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97화 (997/1,214)
  • 997화. 뇌정욕화(雷霆浴火)

    삽시간에 금오와 주작이 날아오르고 순양검광이 교차하자 불꽃 여우 악령은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영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순양비검에 완전히 불타 사라진 귀화 외에 나머지 불꽃은 별빛이 되어 하늘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자연스레 이를 따라 고개를 든 심협은 하늘을 봤는데, 새까만 구름 안에 초록색 빛이 번쩍였다. 그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는 먼 곳의 돌벽 아래를 바라봤다.

    방금 그를 대신에 일격을 맞은 언갑은 이미 박살이 났고, 복부의 부서진 곳에서 상처투성이인 흑려 장로의 몸이 빠져나왔다.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아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협은 쉬지 않고 도망가는 수사들을 쫓아갔는데, 그들은 벌써 조양곡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언 형, 방금은 실로 절묘한 순간에 도움을 받았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심형, 너무 무모하다는 거 아시오? 방금 제때 언갑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심형은 지금쯤 죽었을 것이오.”

    언무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유소모주 등은 직접 나설 것 같지 않으니 뒤쪽은 크게 위험하지 않을 테니 나는 앞쪽을 돕겠소. 언 형은 그대로 뒤를 맡아 주시오. ”

    심협은 가볍게 웃고는 포권했다.

    “한바탕 또 고생해야겠군. 심형도 고생하시오.”

    언무사도 바로 포권으로 답했다.

    심협은 곧장 최전방으로 향했다.

    영롱보탑이 광망을 뿜어내며 거대한 도끼를 든 호령을 아래로 억눌렀고, 강신천의 창은 호령의 거대한 머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호령의 몸이 부서지자 수많은 초록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이를 본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한편, 칠살의 전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매우 강력한 살기를 뿜어내는 형천지역창이 부월을 든 호령을 쓰러트렸다.

    이대로라면 곧 조양곡 입구에 도착할 터였다.

    두 사람의 승리에 연합군 수사들은 고무되어 모두가 법력의 소모를 신경 쓰지 않고 파도처럼 몰려오는 호령 악귀를 상대했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한데 그 순간, 심협은 또다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늘의 먹구름이 점점 낮아졌고, 거기서 숨 막히는 압박감이 감돌았다.

    그는 끊임없이 위로 날아가는 초록색 빛을 보다가 유명귀안을 발동하여 구름 깊은 곳을 살펴보았다.

    그가 하늘을 보는 동시에 먹구름에서 두 줄기의 거대한 초록색 광망이 갑자기 뿜어져 나왔다. 마치 두 줄기의 실제 같은 눈빛이 연합군 전체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안 돼! 더 이상 죽이면 안 돼!”

    무언가를 깨달은 심협이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수사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거의 동시에 칠살이 깔끔한 일격으로 거대한 호령을 죽였다.

    대량의 초록 빛이 하늘로 올라가 짙은 먹구름에 들어가자 무시무시한 기운이 대지를 뒤덮기 시작했다.

    콰쾅!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먹구름에서 두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이어 두 개의 거대한 발톱이 튀어나왔는데, 연합군 수사들을 공격하지 않고 좌우로 날아가 골짜기 입구 양쪽을 잡았다.

    곧이어 거대한 초록색 여우 머리가 먹구름에서 나오더니 크게 벌린 입으로 골짜기를 막았다. 앞길이 완전히 차단됐다.

    “이래서 청구의 늙은 여우들이 나서지 않은 게로군. 우리가 죽인 호령의 잔혼이 저 호령에게 흡수되길 기다린 거였어!”

    육화명이 이를 갈았다.

    “골짜기를 나갈 때쯤이면 우리의 법력은 거의 다 소모되겠지만, 저것은 대량의 호령의 잔혼을 흡수하여 실력이 폭증하였으니 지금 나선 것이오. 당장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소.”

    백소천이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연합군 수사들은 솟아올랐던 사기가 순식간에 무너졌고, 앞을 가로막은 호령의 기운이 태을 중기를 넘어서자 저항할 마음도 완전히 사라졌다.

    “육 도우, 백 도우. 그대들의 사문 어른들은 뭐 하고 있는 것이오?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하시오. 안 그러면 우리는 전멸할 것이오.”

    현화파 장로가 큰소리로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큰소리로 호응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대당 관부와 화생사 같은 종문이 일족을 벌하는 중한 일에 어린 제자 몇 명만 보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형 종문의 장로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제자들이 큰 위기에 빠지면 나와서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령 정말로 숨어 있었다 해도 지금은 올 방법이 없어졌음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육화명은 심협에게서 스승님과 국사가 도우러 올 수 없는 상황임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쉽게 발설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모두들 벌써 의지를 잃은 겁니까?”

    “육 도우, 저게 안 보이시오? 태을 중기의 호령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찌 상대한단 말이오?”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싸울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봐야 알지요.”

    심협이 차갑게 대꾸했다.

    “옳은 말이오.”

    강신천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칠살은 말없이 창을 세운 채 심협 옆에 섰다.

    이번 연합군에서 가장 걸출한 인재들답게 이런 위기일수록 누군가가 대들보 역할을 해주어야만 모두가 투지를 잃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사이 이들은 골짜기 입구까지 백 장 정도 앞두게 됐다.

    거대한 호령의 입에서 갑자기 초록색 불꽃이 타오르더니 불기둥이 되어 곧장 뿜어져 나왔다.

    콰쾅!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고, 초록색 불꽃이 지나는 곳마다 허공이 무너졌다.

    이를 본 이들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다.

    “현화묘법, 진창해!”

    가장 먼저 섭채주가 보타산 제자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보타산 제자들 앞에 푸른 광망이 번득이더니 극한의 기운이 폭증했다. 곧이어 하늘을 찌르는 파도가 일어나 불기둥을 뒤덮었다.

    초록색 불꽃은 용솟음치는 푸른 파도와 충돌하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 초록색 불꽃이 얼음을 깨고 다시 달려들었다.

    “금강호법, 대비장!”

    이어서 불송이 울려 퍼지더니 금강의 손바닥이 거대한 산과 같은 금색 손바닥이 되어 초록색 불꽃 기둥과 충돌했다.

    콰쾅!

    폭음이 울려 퍼졌고, 금색 손바닥이 사분오열되어 사라졌다. 초록색 불꽃은 여전히 달려들었는데, 광망은 많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횡소천군!”

    또다시 외침이 들려왔다.

    육화명이 대당 관부 제자들을 이끌어 어검을 뽑았고, 검광이 곧장 하늘로 올라갔다. 10장 정도 날아간 검광이 순식간에 폭증하더니 수많은 검광이 폭우처럼 떨어지면서 불꽃과 충돌했다.

    폭우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검광이 종횡무진 교차하자 초록색 불꽃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수많은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싸울 의지를 잃은 상황에서도 남은 불꽃을 공격했다.

    하지만 곧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출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머리의 호령이 입을 크게 벌리자 초록색 회오리가 미친 듯이 돌기 시작하면서 강력한 흡입력을 뿜어낸 것이었다.

    그러자 산골짜기 안에 돌들이 날아다니고 광풍이 휘몰아쳤다.

    힘을 내 골짜기 입구로 달리던 연합군은 이 흡입력에서 도망치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이 너무 많았고, 앞 사람에게 막혀 뒤쪽은 혼란에 빠졌다.

    “안 돼!”

    비명과 함께 현화파 제자 한 명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흡입력에 휘말려 순식간에 호령의 커다란 입으로 날아갔고, 회오리에 갈기갈기 찢기더니 신혼조차 빠져나오지 못했다.

    곧이어 성난 포효와 함께 태을 호령의 흡입력이 더 강해졌고, 다시 세 명의 수사가 빨려들어 목숨을 잃었다.

    흡입력은 점점 더 강해져 버티기 힘들 정도였고, 결국 연합군의 대오 전체가 골짜기를 향해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아직 죽기 싫어!”

    “살려줘!”

    “끝났어. 이제 끝이야!”

    혼란 속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이들과 여우 호령의 입까지는 불과 10여 장밖에 되지 않았다. 그 입에 가까워질수록 흡입력은 더욱 강해졌고, 이들의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이번에는 강신천과 칠살 등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여린 몸매의 누군가가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날아와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몸에서 기이한 힘의 파동이 일어나 물결처럼 천천히 퍼져 나갔다.

    모두의 동작이 일순 느려진 것 같았고, 그 안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뇌광을 번쩍이며 여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고생했어.”

    심협은 시간의 무력을 뿜어내는 섭채주를 다독이고는 손을 휘둘렀다. 훼멸명왕 언갑이 앞에 나타나더니 열일전부를 들어 크게 내리쳤다.

    전부에서 작열하는 광망이 폭발하며 태양과 같은 불꽃이 호령의 커다란 입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멸세쌍목에서 보랏빛이 번득이더니 수많은 뇌전이 화염으로 얽힌 호령의 커다란 입으로 날아갔고, 불꽃과 뇌정이 동시에 폭발을 일으켰다.

    꽈르릉!

    뇌정욕화(雷霆浴火)에 하늘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폭발력은 강력한 힘이 되어 사방을 휩쓸었다. 골짜기 입구는 무너졌고, 거대한 호령의 얼굴 반쪽이 부서지면서 흡수 법술도 중단되었다.

    섭채주는 시간 무술(巫術)을 더는 지속하지 못했고, 뿜어져 나오는 파동이 이내 사라졌다.

    거대한 호령이 노발대발하며 커다란 입으로 심협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훼멸명왕이 먼저 날아와 그 일격을 막아냈다.

    이와 동시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현양화마의 몸으로 변한 심협이 치우지박의 두꺼운 팔로 명홍도를 들고는 훼멸명왕의 몸을 밟고 뛰어올라 호령의 머리로 일격을 날렸다.

    초록빛의 좁고 기다란 도광이 번쩍이면서 심협의 남은 힘을 모두 담은 칼이 마침내 떨어졌다.

    영체에 육신도 없는 호령은 도광에 베이자 거대한 몸이 가운데부터 갈라졌고,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부서진 초록빛은 수증기처럼 천지로 흩어졌다.

    조양곡 상공에 있던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다시 나타났다.

    훼멸명왕은 사라졌고, 심협은 높은 하늘에서 떨어져 섭채주의 품에 안겼다.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죽음에서 탈출했다는 기쁨에 이내 격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마침내 조양곡에서 벗어나 진영으로 돌아갔다.

    * * *

    한편, 청구성의 호족 장로들은 만호적멸진이 갑자기 사라지자 경악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선기 수사 무리가 어떻게 만호적멸진을 부술 수 있지?”

    “태을 수사가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대장로님께서 알아채셨겠지요.”

    유소모주는 생각에 잠겨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대장로님, 어찌 됐든 저들은 피해가 심각하니 이 기회에 몰살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효가 이를 갈며 물었다.

    “서두를 것 없네. 저들은 호조(狐祖)의 분노를 감내해야 하는데 전부 죽여버리면 누가 저들을 대신하겠는가?”

    유소모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들이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중소형 문파들이 이번 토벌에 왜 동참했겠는가? 저들은 정의 따위가 아니라 그저 콩고물을 노린 것일세. 한데 이토록 손실이 커졌으니 그게 아까워서라도 더더욱 우리 청구성을 무너트리려 들겠지. 큰 종문이야 체면과 위신 때문에라도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게야. 그러니 이대로 철수하지는 않을 걸세.”

    모두가 그 말을 듣고는 감탄했다.

    * * *

    골짜기 밖 연합군의 진영. 유소모주의 예상대로 논쟁이 오갔고, 그 결과 연합군은 철수하지 않고 원병을 기다려 청구 호족을 멸하기로 했다.

    심협은 상황이 좋지 않아 이 토론에 참여하지 못한 채 섭채주의 도움을 받으며 부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육화명과 백소천 등도 각자의 종문에 소식을 전한 뒤 폐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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