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화. 완강히 부인하다
심협이 돌아오자 백소천 등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갑자기 진선 후기로 돌파한 건가? 어서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백소천이 가장 먼저 따지기 시작했다.
이 말에 심협은 곤란해져 곁눈질로 섭채주를 바라봤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섭채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졌다. 보타산의 비전 쌍수법 덕분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심형은 천기성에 있을 때 스승님의 비전 지도를 받았고, 또 천기성의 비경에서 수련하면서 기연을 얻었지요. 그러니 심형을 난감하게 하지 맙시다.”
언무사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는 심협이 천언궁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 하는 것으로 생각해 대신 나서서 해명한 것이다.
“고인의 지도라…… 뭐, 심형의 경지가 정진한 건 우리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 아니겠소? 첫 전투가 승리로 끝났으니 모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전진합시다.”
육화명은 심협의 표정에서 그게 아님을 단번에 알아챘지만, 애초에 진짜로 따지고 들 생각은 아니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연합군은 잠시 쉬면서 정양한 뒤, 다시 청구국을 향해 출발했다.
* * *
청구국 성안의 밀실.
“뭐라고? 소천 장로가 벌써 죽었다니!”
검은 옷을 입은 범상치 않은 용모의 여자 수사가 은색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며 외쳤다. 많이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적군 중에 진선 후기 수사가 있는데 수단이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자와 다른 자들이 연합하여 소천 장로님을 죽였습니다.”
한 호족 장로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검은 옷의 여자는 바로 청구국 대장로 유소모주였다.
“됐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다 계획된 것이니 상관없다. 아, 정말로 태을 수사는 없는 것인가?”
유소모주가 잠시 중얼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예, 법반(法盤)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 진선 후기 수사가 저들 중 가장 강한 자였습니다.”
호족 장로가 빛나는 법반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어린 것들만 보내서 우리 청구국을 공격하게 하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매부리코의 장로가 물었다.
“소효 장로, 정말로 모르겠는가? 우리를 칼 가는 돌 정도로 본 게지. 다음 세대 수사들을 단련시킬 겸 그들을 먼저 보내 탐색하려는 게야. 허나 저 어린 것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면 늙은것들이 나서겠지. 물론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유소모주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난리를 피웠는데 왜 그렇게 돌고 도는 걸까요?”
소효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흥! 인간족과 선족은 본래 위선적이오. 삼계의 정도를 걷고 있다고 자부하고 일 처리가 공명정대하다고 하지만, 실은 모두 위선적인 소인배에 불과하지. 어쩌면 마족보다 더한 자들일 거요. 그들이 저리 위선을 떤다면 우리도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겠지.”
“굴러들어온 떡은 먹어주는 게 예의죠.”
소효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받자 대전에 모인 일고여덟 명의 호족 장로도 따라서 웃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청구 호족 장로회의에 청구국 국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조양곡 안.
연합군은 몇차례 더 청구 호족의 습격을 받았지만, 이전만큼 격렬한 전투는 아니라서 약간의 피해를 본 정도였고, 이들은 계속해서 전진해 산골짜기 깊숙한 곳의 웅장한 왕성 앞에 도착했다.
성 밖에는 피난을 온 호족들의 간이 장막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으나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곳곳에 상자와 집기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것이 마치 방금 난리를 치른 것 같았다.
청구성이 눈앞에 보이자 연합군은 흥분했다. 오는 내내 연달아 이뤄낸 승리가 그들을 더욱 흥분시켜 이들은 마치 천 년 넘게 이곳에 세워져 있던 호족의 성을 이미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여겼다.
“청구국 국주는 어서 모습을 보이시오!”
육화명의 목소리가 종처럼 산골짜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성벽 위의 호족 수사는 숫자가 적지 않았고 모두가 원한 가득한 눈으로 침공해 온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몇몇 호족 장로도 있었는데, 이들의 눈에는 침울함이 가득했다.
“흑려(黑黎) 장로, 국주님은 도대체 어디 가셨길래 며칠째 통 보이지 않는 것이오?”
은발이 무성한 노파가 자색 지팡이를 짚은 채 수심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그 옆에는 외모가 준수하고 짧은 수염을 기른 흑의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연합군 중 천기성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휴, 청구국의 천 년 전승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노파가 한숨을 쉬었다.
“끝나다니! 누가 그런 망언을 하는가!”
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이 돌아보니 키가 큰 매부리코 장로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표정에서는 걱정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매서운 살의뿐이었다.
“소효 장로님.”
모두가 그를 보고는 일제히 엄숙한 표정으로 예를 올렸다.
“국주님이 없으면 집도 못 지키는 것이냐?”
소효가 그들 가운데로 와 서더니 차갑게 말했다.
“장로님이 오셨으니 당연히 문제없지요.”
나머지 장로들은 경지가 높아봐야 진선 후기였기에 태을 초기의 소효 장로에게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잊지 마라. 여기는 청구국, 우리의 기반이다. 저들의 방자함을 지켜보기만 할 것이냐?”
소효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꾸짖었다.
“청구국에는 주인도 없는가?”
육화명이 다시 소리쳤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감히 어디 앞이라고 짖어대는 것이냐! 네놈들 집안의 어른이나 모셔오너라.”
소효가 차갑게 비웃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마치 목숨을 빼앗는 악마의 목소리처럼 강하게 용솟음치며 널리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지나가는 곳마다 각 문파 제자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을 호소했다.
이를 본 심협이 신혼의 힘을 펼쳐 사방을 휩쓸자 아무 소리도 없이 그 악마 같은 목소리와 충돌해 서로 빠르게 상쇄되었다.
소효는 자신의 신혼 공격이 막히자 의아한 표정으로 심협을 돌아보고는 속으로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저 애송이의 신혼의 힘이 나와 막상막하라는 건가?’
만약 심협이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면 소효는 또 얼마나 놀랄 것인가.
“청구 호족은 장안성을 공격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각 문파에 화를 미쳤소. 우리는 청구국에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정의를 따지러 온 것뿐인데 어찌 문중의 어른들을 귀찮게 하겠소? 설마 청구국에서는 정의라는 것이 배분에 따라 바뀌는 것이오?”
“우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그래서 증거는 어디 있느냐?”
소효가 비웃으며 물었다.
“당시 천호의 허상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모든 문파가 봤으니 이것이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소?”
“천호의 허상이라…… 껄껄! 그 허상이 우리 청구 일족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느냐? 어째서 적뇌산 옥호 일족이 아니고? 증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천호의 허상이 증거가 안 된다면 이건 어떠시오?”
육화명이 차갑게 내뱉으며 손을 휘두르자 손바닥에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이 나타났다. 구슬에 빛이 흐르더니 허공에 거대한 두루마리 그림이 나타났다.
그림에 사람 모습이 나타났는데 바로 연화대회 직후 호족이 두 번째로 장안을 공격했던 화면이었다. 그곳에는 청구 호족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연화대회의 일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흠천감이 영상을 남기지 못했으나 그 후의 공격은 뭐라 말할 것이오? 이래도 청구 호족 소행이 아니라고 할 것이오?”
육화명이 큰소리로 물었다.
“저런 자들과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 죽여버립시다!”
연합군 중 누군가 소리쳤다.
“쳐들어가서 호족을 멸하자!”
누군가 맞장구쳤다.
순식간에 환호성이 파도처럼 퍼졌고 연합군은 기세를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모두들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우리는 저들을 죽여 복수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정의를 밝히기 위해 왔소! 함부로 움직이거나 공격하는 자는 법대로 처리할 것이오!”
육화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연합군은 조금 안정됐지만, 여전히 여기저기서 당장 공격하자는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우리 천기성도 빚이 있으니 청구 호족에게 따져야겠소!”
언무사가 불쑥 외쳤다.
“오? 천기성? 우리가 천기성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게냐?”
소효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천기성 사람들을 바라봤다. 눈에서 석연치 않은 빛이 번득였다.
“며칠 전, 너희 청구 호족들이 천기성 반역자 무리와 함께 천기성을 공격하여 많은 제자와 장로들이 죽고 오대 장로 중 한 분인 만벽 장로님까지 시해했다. 그래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이냐?”
이어서 그는 상처투성이인 유려 장로를 걷어찼다.
소효는 유려 장로를 봤지만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몸의 기운도 이미 매우 미약해서 유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못 알아볼 뻔했다.
“유려!”
뒤에 서 있던 흑려의 외침이 그녀의 신분을 확인해줬다. 본래 부인하려던 소효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저 멍청한 흑려가 일을 다 망치는군!’
그는 유소모주가 유려 장로에게 임무를 맡겼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가 천기성에는 왜, 무엇을 하러 갔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네 이놈들! 감히 우리 청구국 장로를 억류하고 모욕을 주다니, 파렴치하기 짝이 없구나! 당장 유려 장로를 돌려주지 못할까!”
소효가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꾸짖었다.
언무사는 파렴치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미 죽은 만벽 장로가 생각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냐, 청구국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더는 예의를 차리지 않겠다. 오늘 청구성을 넘어 너희 호족을 모조리 멸하리라!”
그는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암홍색 금속 공을 꺼내 던지려 했다.
이를 본 심협이 서둘러 그의 손목을 잡았다.
“심협, 이게 무슨 짓이오!”
이미 분노가 폭발한 언무사는 심협에게 따지듯 물었다.
“언 도우, 적의 손에 놀아났소.”
심협은 재빨리 부주진신법을 운공하여 강력한 신식의 힘을 펼쳤다.
언무사는 미간을 찌르는 고통이 느껴지더니 곧바로 눈빛이 멍해졌다. 머릿속에서 솟아오르던 알 수 없는 분노가 순식간에 식으면서 일순 가슴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형,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요?”
“저 소효라는 자가 신혼 공격을 사용했던 것은 환술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소. 계속해서 말을 한 것도 우리의 감정을 조종하여 분노를 자극하기 위함이었지.”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감정을 조종한다니, 그것도 환술이오?”
“환술이 눈속임만 있는 것이 아니오. 환술은 오감뿐만 아니라 감정과 기억을 조종하는 경우가 더 많소. 저들 호족이 가장 잘하는 환술이기도 하지.”
심협의 설명에 언무사는 뒤늦게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연합군 대부분이 영향을 받아서 당장 공격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더는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송풍관의 노도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성문을 향해 휘둘렀다.
소나무 무늬의 고검(古劍)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더니 푸른 빛의 물결을 일렁이며 빠르게 거대해져 쏜살같이 날아갔다.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으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거대한 송문(松紋) 고검이 청구성의 성문에 닿는 순간, 예상했던 충돌음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허광(虛光)이 번쩍였다. 이어서 고검은 늪에 빠진 것처럼 사라졌다.
송풍관의 노도는 이 광경을 보고는 재빨리 고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고검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