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95화 (995/1,214)
  • 995화. 배상

    청구성, 대전의 밀실.

    “대장로님!”

    장로들은 허공에 떠 있는 광막을 통해 성 밖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산설(塗山雪)도 돌아왔나……?”

    유소모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희가 너무 과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장로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업을 이루는데 어찌 희생이 없겠는가? 불길이 어둠을 밝히려면 장작이 필요한 법이지. 지금까지 죽은 일족의 혈기로는 역대 호령(狐靈)을 깨우기에는 부족했는데 국주의 죽음이 조금의 도움은 됐구나.”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대전은 정적에 잠겼다.

    “우리가 등장할 차례이니 다들 준비해라.”

    유소모주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성 밖. 도설은 청구국 국주의 시체를 안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가 땅에 내려오는 순간, 청구국 국주의 몸이 빠르게 노화하더니 잿더미가 되어 완전히 땅으로 녹아들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저물 팔찌만이 도설의 손에 남았다.

    그녀는 저물 팔찌를 손에 쥔 채, 모친이 눈앞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말랐다.

    심협도 그제야 도설이 청구국 국주의 딸이자 청구국의 정통 도산(塗山) 일족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본명은 도산설이었다.

    그는 다가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당한 변고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네 이놈들! 감히 청구국 국주를 죽음으로 몰아세우다니!”

    그때,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지더니 일고여덟 명이 성에서 튀어나와 성벽에 내려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매서운 눈으로 성 아래의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가운데에는 유소모주가 은색 지팡이를 짚고 서서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녀 옆에는 소효가 서 있었다.

    그들을 본 심협의 마음속에서 분노의 불꽃이 타올랐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유소모주가 이 음흉한 계획의 주동자임을 확신했다. 그녀야말로 죽음으로 사죄해야 할 원흉이었다.

    다만 청구국 국주의 유언과도 같은 당부가 있었기에 더는 싸움을 키우기 싫었던 그는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연합군 모두 말이 없었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청구국 국주가 이미 죽음으로 사죄했으니 그들도 더는 진공할 수 없었다.

    육화명이 한참을 침묵한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청구국 국주가 죽음으로 사죄했으니 장안 호란의 일은 이것으로 결말을 짓겠습니다. 지금부터 대당 관부와 청구 호족은 더는 동맹이 아니나, 원한도 갈등도 없습니다. 청구 호족은 스스로 잘 처리하고 다시는 이런 무도한 짓을 일으키지 않길 바라오.”

    대당 관부가 이렇게 선언했으나 다른 문파는 본래 장안 호란의 명분으로 청구국을 토벌하러 온 것인 만큼 다들 주저했다.

    “청구국 국주가 죽음으로 사죄했다고는 하나 청구 호족 전체가 죽을죄를 면한 것은 아니니 장안성과 모든 문파의 손실을 무시할 수는 없소.”

    연합군의 어느 장로가 소리쳤다.

    “옳소! 청구 호족은 반드시 모든 문파의 손실을 배상해야 하오!”

    바로 누군가 맞장구쳤다.

    뒤이어 청구국에 배상을 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사실 대부분 문파는 장안 호란 때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이 기회에 한몫 단단히 챙기고 싶은 마음에 따라온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배상을 원하는 목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채우자 유소모주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놈들은 배상을 받기 위해서 우리 청구성을 짓밟고 약탈하려는 것이냐?”

    그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자 산골짜기 전체가 흔들렸다.

    연합군 수사들은 가슴이 철렁했고, 슬픔에 빠져 있던 도산설도 깜짝 놀랐다.

    도산설은 고개를 돌려 연합군 수사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쳐갔다. 마치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심협에게서 잠깐 멈췄지만, 이내 옮겨갔다.

    잠시 후, 그녀는 모친의 저물 팔찌를 꽉 쥐고 청구성 안으로 걸어갔다.

    성문 입구에 있던 청구 호족 사람들은 일제히 물러나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가까운 사이였던 장로들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원한으로 가득한 도산설의 눈빛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유소모주는 떠나가는 도산설을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모두 청구성에 있으니 원한다면 가져가 보거라!”

    청구국 국주가 목숨으로 바꾼 평화를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장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청구 호족 사람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우리는 더는 싸우지 않을 것이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소!”

    호족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소모주는 그 목소리들을 무시한 채,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더니 눈을 감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마치 악마가 낮게 읊조리는 듯한 은은한 소리가 산골짜기 안에 울려 퍼졌다.

    휭!

    피비린내 나는 약한 바람이 청구성의 구멍에서 불어와 연합군 수사들을 스쳐갔다.

    심협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육화명에게 경고하려는 순간, 조양곡 땅 전체에서 그윽한 초록빛을 띤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하늘에서도 먹구름이 몰려와 대낮임에도 순식간에 깜깜한 밤이 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산골짜기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나타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아까 죽었던 호족 수사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시체는 이미 불구가 되었고 어떤 것은 머리가 없었으며 어떤 것은 팔이 없었다. 또 어떤 것은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있었다. 형태는 각양각색이나, 그것들은 모두 비척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거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그때였다.

    “흥! 이런 장난질을 치다니!”

    대담한 연합군 수사 하나가 머리 없는 호족 시체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장도가 시체의 가슴을 비스듬히 가르며 지나갔지만, 결국 오른쪽 옆구리에 걸렸다. 그 시체는 머리가 없는데도 장검으로 정확하게 수사의 심장을 찔렀다.

    옆에서 도사 복장의 수사가 앞으로 나가며 손을 휘두르자 화부가 타올랐고, 불꽃이 뿜어져 나가 순식간에 10여 구의 시체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시체들이 고통을 느끼겠는가? 그들은 걸어 다니는 시체답게 불꽃에 그을리면서도 천천히 걸어서 다가왔다.

    칠살이 이를 보고는 차갑게 웃더니 형천지역창을 크게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의 날이 스쳐 지나가자 호족 시체들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터져나갔다.

    칠살의 모습을 본 연합군은 분발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요마든 귀신이든 가루로 만들면 움직일 수 없을 터!

    한데 그때, 산산조각이 난 시체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유혼의 영체(靈體)가 땅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주위를 둘러본 심협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부서진 시체에서 악귀와 호령(狐靈)이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 사방 곳곳에서 도깨비불이 빼곡하게 생겨났는데, 그 안에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많은 유혼이 들어 있었다.

    아직 물러나지 않고 있던 호족 사람들이 경악했고, 그중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건…… 만호적멸진(萬狐寂滅陣)? 대장로, 이 천벌을 받을…….”

    그 말을 듣자 호족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누구도 감히 더 나서서 따지지는 못했다.

    한편, 칠살은 만호적멸진의 이름을 듣는 순간 표정이 변하더니 곧바로 하늘 깊은 곳을 올려다봤다. 짙은 먹구름에서 초록 빛이 번쩍였다.

    이 무렵, 이제 수백 명밖에 남지 않은 연합군의 주위를 수천의 호령과 악귀가 에워쌌다.

    예닐곱 명의 수사가 겁에 질려 하늘로 날아오르자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어서 내려오시오! 하늘로 가서는 안 되오!”

    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 명이 벌써 먹구름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구름 안에서 갑자기 초록색 빛이 번쩍였는데,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비명이 들리더니 곧이어 피가 비처럼 떨어졌다.

    “만호적멸진은 죽어서 아직 환생에 들어가지 못한 호령들을 불러내는 법진이오! 하늘은 이미 망혼들이 봉쇄하고 있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오!”

    칠살이 크게 외쳤다.

    아직 허공을 날고 아직 구름에 들어가지 않은 몇 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밑으로 내려오려 했다. 그러나 먹구름에서 갑자기 등잔만 한 두 개의 초록색 눈동자가 나타나더니 거대한 여우의 발톱이 튀어나왔다. 이 발톱은 그윽한 초록색 불꽃을 뿜어내 세 사람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백 장에 이르는 거대한 여우의 얼굴이 먹구름에서 튀어나오더니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을 중기였다.

    치익…… 치익…….

    조양곡 입구 쪽에서 무언가 무거운 물체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사람 몸에 여우 얼굴을 한, 백 장 크기의 악령 두 마리가 보였다. 둘 다 몸에는 영체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는 거대한 청동 도끼를, 다른 하나는 거대한 노란색 부월(斧鉞)을 끌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갑옷을 걸친 수많은 호족 악령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마치 원고 시대의 전장에서 달려오는 대군 같았다. 야만과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압박해왔다.

    연합군은 그제야 이 전쟁이 철저히 계획된 것임을 깨달았고, 아까 배상을 외치던 자들은 이제는 도망갈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태을 호령에게 봉쇄되었고 땅 아래에서는 호족 악령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누구도 감히 도망치려 하지 못했다.

    강신천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손을 휘둘러 영롱보탑을 다시 꺼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보탑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금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보탑에서 뿜어져 나온 금색 불꽃이 호령 대군에 떨어지자 순식간에 백여 마리의 악령이 휩쓸렸다. 타오르는 불꽃에서 여우의 비명이 울리며 악령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래봐야 악령들에 불과하거늘,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강신천이 차갑게 비웃었다.

    이를 본 연합군 수사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불문보도, 대자주(佛門普渡, 大慈呪)!”

    수십 명의 화생사 제자가 앞으로 나와 일제히 가부좌를 틀고는 본문 공법을 운공하며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하, 망령을 제도(濟度)하는 건 우리 전문이지.”

    백소천이 상황에 맞지 않게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십 명의 화생사 제자들의 몸에서 밝은 불광(佛光)이 뿜어져 나왔고, 그들의 읊조림은 경문의 글자로 변하여 날아갔다. 그들 앞에 만들어진 부문의 벽이 호령 대군을 밀고 나갔다.

    부문 벽이 지나는 곳마다 호령 악귀가 원하지 않는 제도를 당하는 것처럼 길게 포효하며 사라졌고, 나머지는 초록색 귀화를 뿜어내 부문의 저항했다.

    “불문보도, 대비주(佛門普渡, 大悲呪)!”

    이를 본 백소천이 고개를 젓고는 외쳤다. 그러자 화생사 제자들의 읊조림이 갑자기 변했고, 경문이 쌓여서 만들어진 금색 벽이 거대한 불문의 문자로 변하여 찬란한 광망을 뿜어냈다.

    금빛이 비치는 곳마다 뜨거운 햇살이 쌓인 눈을 비춘 것처럼 수백의 호령 악귀가 일제히 녹아내렸다.

    다른 문파 제자들도 투지가 불타올라 힘을 합쳐 호령 악귀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일순간 산골짜기에는 다시 싸우고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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