려봤다.

“그래, 이미 결심한 것이니 나도 더는 말리지 않겠다. 자.”

유소모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막 호령옥을 꺼내 도산설에게 건넸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호령옥이 날아와 다른 두 개와 만났다. 그러자 맑은 소리와 함께 세 개의 호령옥에서 동시에 빛이 흘렀다.

도산설은 말없이 다시 돌아서서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서 유소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호산(護山) 제단에 불과하다. 그 일을 하려면 조령(祖靈) 제단으로 가야 한다.”

도산설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유소모주를 바라봤다.

“조령 제단은 오랫동안 폐쇄돼 일족에서도 알고 있는 자가 많지 않다.”

말을 마친 유소모주는 옥으로 만든 마름모꼴 영패를 던지고는 청구성 뒤쪽의 산을 가리켰다.

도산설은 영패를 받아 들고는 곧장 그 산 정상으로 날아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소모주의 얼굴에서는 희비(喜悲)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내 예상보다 빠르겠군.”

* * *

청구성의 어느 저택. 누군가 소리 없이 담을 넘더니 몸에 빛이 반짝였다. 이어서 빛이 사라지더니 소효의 모습이 나타났다.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 그의 표정이나 행동은 소효와 다름이 없었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순찰병들을 만났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거들먹거리며 성 밖으로 나갔다.

산골짜기 안으로 한참을 들어간 소효의 몸에서 다시 빛이 번득이더니 원래의 모습으로 변했다. 바로 호불귀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산골짜기 깊숙한 곳의 청구성을 바라보더니 몸에서 회색빛을 발하며 곧장 골짜기 밖으로 날아갔다.

* * *

도산설이 도착한 산 정상에는 풀이 무성하고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제단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굳은 얼굴로 유소모주가 준 옥패를 꺼내 발동하려는데, 옥패에서 광망이 번득이더니 곧바로 손에서 벗어나 빛이 되어 어디론가 날아갔다.

도산설은 깜짝 놀라 빛을 쫓아갔는데, 10여 장 정도 날아가자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더니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면서 거대한 하얀색 제단이 나타났다.

제단 주위에는 커다란 백옥 돌기둥이 가득했는데, 기둥마다 복잡한 부문이 새겨져 있었다. 돌기둥 끝에는 모두 만년등(萬年燈)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단 바닥에는 커다란 구미(九尾)의 선호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다.

구미선호는 몸을 굽히고 공격하려는 듯한 자세였는데, 몸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불규칙하게 교차했고, 그 기세는 산에서 내려온 맹호 못지않았다.

제단 바로 뒤쪽에는 벽이 있었고, 거기에도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과거에 호조가 황제와 함께 치우를 토벌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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