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3화. 미리 대비하다
“심 도우! 섭 소저!”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의 눈에 심협과 섭채주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부자 선배님, 무명 장로님.”
천기성에 돌아오자마자 그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두 사람도 반갑게 웃으며 서둘러 내려왔다.
한데 날아서 내려오는 동안 천기성을 슬쩍 살폈는데, 곳곳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듯했다.
땅에 내려선 그는 곧바로 물어봤다.
“선배님, 천기성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또 외부의 침입이 있었던 겁니까?”
심협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소부자와 무명 장로는 잠시 멍해졌다.
“심 도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명 장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소부자는 심협과 섭채주를 살펴보다가 기운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깜짝 놀라더니 씩 웃었다..
“심 소우, 축하하네. 경지가 또 크게 정진한 것을 보니 창궁 비경에서 기연을 만난 모양이군. 섭 소저도 축하하오.”
무명 장로도 그제야 심협의 변화를 알아챘고, 평소의 침착한 그답지 않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 도우, 무슨 선단이나 신약이라도 먹은 건가? 겨우 사흘 만에 경지가 어떻게 이리도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무명 장로가 경악한 듯 물었는데, 이번에는 섭채주와 심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로님,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사흘이라고 하셨나요?”
섭채주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네. 자네들이 사흘 전에 사라지지 않았는가?”
놀라운 일이었으나,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비경 안의 시간 흐름이 바깥과 똑같지 않은 것뿐이다. 반면 섭채주는 비록 시간 신통을 익혔다고는 하나 막상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나니 믿기 힘들어 보였다.
“무명 장로님, 농담하시는 거죠? 사흘이라니요, 3년은 됐는데…….”
섭채주의 말에 무명 장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부자를 돌아봤다. 하마터면 이 젊은 연인이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말할 뻔했다.
소부자는 일의 요점을 파악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상할 것도 없소. 창궁 비경은 천정 일부의 비경과 비슷한 곳이니 그 안의 시간 흐름 또한 인간세계와 다를 터. 그곳의 1년이 이곳의 하루인 셈이니 여기의 사흘이 저 안에서는 3년이었을 것이오.”
심협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사실로 밝혀지니 허탈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니 천기성이 ‘또’ 습격을 당한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선배님, 천기성의 화는 진정된 겁니까?”
“걱정 말게. 반역자들과 침입자들은 생포했고, 나머지는 모두 참살했다네. 살아서 도망친 자는 아무도 없지.”
무명 장로가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답하긴 했지만, 눈빛이 흔들린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심협이 머뭇거리다가 물어보려는데 소부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옥침은 이미 복구됐네.”
“정말입니까?”
그 말에 심협은 크게 기뻐했다.
“그렇긴 한데…… 아무튼 내가 고칠 수 있는 곳은 전부 고쳤지. 숨기는 건 없다네. 다만 몇 번을 시도해도 발동되지 않더군. 그러니 어디 부족한 부분이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 자네가 발동해야만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건가?”
소부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심협은 웃었다.
“사실 저도 직접 발동해본 적은 없습니다. 모두 옥침이 저절로 발동하여 저를 꿈속 세계로 데리고 들어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며칠 동안 베고 자면서 시도해보게.”
소부자의 기대 어린 목소리에 심협도 한껏 기대하는 눈치였다. 만약 다시 꿈속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면, 자신들이 힘을 합쳐 치우를 죽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무엇이 현재를 바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세. 옥침을 주겠네.”
“알겠습니다. 채주야, 너는 무명 장로님과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심협은 짧게 답한 뒤 소부자를 따라나섰다.
“심 소우, 자네들이 창궁 비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없겠나?”
가는 길에 소부자가 궁금한 듯 물었다.
심협은 그곳에서의 모든 일을 솔직하게, 차근차근 들려줬다.
소부자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하얗게 질렸다.
“그럼 천언선존을 만난 건가?”
소부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언선존이 어떻게 다시 몸을 만들어 세상에 돌아왔는지를 이야기했다.
“역시 언술의 창시자답군. 인연이 닿지 않아 못 뵌 게 아쉬울 따름일세.”
소부자는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제자들이 인사하는 것조차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내성에 도착해 있었다. 이들은 어느 밀실로 향했다.
“거청천…… 초대 성주님의 적계 후손이 결국 잘못된 길로 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결말이로군.”
“천언선존의 손에 죽었으니 가치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겠죠.”
“심 소우,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아무래도 자네에게는 알려줘야겠군.”
심협은 무명 장로가 뭔가 숨기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말씀하시죠.”
“만벽 장로가…… 죽었네.”
“네? 만벽 장로님이요? 그럴 리가…… 저희가 지원 갔을 때는 부상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심협은 믿기 힘들었다.
“자네 말대로 당시까지 만벽 장로는 무사했고, 정양하여 회복되자마자 침입자를 소탕하는 전투에 참가했네. 한데 어째서인지…… 내가 출관하여 장로들을 모아 회의하려는데 계속 오지 않더군. 사람을 보내 보니 자기 밀실에 죽어 있었네.”
“어떻게 그럴 수가……? 만벽 장로님은 진선기 수사인데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수가 있는 거죠?”
“밀실 안에는 싸웠던 흔적이 있긴 했지만, 순식간에 끝난 것인지 흔적이 많지 않았네. 그러니 범인이 아마도 태을기 수사일 걸세. 당시 나는 밀실에서 옥침을 만드는 데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성안은 혼란이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누구도 신경 쓰지 못했지.”
소부자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심협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사로잡힌 자들은 심문해보셨습니까? 그들이 내막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심문해봤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알아봤지만, 알아낸 단서가 너무 적었네. 이번 일이 청구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정도만 알아냈지. 허나 만벽 장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더군.”
“청구국…….”
심협은 청구국 사람들을 생각하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옥침을 보러 가세.”
소부자가 심협을 밀실 가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둥근 단조대 위에 색이 조금 칙칙하고 노란 한 덩어리의 옥침이 떠 있었다.
심협이 다가가 자세히 보려는데 소부자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가 손을 들어 허공에 몇 번 흔들자 날카로운 정망(晶芒)이 마치 주렴(珠簾)처럼 그의 손을 따라 펼쳐졌다. 두 사람은 그제야 단조대로 다가갔다.
“옥침이 다 복구되었을 때 천지의 이상이 일어났네. 천기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봉인해놨지. 이제 자네가 처리하게.”
소부자는 이어서 손을 들어 옥침 위를 몇 번 눌렀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옥침의 표면에 갑자기 정광이 빛나더니 한 겹의 매우 얇은 불규칙한 거울 같은 물건이 천천히 사라지면서 옥침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옥침이 갑자기 격렬하게 떨리면서 빛이 흘러나왔고, 한 겹의 광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퍼질 기미를 보였다.
심협은 손을 들어 가볍게 옥침 위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던 옥침이 순식간에 평온해졌고, 뿜어져 나오던 빛도 안정됐으며, 짝 소리와 함께 점 같은 정광(晶光)이 되어 사라졌다.
“역시, 옥침은 자네만 발동할 수 있나 보군. 어서 해보게.”
이 광경을 본 소부자가 감탄하며 말했다.
“선배님, 잊으셨습니까? 꿈속 세계로 넘어가는 건 옥침이 저절로 발동해야 하는 거지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허허, 그랬지. 옥침과 자네 사이에 기이한 공명이 일어나는 걸 보고 잠시 흥분해서 잊어버렸네.”
소부자가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
“복구되었으니 금방 다시 넘어갈 수 있겠지요.”
심협이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 결과를 알고 싶으니 그게 발동하기 전까지는 천기성을 떠나지 말게.”
“알겠습니다.”
심협이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이런 지혜로운 선배가 상황을 분석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은 너무도 상식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선배님.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심협은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레 물었다.
“말해보게.”
“이번에 태청단 단방을 얻었는데 제련할 재료가 필요합니다. 선배님께서 좀 모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심협이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오, 이제 태을 경지로 돌파할 준비를 하는 건가?”
소부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실력으로는 한참 부족하니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지, 미리 대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 어디 한번 보여주게.”
소부자가 손을 내밀자 심협이 황급히 무라에게서 얻은 태청단 단방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넸다.
소부자는 단방을 슥 살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태청단은 태을의 경지로 올라가는 걸 돕는 단약이다 보니 여기에 적힌 주재료부터 부재료까지 다 극품의 영약이네. 특히 주재료가 되는 대라불수(大羅佛手)와 옥맥구향추(玉脈九香蟲)는 선품(仙品)급이라 각각이 성 하나의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세. 구하고 싶다고 쉽게 구할 수가 없는 것들이야.”
“예상은 했습니다.”
심협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쉬움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하세. 단방을 하나 복사해주게. 그러면 삼계 각지에 있는 천기 점포를 다 찾아보겠네. 다만, 백 년이 지나도 다 모은다는 확신은 없으니 마음은 비워두게.”
“그저 손 놓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심협은 포권을 올린 뒤, 밀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만벽 장로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입구는 천기성 제자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심협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만벽 장로가 살해된 밀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눈에 보이는 진열품은 모두 온전해서 싸움이나 훼손된 흔적이 전혀 없었기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밀실로 들어가보니 온통 난장판이었고, 싸움의 흔적과 수많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흔적들로 미루어 싸움은 순식간에 끝난 듯했다. 만벽 장로는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고, 구조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살해됐을 것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만벽 장로는 크게 다쳐서 성안의 저택에서 치료 중이었으니 밀실에서 살해됐을 때도 저항할 힘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미 하루가 지나서 어떤 기운이나 잔재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단서가 많지 않았다. 심협은 잠시 만벽 장로를 위해 묵념하고는 바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