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6화. 진짜 천언궁
유암의 성 어느 끝자락. 둔광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심협과 섭채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땅에 내려선 심협은 비틀거리더니 웩 하고 피를 토했다.
섭채주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둘러 그를 부축하여 부서진 돌 위에 앉혔다.
“어때요? 상처가 심해요?”
“괜찮아. 법력 소모가 심할 뿐이지 상처는 깊지 않아.”
이어서 그는 치료 단약을 먹은 뒤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약효를 연화했다.
섭채주는 그의 뒤에 서서 한 손으로 결인하고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그녀 주위에 푸른색 광망이 떠오르며 심협을 뒤덮었다. 허공에 범음(梵音)이 풀려 퍼지고 심협의 몸에서 금빛이 번득이면서 상처는 물론 기혈의 힘도 적잖이 회복되었다.
섭채주는 효능이 있자 안도하며 보도중생의 신통을 거두고 옆에서 조심스럽게 그를 보호했다.
한참 뒤, 심협이 마침내 길게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상처는 덕분에 완전히 회복되었어. 법력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당장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은 없을 거야.”
“다행이에요.”
심협이 웃으며 말하자 섭채주도 그제야 안심했다.
“곤륜경은 완전히 연화한 거야?”
“네, 저와 합이 잘 맞는지 조종하기에 수월하네요.”
“그럼……?”
심협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멈추더니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섭채주가 표정이 급변해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도 쭉 신식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접근하는 자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도우, 경계할 것 없습니다. 그대들을 해칠 생각이었다면 아까 내버려뒀겠지요.”
낯익은 목소리에 이어 푸른 옷의 준수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당신은……?”
사내는 개명천수였다.
“내 본명신통으로는 그대들의 비둔 흔적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지요. 그러니 마음만 먹었다면 금방 쫓아올 수 있었지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도우의 회복이 끝나길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확실히 선의(善意)가 가득했다.
“도우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심협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들을 도운 건 저 암영전표(暗影戰豹)와 그 일행들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암영전표요?”
“아까 그대와 싸웠던 그 검은 옷을 입은 자입니다. 말 얼굴 사내는 현화신구(玄火神駒)로, 그들과 나는 모두 이곳에 갇혀 있던 영수들이죠.”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당신들은 왜 이곳에 갇혀 있었던 겁니까?”
심협이 조심스레 물었다.
“갇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사육되고 있었던 겁니다. 다만 우리의 원령(元靈) 각인은 모두 천언궁 안에 있으니 봉인된 상태지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모두 동병상련일 텐데 어째서 서로 적대하는 겁니까?”
심협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저와 그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천언 노인을 따라온 반면, 그들은 붙잡혀 끌려왔지요. 특히 암영전표는 본래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자의 주인이 누구죠?”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본래 마족 수사의 영총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수원에 계속 갇혀 있었는데 백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마기 하나가 날아오더니 천언궁 일부의 금제를 부수면서 저희 셋은 영수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마기의 주인이 암영전표의 주인 아니었을까 싶긴 하군요.”
그 말을 듣자 심협은 무언가가 떠올라 표정이 굳었다.
“무라가 예전에도 천언궁에 온 적이 있었습니까?”
“예전이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개명천수가 고개를 저었다.
“무라가 암영전표나 현화신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도 모르겠군요.”
“무라가 암영전표의 본래 주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말에 개명천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 무라가 계략을 써서 우리를 떨쳐내고 혼자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거 기억나? 아무래도 암영전표가 몰래 도와준 게 아닐까 싶어.”
심협이 섭채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섭채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들의 목표는 분명히 천언궁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인 듯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천언궁은 천언 노인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신기(神器)로, 그 강력함은 다시 없을 정도입니다.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삼계의 생령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
개명천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청천이든 무라든 모두 심성이 곧지 않은 자들이니 그들에게 천언궁을 빼앗기면 가장 먼저 공격당할 곳은 천기성이 될 거야.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절대 안 돼.”
심협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도우께서 반드시 그들에게서 천언궁을 빼앗아 주십시오.”
개명천수가 심협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에게 천언궁을 빼앗으라니, 어째서 도우가 하실 생각은 안 하시고요?”
심협은 소인배처럼 의심해서 물은 것이 아니다. 이치에 맞지 않았기에 물은 것이다. 초면인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당연히 서로에게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전 한 마리 영수에 불과할 뿐, 언술의 신비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천언 노인께서도 천언궁이 저와 같은 존재에게 들어가는 걸 바라시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제 원령 각인은 아직도 다른 곳에 있으니, 만약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면 전 그의 영총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자유의 몸도 아닌데 어떻게 감히 천언궁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두 분은 마음이 순수한 분들이니 두 분이 천언궁을 차지할 수 있도록 제가 돕고 싶습니다.”
개명천수가 고개를 젓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원령 각인을 찾아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심협은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일에는 경중이 있는 법이니, 천언궁을 차지하는 걸 우선으로 하시죠,”
개명천수가 포권으로 감사를 전하고는 답했다.
세 사람은 힘을 합치기로 했고, 바로 출발했다.
잠시 후 이들은 제단 깊은 곳에 있는 빛의 문 앞에 도착했고, 개명천수에 이어 심협과 섭채주가 뒤를 따라서 5층으로 향했다.
* * *
빛의 문에서 나온 세 사람이 나타난 곳은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산의 중턱 언덕의 평평한 곳이었다. 이 산은 꼭대기가 하늘과 거의 닿아 있었고, 정상으로부터 백여 장 위에 깊이가 모두 다른 극광(極光: 오로라) 같은 하얀 빛이 쉴 새 없이 반짝였다.
눈앞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울창한 숲을 지나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갈림길마다 먼 곳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심협은 유명귀안으로 건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표정이 조금 변했다.
“왜 그래요?”
“저 대전마다 문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천언궁이라고 적혀 있어.”
섭채주의 물음에 답을 해준 심협은 곧장 신식을 펼쳐 그 대전들의 허실(虛實)을 살펴보려 했다.
한데 신식이 나오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고, 신혼 소인은 수많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곧이어 옆에 있던 섭채주도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여기서는 신혼의 힘을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저 위에 있는 하얀 빛이 보입니까? 저건 멸신원광(滅神元光)으로, 어떤 법보로도 차단할 수 없습니다. 신식의 힘을 발휘하지 않아도, 심지어 식해를 봉쇄해도 저 신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것은 계속해서 신혼을 자극할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견디기 힘들어질 겁니다.”
그 말에 심협이 서둘러 신식의 힘을 거두자 그제야 고통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개명천수는 멀쩡해 보였다.
“당신은 괜찮소?”
“그럴 리가요. 멸신원광은 어떤 법보로도 막을 수 없고 이곳에 오면 저 빛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전에 암영전표 등과 몇 번 이곳에 와본 터라 어느 정도 참을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와봤다고요?”
“원령 각인을 되찾기 위해 몇 번이고 돌파를 시도해봤지요. 허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곳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됩니다. 자칫하면 신혼이 중상을 입게 되죠. 단, 곤륜경으로 흑암의 영역을 방출하면 멸신원광을 절반은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암영전표와 현화신구가 그렇게 목숨 걸고 그 법보를 빼앗으려 했던 것이죠.”
그 말에 섭채주가 얼른 곤륜경을 꺼냈다. 뒤이어 주문을 읊자 흑암의 영역이 방출되어 바로 세 사람을 뒤덮었다.
흑암의 영역에 들어가자 심협은 신혼의 고통이 절반쯤 줄어들었다.
“앞으로 그런 중요한 정보는 먼저 말해주세요.”
섭채주가 개명천수를 바라보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개명천수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주위를 둘러본 심협은 이곳에는 비석이 없음을 깨닫고는 돌아서며 물었다.
“도우, 이곳의 시련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천언궁의 전승은 또 어디에 있죠?”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만, 이렇게 많은 대전 중 진짜 천언궁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천언궁을 찾는 거요? 물론 말처럼 간단하지 않겠죠?”
섭채주가 끼어들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바라보는 환경이나 길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살아 있고,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저와 암영전표, 현화신구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하마터면 길을 잃고 돌아가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렇다면 미로나 마찬가지군요.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밖에요.”
심협이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맞아요. 하나씩 살펴볼 때마다 표식을 남기면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살펴봤던 대전은 다시 안 봐도 될 거예요.”
“좋은 생각이야.”
섭채주의 말에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바로 움직이죠. 지금쯤 무라 등도 이곳에 들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미 진짜 천언궁을 찾고 있을 수도 있죠.”
개명천수의 말에 세 사람은 곧장 가장 왼쪽 갈림길로 달려 그 끝에 있는 궁전으로 향했다.
4층 유암의 성 구석의 은밀한 옛 저택을 누군가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혼자 유암의 성에 남은 거청천이었다.
오래된 저택 깊은 곳의 낡은 대전에 들어서자 3척 크기의 작은 제단이 보였고, 그는 바로 그리로 다가갔다.
거청천이 손을 휘두르자 제단 위의 먼지가 흩날리면서 그 아래에 있던 작은 부진(符陣)이 드러났다.
저물 법기에서 세 개의 검은색 정석을 꺼내 부진의 세 모서리에 놓은 후, 그는 작은 병의 병마개를 뽑아 안에 든 은색 액체를 천천히 부었다.
액체가 법진을 따라 흐르며 모든 홈을 메우면서 세 개의 정석을 하나로 연결했다.
뒤이어 거청천은 양손으로 인을 맺고 기이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의 주문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자 은색 액체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솟구쳐 올라 제단 전체를 뒤덮었다.
거청천은 주문을 멈춘 뒤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속 광택이 흐르는 세 개의 시커먼 해골 머리가 떠오르더니 제단 위에 나란히 내려앉았다.
제단의 은색 액체가 빠르게 용솟음치며 검은 해골들을 감쌌다.
세 모서리에 놓여 있던 검은색 정석도 빠르게 액체로 변해 그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거청천이 손가락을 문지르자 도깨비불 같은 어두운 초록빛 뼛가루가 떨어져 은색 액체에 불을 붙였다. 제단에서는 음산한 귀신의 불길이 솟아올라 요동쳤다.
다음 순간, 귀신의 불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해골 중 한 구가 부르르 떨었고, 작은 다리가 불꽃 속에서 튀어나왔다.
거청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귀신의 불에서 무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