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94화 (994/1,214)

994화. 질문

심협은 서둘러 일어나 성안을 바라봤다.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황급히 성에서 날아왔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머리에는 독특한 수정 왕관을 쓰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온화한 기품을 뿜어내는 청구국 국주였다.

그녀의 눈에는 의아함과 애석함이 가득했다.

연합군 수사들은 소란 속에서 간신히 다시 일어나더니 진형을 가다듬었고, 불길이 일 것 같은 눈으로 청구국 국주를 노려봤다.

청구국 국주는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와 홀로 성문 밖에 서서 연합군을 마주했다.

그녀의 뒤로는 청구 호족의 시체가 가득했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

살아남은 청구 호족 수사들은 마침내 국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무너진 성문 안으로 몸을 숨겼으나 누구도 그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청구 호족 장로가 그녀에게로 가려 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막았다.

“흥! 지금까지 뭐 하고 있다가 이제야 나온 거야? 태을 경지의 국주가 어린 후배들에게 겁먹고 얼굴도 내밀지 못하다니……. 진즉 나왔으면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거 아냐!”

그 장로가 이를 갈며 말했다.

“국주님은…….”

올라가려던 장로가 국주를 대신해 변명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도 국주가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소효 장로가 함께였다면 이렇게 많은 일족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땅에 가득한 시체를 보며 그도 걸음을 멈췄다.

이런 생각을 가진 호족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국주를 경외가 아닌 의심과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청구국 국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기 뒤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너무 늦게 왔다는 것도…….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새벽부터 대장로 유소모주가 회의를 연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속여 밀실로 유인했고, 그대로 법진에 감금되어 있었다.

방금 그 강력하던 법진이 갑자기 약해진 덕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도착해보니 이미 이런 상황이었다.

“모두들, 전쟁을 멈추고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청구국 국주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태을 수사 특유의 위압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간절함만이 가득했다.

“국주, 지금 와서 무슨 말씀을 하시겠다는 게요?”

육화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청구국은 모든 문파와 원수가 되었고, 어떤 말로도 해결될 수 없을 터였다.

“저들은 입만 열면 다 거짓이니 들을 것도 없다. 청구를 무너트리고 호족을 멸하자!”

연합군 중 누군가 소리쳤다.

“쳐라!”

“다 죽여!”

연합군 수사들은 힘차게 함성을 질렀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상대는 태을 경지, 그것도 최소한 중기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아까 보인 수단만 보더라도 감히 쳐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 소우, 모두가 제 말을 들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청구국 국주가 심협을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는 본래 장안성의 호란이 왜 일어났는지 청구국 국주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국주가 나왔으니 잠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어떻습니까?”

연합군에서는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심협이 단칼에 소효를 베고 성 절반을 무너트렸던 모습이 떠올라 입 밖까지 나왔던 말을 그대로 삼켜야 했다.

아무런 반박도 없자 심협이 육화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국주께서는 말해 보시오.”

육화명이 말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전의 장안 호란은 아마도 청구 호족 사람의 소행일 것입니다.”

청구국 국주의 첫마디에 연합군과 청구 호족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청구국 국주가 호족을 위해 변명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잘못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청구국이 사라져도 억울하지 않겠군요?”

육화명이 싸늘하게 물었다.

“청구 호족에게 죄가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일족 모두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자들이 있을 뿐이지요. 허나 그들도 청구국 백성이자 우리 일족인바, 청구국 국주로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청구국 국주의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럼 국주께 묻겠소. 그대들 호족은 어찌하여 천 리나 떨어진 천기성까지 와서 우리 성의 반역자들과 합세하고 우리 장로와 제자들을 죽인 것이오?”

이어서 언무사는 숨이 간신히 붙어 있는 유려 장로와 감금된 흑려 장로를 발치로 내던졌다.

청구국 국주는 두 사람을 보고는 다시 의아한 기색이 되더니 몸을 돌려 청구성 안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겹겹의 건물을 뚫고 대장로 유소모주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렸고, 표정도 다시 침착해졌다. 청구 호족이 뒤에서 저지른 일을 그녀가 알고 있었든 알지 못했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청구 호족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대들의 복수심을 이해합니다. 허나 우리 청구 호족이 과거 치우에 대항하여 피땀을 흘린 공로를, 여러분과 동맹을 맺고 배수진을 펼친 것을 기억하셔서 부디 청구 호족을 멸하는 것만은 멈춰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가 천천히 산골짜기에 울려 퍼져 흰 구름까지 뚫고 지나갔다. 마치 눈앞에 있는 연합군뿐만 아니라 제자들 뒤에 있는 장문과 청구 호족 장로들에게까지 말하는 것 같았다.

태을 초기 원만 경지인 그녀와 또 다른 태을경 장로들의 힘이라면 이곳에 있는 연합군 제자들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내고 심지어 모두를 영원히 조양곡에 잠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게 되면 청구국은 영원히 삼계와 대립하게 될 것이고, 모든 문파들의 격렬한 복수심에 청구 호족의 앞에는 멸망만이 남게 될 것이다.

“청구국 사람들은 소중하고 장안 백성과 천기성 제자들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오? 그들의 생명은 누가, 어떻게 보상한단 말이오?”

육화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청구국 국주인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청구국 국주의 말은 담담했고, 표정도 평온했다. 마치 남의 생사를 논하는 것 같았다.

이 대답을 듣자 모두가 당황했다.

“국주님, 모든 것이 죽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이 일은 청구 호족의 운명과 관련된 일인데 어찌 대장로인 유소모주는 안 보이는 겁니까?”

심협의 우렁찬 목소리에 신혼의 힘까지 더해져 청구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뒤에서 청구국 국주를 욕하고 원망하던 청구 호족들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대장로인 유소모주는 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국주께서 죽음으로 사죄하겠다니, 설마 지금까지 나오지 못했던 것이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던 건가?”

누군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대장로는 지금까지 우리 청구 호족이 장안의 호란에 참가한 적이 없다고 했고, 다른 호족이 우리의 보물을 탐내 꾸민 일이라고 했지.”

“우리는 목숨 걸고 싸웠고 국주님은 스스로를 희생해 전쟁을 막겠다는데 왜 대장로는 안 보이는 거지?”

“맞아, 대장로는 나와서 해명하라!”

다른 청구 호족 장로가 큰소리로 외치자 주위의 장로들도 서로 마주 보더니 일제히 소리쳤다.

“대장로는 나와서 해명하라!”

“대장로는 나와서 해명하라!”

한순간에 성문에 모여 있던 청구 호족들은 일제히 소리쳤고 그 목소리는 일파만파로 청구성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기다려봐도 아무런 대답도, 나타나는 사람도 없었다. 대장로 유소모주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청구국 국주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쓰게 웃으며 심협을 바라봤다.

“심 도우, 모든 것을 진즉 사실대로 터놓지 못한 제 탓입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는 되돌릴 힘이 없군요. 대장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 불길을 막기 위해 저를 미끼로 던졌죠. 제 목숨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내가 죽은후 그대가 연합군의 공격을 멈춰줄 수 있습니까?”

머릿속으로 청구국 국주의 전음이 들려오자 심협은 가슴이 아려왔다.

“국주님, 제가 저들을 설득해 장안성에서 사죄받을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전쟁을 멈추는 건 어떻습니까?”

“소용없습니다. 제가 장안으로 간다면 대장로는 더 많은 습격을 계획하여 불길은 더욱 거세질 겁니다. 제 죽음으로 모든 문파의 분노를 잠재우고, 대장로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고 마무리 지어야지요. 청구국을 손에 넣으면 대장로도 일족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위험한 유희(遊戲)를 계속하지는 않을 겁니다.”

“도대체 대장로는 무엇을 위해 이러는 겁니까? 고작 대권을 빼앗으려고 이런 짓을 벌이고 국주님을 죽음으로 내몬단 말입니까?”

“권모술수로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으니 저도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지금 제가 청구 호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목숨을 바치는 것뿐입니다.”

말을 마친 청구국 국주의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이때, 그녀 뒤에서 조용히 발소리가 들려왔다. 청구국 호족 사람들이 그녀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연합군 수사들은 이를 보고는 갑자기 경각심이 들어서 일제히 무기를 들고 경계했다.

“모두 다가오지 마세요!”

청구국 국주가 소리치자 모든 청구 호족이 걸음을 멈췄다.

“국주님…….”

청구국 국주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휘둘러 장벽을 만들어 그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오늘, 청구국 국주로서 스스로 자진하겠습니다. 부디 이것으로 청구국을 향한 원망을 접고 조양곡에서 물러가 주시기 바랍니다.”

청구국 국주가 하늘 높이 올라가며 말했다.

연합군 수사들도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도 뭐라고 못했다.

한 나라의 국주이자 일족의 수장이 스스로 죽음으로 사죄하겠다는데 그들이 무슨 명분으로 계속 공격하겠는가?

게다가 육화명과 백소천은 본래 일족을 멸할 뜻이 없었기에 지금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선배님!”

심협이 더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청구국 국주는 환하게 웃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유소모주, 앞으로 청구 호족의 모든 권한을 당신에게 일임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라를 멸하고 종족을 멸족으로 이끈다면 내 혼이 다시 돌아와 그대를 벌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청구국 국주의 머리 위에 새하얀 불꽃이 나타났다. 육체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신혼은 스스로 타버려 점점 허무로 돌아갔다.

“안 돼! 어머니, 안 돼요!”

쉰 목소리가 골짜기 밖에서 울부짖더니 누군가가 청구국 국주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연합군 수사들 몇몇이 이를 보고 공격하려 했다.

“도설? 모두 멈추시오!”

심협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바로 제지했다.

도설은 빠르게 날아가 허공에서 이미 혼이 사라진 청구국 국주를 받았고, 한 손으로 머리 위를 누르며 법력을 모아 삼총연혼(三叢燃魂)의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불꽃에 손이 닿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고, 그녀의 옥처럼 고운 손이 바로 불꽃에 타들어 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법력을 주입해 불꽃을 끄려 했다.

하지만 태을 경지 수사의 불꽃을 진선기 수사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지만, 청구국 국주 머리 위의 불꽃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가슴 찢어질 듯한 그녀의 울부짖음에 사람들은 가슴이 아팠다.

품 안의 모친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마지막 힘을 빌려 딸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들었지만, 끝까지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손이 떨어졌다.

청구국 국주가 세상을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