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71화 (971/1,214)
  • 971화. 성의(誠意)

    “손을 잡자고?”

    심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는 좀 전에 무라와 같이 움직였다가 바로 뒤통수를 맞았었다. 미리 대비를 해놔서 큰 피해는 없었지만, 지금은 굳이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치고 싶지 않았다.

    허나 이어지는 유천의 말에 그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노부를 먼저 소개해야겠군. 난 유천이라네. 저 둘은 홍굴과 금수일세. 자네들 모습을 보아하니 천언궁 금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군.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곳의 금제를 조금 알고 있지. 금제를 파훼할 준비를 해오기도 했고. 다만 멸신원광이 너무나 강해서 우리의 자문화령부(紫紋化靈符)로는 오랫동안 막아낼 수 없네. 그래서 곤륜경의 힘을 빌릴까 싶은데……. 일단 금제를 열고 보물을 차지하면 서로에게 이득이지 않겠는가?”

    “당신들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금제를 파훼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거지?”

    심협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또 누구인가? 왜 이곳의 보물을 탐내는 거지?”

    유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심협과 유천은 한동안 말없이 대치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손을 못 잡을 것도 없겠지. 우선 이곳의 금제와 파훼법을 말해봐.”

    “껄껄! 그대가 묻지 않아도 말해줄 생각이었네. 이 금제의 이름은 태현하광(太玄霞光), 상고의 금제로서 33겹의 태현금제로 만들어져 있지. 반드시 한 겹 한 겹씩 파훼해야 하네. 하여 우리가 준비해온 태현금제 파훼법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으니 손을 잡고 싶었던 걸세.”

    유천의 눈빛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인 것 같군. 그럼 먼저 금제를 한 겹 파훼해 보겠나?”

    “신중한 친구로군! 좋다. 성의를 표하기 위해 그리 하지. 시작하세.”

    유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는 다른 두 해골에게 말했다.

    홍굴과 금수, 거청천은 두말하지 않고 대전 앞 공터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진기와 진반을 꺼내 법진을 설치했다.

    심협은 상고 금제의 도에 관해 정통하지 않기에 보고 있어도 갈피를 잡을 수 없자 시선을 거두고 정세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설치한 대진은 너무도 복잡해서 완성하는 데 무려 반 시진이 걸렸다.

    대진은 네모 형태였고, 보라색과 검은색의 진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두 개의 진이 겹쳐진 것 같았다. 대진의 네 모서리에는 별자리가 있었는데, 유천 등 네 사람이 그곳에 서서 주문을 읊었다. 대진이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돼 짙은 보라색과 검은색 광망을 뿜어냈다.

    다시 한참이 지나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던 보라색 부적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뿜어내는 보라색 광망도 많이 얇아졌다.

    “심 도우, 정말로 저 마족들과 손을 잡을 생각입니까?”

    개명천수가 가까이 다가와 전음으로 물었다.

    “개명 도우, 고견(高見)이라도 있으십니까?”

    “고견은 없지만, 마족 놈들은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손을 잡아도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대비해야 합니다.”

    “물론이죠. 다만 이 대전의 금제는 너무 강해서 우리만으로는 파훼할 수 없으니 우선은 저들과 힘을 합쳐서 금제를 파훼한 뒤 다시 생각해보죠.”

    심협의 전음에 개명천수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방법진(四方法陣)이 완전히 돌아가고 하늘을 찌를 듯한 자흑색 광망을 뿜어내자 대전 밖의 모든 곳이 자흑색으로 물들었다.

    유천 등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동시에 결인을 했다. 그러자 네 줄기의 굵은 자흑색 광망이 천언궁 대문을 향해 날아갔다.

    대문의 하얀 빛은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수십 배로 두꺼워졌는데, 자세히 보니 이 광망은 수십 겹의 가늘고 작은 금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빛들이 동시에 반짝여 마치 하나의 금제처럼 보였다.

    유천이 이를 보고는 법결을 바꾸자 네 줄기의 자흑색 광망이 바로 수백 줄기로 갈라져 하얀색 광막에 꽂혔다. 마치 뾰족한 못이 금제를 찌르는 것 같았다.

    첫 번째 금제의 광망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더는 반짝거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약해지거나 사라지지도 않았다.

    유천이 씩 웃고는 검은색 두개골을 꺼내 힘주어 바스러트렸다.

    펑!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부서진 검은색 두개골이 시커먼 가루가 되어 자흑의 법진 안에 떨어졌다.

    이 가루는 바로 불에 타면서 수많은 자흑색 도깨비불처럼 변했다. 유천이 결인하자 이 도깨비불들이 대문의 금제를 향해 날아가 가장 바깥의 하얀색 금제에 달라붙었다.

    자흑색 도깨비불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금제에 닿는 순간 바로 타버렸다. 대신 금제에는 수천 개의 구멍이 뚫렸고, 금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본 심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화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령린화(腐靈磷火)!”

    “법진을 다 깨우친 거야?”

    심협이 얼른 신식을 소요경 안에 넣었다. 화령자는 정말로 깨어 있었다.

    “그래. 그나저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천언궁 5층인가? 왜 마족들과 같이 있는 거지?”

    심협은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마족과 함께 움직이다니, 거청천은 역시 문제가 있는 자였군. 저들과 손을 잡을 거라면 조심해야 한다.”

    “나도 알아. 다만 내 힘으로는 천언궁 금제를 부술 수 없으니까 이럴 수밖에. 그건 그렇고, 방금 저 불꽃이 부령린화라고 했지? 뭐 주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없다. 저 불꽃은 상고 시기 도굴을 주로 하던 종문, 간시파(趕尸派)가 만들어낸 신통으로, 금제를 부식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만, 저 신통은 매우 음험하고 불쾌하지. 방금 본 저 검은색 두개골은 부령노(腐靈顱)라고 하는데, 지음(至陰) 체질인 사람의 두개골을 연화하여 만든다.

    태현금제를 부식하는 효과를 가지려면 적어도 수백 개가 필요하고, 제련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신혼을 넣어 하늘의 조화로움을 깨야 하지. 그래서 간시파는 여러 종문과 문파의 협공을 받았고, 모든 공법 서적이 불에 타버렸다. 한데 설마 부령린화의 제련법이 아직 남아 있을 줄이야.”

    심협은 그 말을 듣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때, 하얀 금제가 자흑색 린화에 완전히 불타 사라졌다.

    “심 도우, 어떤가?”

    유천이 심협을 돌아보며 물었다.

    “좋군. 그럼 멸신원광을 막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당신들은 계속 법진을 파훼해.”

    심협이 생각을 거두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뒤 섭채주에게 눈짓했다.

    섭채주가 뜻을 알아채고는 곤륜경을 결인하자 더 많은 그림자가 거울에서 흘러나와 유천 등을 뒤덮으며 멸신원광을 차단했다.

    네 사람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계속해서 법진을 발동하여 대문의 금제를 파훼했다.

    “화령자, 도천시살대진의 깨달음은 어때? 지금 만들 수 있어?”

    심협이 전음으로 화령자에게 물었다.

    “넌 도천신살대진을 뭐로 보는 거냐? 그건 태고 제일의 흉진(凶陣)이다! 아무렇게나 뚝딱 만들어낼 수 있으면 그걸 제일 흉진이라고 할 수 있겠냐?”

    화령자가 눈을 부릅뜨며 짜증을 냈다.

    “그 말은……?”

    “네가 준 진도(陣圖)가 불완전한 건 내가 개량하고 있으니 따지지 않겠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재료다. 이 법진은 열두 개의 도천진기가 있어야만 시전할 수 있다. 한데 소요경 안의 최상급 음속성 영재와 네가 준 무족 재료를 다 합쳐도 도천진기 하나를 겨우 만들 정도지.”

    “겨우 하나라고?”

    “당연하지! 무려 도천신살대진 아니냐! 아무튼, 앞으로 열한 개의 진기를 더 만들 재료가 필요하니 이제부터는 다 네게 달렸다고 할 수 있다.””

    화령자의 대답에 심협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후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도천신살대진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자신이 가진 그 많은 재료를 거의 다 써야 진기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데 앞으로 열한 개가 더 필요하다니, 어디서 그 많은 음속성 재료를 구한단 말인가!

    ‘됐다. 어차피 당장은 쓸 건 아니니까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

    심협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상황을 살폈다.

    * * *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유천 등이 전력을 쏟은 덕에 천언궁 대문의 태현금제는 벌써 31겹이 파훼됐고 이제 두 겹만 남았다. 지금도 사방법진에서는 처음보다 훨씬 굵어진 보라색 빛줄기가 바깥쪽의 금제를 찌르고 있었다.

    네 사람 모두 검은색 두개골을 꺼내 법진의 힘과 합쳐 자흑색 린화로 태현금제를 태웠다.

    하지만 마지막 두 겹의 태현금제는 보기에도 이전보다 훨씬 견고해 보였고, 네 사람이 몇 개의 두개골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완전히 태우려면 한참이 걸릴 듯했다.

    “휴우, 역시 상고 대진답군. 이걸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겠어.”

    유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혈광이 반짝이며 그의 앞에 떠올랐다. 이는 혈홍색 두개골로, 앞서 사용한 것들보다 훨씬 컸고, 어두운 혈광이 감돌고 있었다.

    심협의 표정이 돌변했다. 저 핏빛 두개골에 담겨 있는 은은한 마기는 평범한 마기가 아닌 치우의 힘이었다!

    유천이 바스러뜨리자 이 두개골도 폭발하여 핏빛 가루가 되어 땅에 있는 사방법진과 합쳐졌고, 수많은 붉은 린화가 대문의 금제를 향해 날아갔다.

    “준비하고 있다가 금제가 부서지면 바로 들어갑니다!”

    심협이 전음으로 섭채주와 개명천수에게 말했다.

    개명천수는 놀란 기색이었다.

    ‘대문의 금제가 아직도 두 겹이나 남았고 마지막 금제는 더 단단해 보이는데 이번에 파훼될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개명천수는 언제든 천언궁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핏빛 린화가 대문 금제에 꽂히자 태현금제가 바로 격렬하게 타올랐고, 그중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타버렸다.

    핏빛 린화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지만, 곧장 마지막 금제를 파고들었다.

    굉음과 함께 눈부신 혈광이 대문에서 폭발했고, 성난 파도 같은 힘이 성전 밖의 모든 사람에게 쏟아졌다.

    유천 등이 있는 사방법진은 광망이 강하게 뿜어져 나와 혈광은 자연스레 양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심협 등에게는 혈광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곧장 술법을 발휘해 막으려 했는데, 그 순간 교활하고 음랭한 기운이 먼저 혈광에서 날아와 세 사람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섭채주와 개명천수는 온몸이 바로 마비되어 조금의 힘도 쓸 수 없었고, 법력의 흐름이 멈추면서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심협의 몸에 음랭한 기운이 침투하자 단전에 있던 순양검이 바로 떨리면서 강력한 순양의 힘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이 음랭한 기운은 놀랍게도 가볍게 순양의 힘을 돌파하여 경맥으로 침투해 그 역시 몸이 갑자기 마비됐다.

    한데 그 순간, 단전 안이 갑자기 뜨거워지더니 작열하는 힘이 폭발했다. 바로 부러진 참마검이었다. 참마검의 힘에 침투하던 음랭의 기운이 크게 사그라졌고, 정체된 법력도 절반이 회복되었다.

    심협은 체내의 마기를 진압하기 위해 단전 안에서 쭉 온양해왔던 참마검이 이런 효과를 발휘할 줄은 몰랐기에 크게 기뻐했다. 그는 얼른 참마검을 발동하여 체내의 음랭의 힘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손의 법맥이 강하게 떨리더니 흡입력이 생겨나 이 음랭의 기운을 빠르게 흡수해갔다.

    그가 깜짝 놀라 오른손 법맥을 살펴보니 그곳의 검은색 씨앗이 음랭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심협은 적잖이 놀랐다. 법맥 안에 넣은 뒤로 아무런 변고가 없었기에 거의 잊고 있었던 씨앗이 오늘 갑자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음랭의 기운이 빠르게 줄어들자 심협의 몸도 회복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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