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84화 (984/1,214)
  • 984화. 청구를 문책하다

    밤중, 홀로 방에 앉은 심협 앞 탁자에는 복구된 옥침이 놓여 있었다. 부러졌던 흔적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는 한 손으로 옥침을 쓰다듬으며 만벽 장로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억제할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설마……?”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옥침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는 옥침을 안고 침상으로 향했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 * *

    어지러웠고, 눈꺼풀은 천근 쇳덩이처럼 무거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쾅!

    무언가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럼에도 심협은 여전히 무력감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구냐? 무얼 하려는 게냐?”

    곧이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심협은 이 익숙한 목소리에 얼른 눈을 뜨고 싶었지만, 여전히 잘 되지 않았다.

    “얌전히 내놔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자의 목소리로, 역시 귀에 매우 익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심협은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외쳤다.

    그 순간,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의아한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두꺼운 돌문 앞에 서 있음을, 돌문 뒤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여기는……?”

    심협은 주위를 둘러봤는데, 낯익은 곳이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눈앞의 복도로 향했다. 이어서 복도 양쪽의 진열품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머리도 또렷해졌다.

    “여기는…… 만벽 장로님 저택의 밀실?”

    낮에 가본 바로 그곳이었다.

    심협은 한동안 멍해져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몽유병이라도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 뼈가 부러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돌문 뒤에서 또렷이 들려 왔고, 무겁고 구슬픈 소리가 뒤를 이었다.

    심협은 곧장 돌문을 밀치고 들어가려 했다. 한데 그의 몸은 곧장 돌벽을 관통해 들어갔다.

    밀실 안은 매우 어두웠지만, 심협은 맞은편 돌벽의 상황이 뚜렷하게 보였다. 누군가 벽에 기대 앉아 있었는데 양손과 양발을 벌린 채 목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옆에는 온몸을 검은색 옷으로 뒤덮은 사람이 보였는데, 체형을 봐서는 여자 같았다.

    심협이 다가가려는데, 여자가 먼저 몸을 웅크리더니 벽에 기대고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피투성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만벽 장로님!”

    심협이 외쳤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은 어제 죽었다는 만벽 장로였다. 지금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목과 온몸의 뼈가 이미 부러져 있었다. 목구멍의 숨소리는 매우 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서 물건을 내놔라. 그러면 깔끔하게 죽여주마.”

    검은 옷의 여자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차갑게 말했다.

    심협은 그제야 확신했다. 자신이 또 꿈속 세계로 넘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천년 뒤가 아니라 어젯밤으로 돌아왔다. 더욱이 왜 만벽 장로의 살해 현장으로 왔단 말인가? 물론 알 수 없었다.

    몇 가지 추측이 한순간에 튀어나왔지만, 지금은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먼저 만벽 장로를 구해야만 했다.

    그때, 검은 옷의 여자가 참을성이 바닥난 듯 손을 들어 만벽 장로의 미간을 내리치려 했다.

    “멈춰!”

    심협은 얼른 달려들어 여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의 손에서는 어떤 영광도 빛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방해 없이 여자의 등을 통과하더니 여자의 가슴과 갈비뼈를 찔렀다.

    하지만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심협은 자신이 지금 허황된 혼백처럼 여자의 몸을 스쳐 지나갔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 실체가 있는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여자의 손은 이미 만벽 장로의 머리를 찍어 두개골을 산산조각냈고, 그의 신혼까지 완전히 소멸시켰다.

    절망에 빠진 심협은 만벽 장로를 죽인 범인을 알아내려고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에 용의 비늘이 가득한 검은색 면구(面具)를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다니…….”

    여자는 가볍게 질책하고는 만벽 장로의 몸을 뒤져서 숨기고 있던 저물 반지를 꺼내고는 챙겼다.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 찢어진 소매가 벌어지면서 새하얀 팔이 드러났다. 손목 근처에 다섯 손가락이 움켜쥔 화상 같은 검붉은 자국이 보였다.

    “마수수!”

    심협은 그 각인을 보고는 경악했다.

    과거 장안 귀환(鬼患) 때, 경하용왕은 신혼이 부서지는 동안 딸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경지를 전승했다. 그때 저런 각인이 남았던 것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벽 장로님을 죽인 것이 마수수…… 그녀일 줄이야…….”

    충격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끝없는 어둠에 빠졌다.

    * * *

    천기성의 객실. 심협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이어 눈앞이 흐려지면서 방 안이 빙글빙글 돌더니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이렇게 반나절을 더 잤고, 깨어났을 때는 이튿날 저녁이었다.

    심협은 황급히 소부자를 찾아가 어젯밤 꿈속으로 넘어갔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도 제가 꿈속 세계에 갔다 온 건지 아니면 단순한 꿈을 꾼 것인지 확신이 안 갑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이번 꿈속 세계는 천 년 뒤가 아니라 만벽 장로가 살해된 그날이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저는 유령처럼 떠돌 뿐이라 다른 사람들은 저를 보지도, 제 존재를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저도 환영처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지요.”

    “그렇다면 단순한 꿈일 가능성이 크겠군.”

    “허나 꿈에서 깬 뒤, 신혼이 나른하더니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평소와는 전혀 달라서 단정하기가 너무 어렵군요.”

    “이 옥침은 정말 범상치가 않으니 내가 복구했다고는 하나 사실 본래대로 완벽히 복구했다는 보장은 없네. 그래서 은연중에 옥침의 신통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

    소부자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하자 심협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꿈속 세계를 들어가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이제 태을 경지로 들어설 준비를 위해 태청단을 만들 영재를 모아볼까 합니다.”

    “큰일이 없으면 자네에게 부탁 좀 할까 하는데…….”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심협이 포권하며 답했다.

    “그렇다면 편하게 말하겠네. 이번에 청구국이 거청천과 손을 잡고 천기성을 침범하고 만벽 장로를 죽인 데다 성에 막심한 피해를 줬으니 반드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네. 그래서 언무사에게 천기성 제자들을 이끌고 가서 교섭을 시킬까 하는데, 그 아이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자네가 그와 함께 가줬으면 하네.”

    “선배님, 어째서 문중의 장로님들을 같이 보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심협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이번에는 우리 천기성뿐만 아니라 삼계의 모든 문파가 청구국을 문책하러 간다네. 일전의 장안성 호란(狐亂)은 자네가 잘 알겠지만, 그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아서 대당 관부와 당시 연화대회에 참석했던 모든 문파가 청구국으로 갔지. 벌써 조양곡에서 며칠째 대치 중이라네.”

    심협은 비경에서 돌아온 뒤로 시간을 착각하는 일이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청구국을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에 다른 문파에서는 대부분이 젊은 세대 중 출중한 자를 보낸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거겠지.”

    심협은 소부자의 말이 이해가 됐다.

    “청구 호족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모양이군요.”

    “이번에는 주로 대당 관부와 청구 호족 사이의 일이니 대충 맞장구는 쳐주지만, 대부분은 혹시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몰려오는 것일세. 허나 내 생각에 이번 일이 그리 간단할 것 같지가 않아. 그러니 언무사가 이번에 좋은 경험을 쌓았으면 하는 바람일세.”

    “그렇다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마침 저도 청구 호족이 무슨 생각인지 알아보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고맙네. 그럼 돌아가서 준비하고 내일 함께 출발하게.”

    심협은 짧게 답한 뒤, 인사를 남기고 바로 나왔다.

    소부자의 방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왔을 때, 섭채주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막상 방에 들어온 그녀는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난감한 기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가 있어?”

    “그게…… 스승님께서 종문으로 돌아오라고 전갈을 보내오셨어요. 보타산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섭채주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 종문을 떠난 지 오래됐으니까 돌아가 봐야지. 그런데 난 언무사와 함께 청구국에 가기로 소부자 선배님과 약속을 해서…… 함께 가기는 힘들 것 같아.”

    심협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섭채주가 흠칫 놀랐다.

    “어디 간다고요?”

    “청구국. 왜? 무슨 일 있어?”

    “스승님이 저에게 돌아오라고 하신 이유가 사제, 사매들과 함께 청구국을 토벌하라고 하신 거였거든요.”

    섭채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보타산은 네가 인솔하는 거야?”

    심협도 무척 반가워했다.

    “그럼 떨어지지 않아도 되겠네요.”

    섭채주가 배시시 웃자 심협 역시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다음 날 새벽.

    심협과 섭채주는 내성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2층 높이의 거대한 비주가 정박해 있었다.

    비주 밖에는 10여 명이 서 있었는데, 선두는 무명 장로와 언무사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명 장로가 언무사에게 할 일을 당부하고 있었다. 언무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없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은 10여 명의 천기성 제자들 가운데 어떤 여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온몸은 피투성이에 머리는 산발이었다. 상당한 고문을 당했는지 피부마다 마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심협은 차례로 인사한 뒤, 의아해하며 그 여인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마를 가린 산발 사이로 피범벅이 됐지만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청구국 장로인 유려였다.

    그녀의 미간에는 부문이 새겨져 있었고, 살짝 떠진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목에는 매우 복잡한 부문이 새겨진 언갑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이건……?”

    “이 여자는 입이 정말 무거워서 아무리 고문을 해도 어떤 정보도 토하지 않았네. 섭혼술을 사용하려 드니까 스스로 신혼 절반을 망가트리더군. 제때 식해를 봉인하지 않았다면 아마 자폭했을 게야.”

    무명 장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려 장로를 뒤덮은 부문과 언급은 그녀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심 소우, 앞으로의 일정을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 도우를 잘 보살피겠습니다.”

    “무명 장로님, 안심하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면 심형과 의논하겠습니다.”

    “알겠다.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이제 가보거라.”

    무명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유려 장로를 압송하여 비주에 올라타 장안성으로 출발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보름이 지났다.

    천기성 비주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장안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보타산 제자들이 장안성에서 섭채주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비주 위에서 웅장한 장안성을 내려다보던 심협은 언무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같이 안 갈 생각이오?”

    “여기서 쉬고 있다가 심형이 돌아오면 함께 청구국으로 가겠소.”

    짧은 시간 안에 심협이 빠르게 정진한 것이 그에게는 적지 않은 자극이 됐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언무사는 쭉 방에서 수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지금도 비주에 남아 수련하기로 한 것이다.

    “알겠소.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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