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88화 (988/1,214)
  • 988화. 청구로 향하다

    빼곡한 귀물과 요마가 흑암에서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달려들었다.

    표정이 돌변한 심협은 현황일기곤을 꺼냈고, 열여섯 자루의 순양검이 주위에 나타나 바로 달려들려고 했다.

    한데 갑자기 하얀 빛이 눈 앞을 가렸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장안성 밖이었다.

    그의 주위 허공에서도 연달아 빛이 번쩍이더니 한 명씩 나타났는데, 모두 보타산과 천기성의 제자들이었다. 섭채주와 언무사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순간, 눈앞의 허공에 하얀 빛이 일렁이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바로 원천강이었다.

    “국사님, 어째서 저희를 밖으로 내보내신 겁니까? 저희도 함께 요마들을 막겠습니다!”

    심협이 바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안성의 일은 자네들 같은 어린 친구들이 나설 곳이 아니니 서둘러 청구산으로 가서 그쪽 일을 처리해주게.”

    원천강의 담담한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검은 여우가 저렇게 많은 요마와 귀물을 소환한 지금, 상황은 저번보다 더 좋지 않다. 당연히 하나라도 더 도울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국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언무사가 공수하며 물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그곳에 가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걸세. 기억하게. 모든 문파가 더는 청구산으로 지원을 보낼 수 없으니 자네들만으로 청구산 일을 해결해야 하네.”

    말을 마친 원천강의 모습이 사라졌고, 젊은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어쩌죠?”

    섭채주가 장안성을 바라보며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련선자가 아직 성에 있다. 청련선자는 그녀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니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사상천시대진이 성안의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있어서 밖에서는 안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원 국사님의 점술 신통은 신묘하니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보셨을 거야. 지금 이런 안배도 분명히 깊은 뜻이 있을 터. 그분 뜻대로 청구산으로 가자.”

    “심형 말이 옳습니다.”

    언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섭채주는 여전히 장안성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채주야, 청련 선배님은 무사하실 거야. 그분을 감히 어찌할 자가 누가 있겠어? 게다가 이 천왕과 공동선사, 원 국사도 계시잖아. 원 국사님은 성안의 요마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으니 이리 안배하신 게 분명해. 그러니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꾸나. 지체할수록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어.”

    “알겠어요. 어서 청구산으로 가요.”

    심협의 말에 섭채주도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언무사의 비주를 몰아 함께 청구산으로 향했다.

    * * *

    이틀 뒤.

    언무사 등이 조종하는 비주가 조양곡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 10여 개의 둔광이 빠르게 날아와 그들을 막아섰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었는데, 복장이 모두 다른 것을 보니 서로 다른 종문인 것 같았다.

    “전쟁터와 가까우니 아무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소.”

    대당 관부 내문 제자 복장을 한 자가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심협과 일행은 비주 안에서 나와 뱃머리에 올랐다.

    “우리는 천기성과 보타산 제자로, 청구국을 토벌하기 위해 왔소.”

    언무사가 대표로 외쳤다.

    한데 선두에 선 자가 그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혹시 심 선배입니까?”

    “심 선배가 심협을 말하는 거라며, 그렇소. 내가 심협이오.”

    심협은 포권하며 대답했다.

    “같은 편이다.”

    선두의 수사가 바로 손을 휘두르자 모두가 비켜서서 비주에 길을 터주었다.

    비주는 천천히 골짜기 입구 쪽으로 내려갔다.

    조양곡 밖은 이미 깃발이 펄럭였고, 병영이 갖추어져 있었다. 마치 대당 군대 같았다.

    비주가 내려온 뒤, 심협 등이 유려 장로를 데리고 중군의 커다란 막사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문파를 책임지는 자가 무단이탈이라니, 이 무슨 체통이란 말입니까?”

    심협은 이어서 들려오는 몇 사람의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낯익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골짜기로 가서 정보를 알아보고 돌아온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대오를 잘 이끌고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백소천이었다.

    “자, 그만들 싸웁시다. 그래도 이번에 아무런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산골짜기 안에는 적어도 여섯 개의 법진이 펼쳐져 있으니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육화명의 목소리에 이어서 심협 등이 들어가기 전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막사에서 들려 왔다.

    “하하하! 도우들, 밖에서 듣고만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소?”

    심협 등은 경지를 진선 초기 정도로만 드러냈다.

    막사에 들어가자 분노가 아직 식지 않은 칠살과 웃고 있는 강신천이 눈에 들어왔다.

    “심협,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닌 겐가? 청구국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붙잡혀 있는 줄 알고 지금까지 강공(强攻)도 못 했잖나!”

    백소천은 심협을 보자마자 부채를 탁 접고는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보아하니 한참 즐겁게 지내다 온 것 같은데?”

    육화명이 심협 옆에 선 섭채주를 보고는 농을 던지자 막사 안의 긴장된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무슨 소리들 하는 거요? 진즉 청구국을 나와서 천기성으로 갔었는데 두 사람이 어디 숨었는지 못 찾아서 천기성 언 도우와 보타산의 섭 도우와 함께 온 것 아니오?”

    심협이 웃으며 대꾸했다.

    말을 마친 그가 막사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니 적지 않은 중소형 문파 제자들뿐이었다. 대종문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방촌산은 여전히 정비 중이고 신목림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용궁은 또 변고를 겪었으니 이번 일에 참여하기 힘들 터였다. 허나 반사동은 장안의 난을 직접 겪었는데도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다.

    “강 도우, 칠살 도우. 각 문파의 대표들을 불러줄 수 있습니까? 모두와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심협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신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사로 나갔고, 칠살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뒤를 따랐다.

    잠시 후 10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일찍이 연화대회에서 본 적이 있는 중소형 종문 장문인과 장로들이었다.

    “여러분, 청구 호족에 대한 공격을 잠시 보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에 모든 사람이 의아해했다. 갑자기 조용해졌고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도우가 방촌산 수사이고 연화대회의 소란 때도 힘을 보탠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번에 청구 호족과 가장 큰 마찰이 있었던 것은 대당 관부인데 어찌 그대가 함부로 나서는 겁니까?”

    송풍관(松風觀)의 노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따졌다.

    “그대가 물러나라고 하면 물러나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대당을 지원하러 온 게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게요?”

    “청구국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그리 쉽게 물러나라고 못 하겠지.”

    연이어 불만과 비아냥이 터져 나오자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듯했다.

    “대당 관부가 이번 일의 주도자이니 육 도우가 말씀해 보시죠.”

    누군가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육화명에게 향했다.

    육화명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심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로 장안 백성들의 피해가 심각하고 대당 관부와 우령위의 피해가 상당하니 절대 이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오해가 있군요. 저는 청구 호족의 문책을 그만두자는 게 아니라 먼저 청구국의 왕과 만나서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겁니다.”

    “심형, 아직 모르나 본데……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본래는 저들과 교섭하기 위함이었소. 한데 저들은 겉으로는 사자를 보내 우리와 교섭하기로 해놓고 뒤로는 사람을 보내서 암살을 시도했소. 나와 백소천 도우, 칠살 도우는 모두 습격을 받았지. 용양산(龍陽山)의 조(趙) 장로님과 수연문(水淵門)의 임(林) 장로님은 그 습격에서 무사하지 못했소.”

    “흥! 임 장로님의 복수를 하기 전까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수연문의 다른 장로가 화를 냈다.

    “대당 관부가 설령 마음을 바꾸어 돌아간다 해도 우리 용양산은 반드시 저들과 끝장을 볼 것입니다.”

    수염이 가득한 용양산의 남자가 소리쳤다.

    “그 사자는요? 청구국의 국주와는 대화를 해보셨습니까?”

    심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인파를 헤집고 나오며 심협에게 화를 냈다.

    “대화? 이걸 말하는 거요?”

    뒤이어 그가 옷을 풀어헤치자 가슴에 지렁이처럼 시커먼 상처가 보였다. 그 안에는 검은 실이 뒤엉켜 있었다.

    “노(盧) 장로님은 그래도 운이 좋았소. 그 사자는 독을 연마한 자였는데, 자폭을 하면서 주위의 10여 명이 당했고 살아남은 건 노 장로님뿐이오. 허나 체내의 남은 독을 모두 제거할 수가 없었지.”

    심협은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더욱이 청구 호족의 야비한 수단과 그들이 벌인 일을 직접 듣게 되자 심협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린 여우 미소를 생각하자 또 망설여졌다. 더욱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청구국이 왕은 분명 싸움을 원치 않았다. 한데 왜 그런 사자를 보냈단 말인가? 그녀는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허튼소리는 그만합시다. 이번 일의 주도자는 그대가 아니니 우리도 그대의 명을 따르지 않겠소. 청구국 호족은 죄 없는 이들을 많이도 죽였소. 하루빨리 공격해서 모두 쓸어버립시다!”

    “옳소! 모두 죽여야 합니다.”

    “오늘은 태양이 내리쬐고 있으니 때가 좋습니다. 청구 호족을 멸하러 갑시다!”

    한순간에 막사 안은 떠들썩한 목소리와 살기로 차올랐다.

    “전쟁이 일어나면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겁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제가 청구국으로 가서 국주를 만나보겠습니다. 이후 다시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될 말이네.”

    백소천이 바로 잘라 말했다.

    “그건 나도 동의할 수 없소. 심형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나와 백형이 몰래 조양곡에 잠입했다가 하마터면 못 나올 뻔했소. 안의 상황은 정말로 보통이 아니니 절대 심형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 없지.”

    육화명도 반대했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청구 호족은 장안뿐 아니라 천기성을 공격했고 방촌산의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이 모든 일에 어떤 배후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네 말은……?”

    이 말에 백소천이 머뭇거리다가 되물었다.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오. 배후에 치우의 그림자가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소.”

    심협이 연이어 전음을 보냈다.

    육화명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국사와 스승 정교금이 했던 당부가 떠올라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들자 중군의 커다란 막사 안에서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육화명은 그제야 심협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공격을 멈출 수는 있소. 허나 청구국으로 들어가 결백을 입증하려 해서는 안 되오.”

    이 말에 막사 안에서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육 도우, 이번 청구국 토벌을 대당 관부가 주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마음대로 지휘한다면 우리도 더는 따를 수 없습니다.”

    칠살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청구 호족은 지금까지 잘못을 인정할 마음이 없어 보이니 그들이 만약 정말로 전란을 피하고 싶다면 스스로 결백을 입증해야 합니다. 심형의 이번 고심(苦心)이 헛수고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강신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될 말입니다. 저들이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는 좋은 기회인데 왜 멈춘단 말입니까? 이번에 멈추면 저들에게 숨 돌릴 틈만 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 틈에 조직력을 갖추고 우리를 공격해오겠지요.”

    노 장로도 단호히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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