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82화 (982/1,214)
  • 982화. 궁을 떠나다

    “그렇다면 무라, 저 핏빛 조도가 치우의 본명성기라는 그 말이 사실인가?”

    심협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당연하다. 나와 치우는 상고 시기부터 알고 지냈으니 확실히 알고 있다. 게다가 저 조도에 담긴 치우의 십방마옥도는 마족 중 오직 치우만 그 신통을 연화할 수 있지.”

    “치우는 지금 삼계 대능들의 연합으로 봉인됐는데 그의 본명성기가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지?”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창궁 비경에 갇힌 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바깥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저 핏빛 조도는 백여 년 전 갑자기 나타난 것이니, 더 알고 싶으면 나가서 직접 알아보던가.”

    퉁명한 대꾸에도 심협은 화내지 않고 묵묵히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몇 년 전, 밖에서 우연히 두 개의 마기를 마주쳤다. 하나는 핏빛 뼈 지팡이, 다른 하나는 핏빛 피리였지. 기운으로 봤을 때는 저 조도와 거의 비슷했고, 각각 무은사해의 흑연미굴 가장 깊은 곳과 동해 용궁에 보관되어 있더군. 당시에도 마족의 고수가 그 마기를 빼앗으려고 했지. 무라, 당신이 봤을 때 그 두 개의 마기도 치우의 본명성기인 것 같나?”

    “뭐라! 치우의 본명성기가 두 개 더 있다고? 확실한 건가? 정말 핏빛 조도와 똑같았느냐 말이다!”

    무라가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크게 변하며 다급히 물었다.

    “틀림없다. 난 경지가 높지 않지만, 눈썰미는 제법 괜찮은 편이지.”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치우는 상고 시기에 황제에게 봉인됐으니 아무리 불사불멸의 몸이라 해도 극도로 허약해져 있을 터인데…… 어떻게 뼈와 살로 제련해야 하는 본명성기를 세 개나 만들었지?”

    무라가 넋이 나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심협은 중요한 일임을 직감하고는 집중했다.

    “세 개의 본명성기…… 세 개…… 설마……?”

    무라는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데 그 순간, 그녀의 미간에서 갑자기 나비 같은 마족 무늬가 떠올라 검은 빛을 뿜어냈다.

    “마접심인!”

    표정이 급변한 심협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움켜쥐었다.

    다섯 개의 금색 불꽃, 태양진화가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 불꽃들이 닿기도 전에 마접심인의 검은 빛이 어두워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사라졌다.

    무라의 기운도 완전히 소멸했고, 시체는 눈을 크게 뜬 채 쓰러졌다.

    화령자와 섭채주 역시 몸을 빛으로 번쩍이며 마접심인을 막으려 애써봤지만, 늦고 말았다.

    “아무래도 무라가 중요한 정보를 말하려는 걸 눈치채고는 누군가가 마접심인을 발동한 모양이군. 한데 저 마인을 언제 심은 걸까?”

    화령자가 불쾌한 듯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까 유천 등이 마진을 사용해 핏빛 조도를 조종하려고 했을 때겠지. 무라가 떠올린 정보가 매우 중요했던 모양이야.”

    심협은 다소 허탈해하며 소요경 깊은 곳을 바라봤다.

    참마신검이 그곳에 비스듬하게 꽂혀 있었고, 주위에는 금색 뇌막이 생겨나 핏빛 조도를 단단히 봉인하고 있었다.

    무라의 모습을 봐서는 저 핏빛 조도에 매우 중요한 비밀이 있는 것 같으니 여기서 나가면 그걸 풀어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암흑 같은 공간. 검은 기운이 감도는 네 사람이 조용히 서 있었다. 유천과 홍굴, 마수수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왜소한 남자였다.

    이 왜소한 남자의 손에서 영롱한 어두운 빛이 번득이더니 손에서 검은색 나비가 나타났고, 즉시 펑 하고 터지면서 빛이 되어 흩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네 사람 모두 안도했다.

    “제때 제거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결과는 끔찍했을 것이다! 유천, 너희가 성골(聖骨) 조도를 가져오지 못해 마조님께서 매우 실망하셨다!”

    왜소한 남자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존자(尊者)께서 벌을 내려주십시오!”

    세 사람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덜덜 떨며 말했다.

    왜소한 남자는 차갑게 비웃고는 세 사람을 무시한 채 핏빛 옥부를 꺼내 발동시켰다.

    옥부에서 혈광이 번득이더니 그 안에서 크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천 등은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왜소한 남자는 허리를 굽힌 채 수시로 혈광을 향해 공손하게 굽실거렸다.

    잠시 후, 옥부의 혈광이 천천히 사라지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조님께서 너희에게 다시 기회를 주라 하셨다. 성골조도가 심협의 손에 넘어갔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왜소한 남자가 옥부를 챙기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유천은 바로 대답했다.

    고개를 숙인 마수수의 눈에 광망이 스치더니 곧장 사라졌다.

    * * *

    소요경 안. 심협은 무라의 시신을 처리한 뒤, 참마신검 옆에 가부좌를 틀고는 몇 가지 보물을 꺼내놨다. 암홍색 전고와 노란색 율척, 초록빛의 장도, 하얀색 거미줄이었다. 이번 대전에서 얻은 것과 거청천, 무라의 저물 법기에서 찾아낸 네 개의 중보였다.

    두 사람의 저물 법기에 들어 있는 다른 물건들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어서 이미 임랑환에 넣어뒀고, 이 네 개의 보물만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암홍색 전고와 노란색 율척, 즉 구려전고와 축지척의 신통은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축지척은 이미 천살시왕에게 제련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그는 잠시 후 초록빛 장도를 들고 살폈다. 이 명홍도는 아직 제련하기 전이라 안에서부터 흉악한 살기를 뿜어냈다.

    “좋은 도다! 이 도는 순수하게 살육을 위해서만 존재하니 매우 날카롭고 베지 못할 것이 없겠어!”

    심협이 명홍도를 보며 감탄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명홍도는 헌원 황제가 귀허(歸墟)에서 얻은 만재녹정(萬載綠晶)에 33종류의 최절정 음속성 영재를 더하고, 또 십만 마족과 요족의 피로 만들었지.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 피와 신혼을 빨아먹는다. 그러다가 치우 수하의 대장 수십을 죽인 뒤로 명홍도의 위력이 크게 정진해 주인마저 잡아먹으려 들었지. 헌원 황제는 이 도를 부숴버리려 했지만, 그 신위가 아까워 결국 봉인했고, 네게 전해진 것이다. 실로 핏빛 조도보다도 위험하니, 혹여 이 도를 사용할 거라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오, 명홍도에 그런 내력이 있었군.”

    심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명홍도를 내려놨고, 하얀 거미줄 법보를 들었다.

    이 법보는 무라의 저물 법기에서 얻은 것으로, 강력한 환력이 담겨 있었다. 만약 귀등상인이 몸으로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심협의 혼은 저승을 떠돌았을 것이다.

    심협은 이 거미줄을 들고 선천연보결을 시전했다.

    거미줄에서 은은한 하얀 빛이 감돌며 천천히 떠오르자 마치 거대한 하얀 거미가 몸을 펴는 것 같았다.

    하얀 환무가 거미줄에서 퍼져 나가 안개 바다를 만들고 춤을 추듯 움직였다. 보는 이의 심신을 유혹할 것만 같았다.

    심협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이 거미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이 법보의 이름은 박선주사(縛仙蛛絲), 그 안에 강력한 환력과 금고신통이 담겨 있었다.

    “좋은 보물이로군.”

    그는 흡족해하며 소매를 휘둘러 네 개의 법보를 거두고는 법력을 운공하여 제련하기 시작했다.

    심협의 손에 하얀 빛이 반짝이며 옥반이 나타났다. 주철이 준 천언진경이었다.

    언술에 흥미가 있는 그는 신식을 안에 넣자마자 놀란 기색이었다.

    천기원의 언술을 볼 때도 감탄을 금치 못했건만, 이 천언진경의 언술은 그보다 훨씬 위였다. 천기성의 그것을 뛰어넘는 신비한 언갑이 부지기수였고, 신식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도 천기권의 범위를 넘어섰다. 어쨌든 둘이 일맥상통하니 천기성의 언술이 천언궁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천기성의 어느 선배가 이곳에 와서 천언궁의 언술을 밖으로 가지고 나간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집중해 천언진경을 연구했다.

    * * *

    사흘 뒤, 천언궁 1층의 어느 대전.

    이곳은 매우 불안정해 곳곳에 공간의 균열이 떠 있었고, 수시로 그 균열에서 폭풍이 뿜어져 나와서 대전 곳곳이 상처와 균열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 대전은 어떤 놀라운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여깁니다. 제가 천언궁의 공간 금제를 바깥 세계와 연결해 두 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주철은 심협과 섭채주를 안내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주철은 담담하게 웃고는 무언가를 읊조렸다.

    대전에 은빛이 번쩍이더니 네 모서리에서 몇 장에 이르는 은색 비석이 갑자기 솟아났다. 비석마다 새겨진 수많은 은색 부문에서 눈부신 은빛이 뿜어져 나오자 인근의 허공에 수많은 물결 같은 자국이 생겨났다.

    주철이 꺼낸 천언탑에서 네 개의 하얀 빛이 날아가 네 개의 비석 안으로 들어갔다.

    눈부신 은빛이 순식간에 대전 전체를 가득 채우면서 허공에 은색 부문이 만들어졌고, 잠시 후에는 10여 장 크기의 은색 법진이 완성됐다.

    “됐습니다. 이제 진 안에 서시죠.”

    섭채주가 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주 도우는 창궁 비경에 머무르실 겁니까?”

    심협은 주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경지가 미천하니 여기서 좀 더 수련할 계획입니다. 언젠가 선존의 배움을 모두 계승하면 나가볼까 합니다.”

    “그렇군요. 밖에서 주 도우를 기다리겠습니다!”

    심협은 웃으며 공수하고는 얼른 은색 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주철이 법진을 발동하자 그 안에서 은빛이 하늘 높이 솟구쳤고, 이내 심협과 섭채주의 몸을 뒤덮고는 은색 무지개가 되어 단숨에 대전 허공의 공간 균열로 들어갔다.

    * * *

    천기성.

    경천지계가 높이 떠받친 두 팔 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무명 장로가 내성 광장에 가부좌를 튼 채 경천지계의 머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갔다.

    무명 장로가 황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상대는 개의치 말라는 듯 손짓했다.

    “성주님, 심 도우와 섭 소저가 무사히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무명 장로가 고개를 들어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니 나도 확신할 수는 없소. 다만, 심 소우는 조화를 일으키는 자, 즉 하늘이 돕는 길인이니 무사할 거요.”

    소부자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귀 안쪽이 보이지 않는 힘에 봉인돼 들어갈 수가 없으니…….”

    무명 장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여전히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심 소우가 전설의 창궁 비경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니 우리로서는 구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지 않소? 휴, 내 일찍 나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소부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주님, 그건 그 도둑놈들과 방심한 제 탓입니다.”

    무명 장로가 고개를 숙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부자가 폐관하는 동안 천기성의 크고 작은 일을 그가 관리했기 때문이다.

    “청구 호족도 무슨 병이 났는지 장안에서 호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천 리나 떨어진 우리 천기성까지 침범했으니, 죽어 마땅한 놈들이오.”

    소부자는 성격상 분노를 잘 감추지 못했다.

    “어제 소식을 들어보니 아직도 장안에서 활동하는 호족이 있다는 것을 안 대당 관부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장안성 백 리 안의 모든 호족을 숙청했다 합니다. 지금쯤이면 아마 호족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여우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번에 장안의 손실이 그리 컸으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오.”

    “대당 관부가 각 문파에 조양곡으로 가서 함께 청구국을 정벌하자고 영웅첩(英雄帖)을 돌렸지요. 저희에게도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소부자는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경천지계의 귀쪽을 올려다봤다. 이내 찌푸렸던 눈살이 펴지더니 곧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명 장로도 뭔가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