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64화 (964/1,214)
  • 964화. 난국(亂局)

    흑의의 청년이 다가오는 걸 보자 섭채주는 연화를 포기하고 우선은 싸울 준비를 하려 했다.

    한데 그때, 멀리서 갑자기 학이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대한 푸른 괴조(怪鳥)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빠르게 날아왔다. 얼굴과 가슴, 발톱 모두 금색 갑옷으로 뒤덮여 있었고, 온몸의 푸른 깃털은 마치 빛이 흐르는 것 같아 멀리서 보면 마치 푸른 불꽃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순식간에 날아온 괴조는 입에서 금색 빛줄기를 쏴서 흑의의 청년을 공격했다.

    청년은 재빨리 피하고는 다시 섭채주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거대한 새가 어느새 하늘에서 내려와 양 날개를 걷었다. 몸에서 빛이 흐르더니 새는 인간 모습으로 변했다.

    젊은 사내였는데, 늘씬한 몸에 외모는 준수했고, 두 눈은 봉황처럼 가늘었으며, 눈꼬리의 두 줄기 짙은 푸른색 흔적이 귀밑머리를 향해 비스듬히 나 있었다.

    “개명천수(開明天獸), 역시 왔구나!”

    흑의의 청년이 그를 보더니 이를 갈며 외쳤다.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푸른 옷소매를 펄럭여 푸른색 깃털 무늬가 새겨진 장검을 잡고는 섭채주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저들은 내가 막을 테니 그대는 어서 곤륜경을 연화하시오.”

    섭채주는 그 말에 의아했지만 지금은 길게 따질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개명천수라 불린 사내가 맹렬히 달려드는 흑의의 청년을 막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곤륜경 연화를 이어갔다.

    한편, 심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마치 천군만마의 대군에 포위된 것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갑자기 구유마환을 꺼내서 휘둘렀다.

    “가라!”

    그가 나지막이 외치자 철컹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구유마환에서 검은 빛이 강하게 번쩍이더니 수많은 크고 작은 고리 허상이 떠올라 엄청난 기세로 불바다 곤진을 뚫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붉은 전마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 몸에 걸친 갑옷이 붉은빛이 감도는 고리에 묶였다. 그러자 뿜어져 나오던 불꽃의 광망이 순식간에 꺼지고 모든 영력이 봉인되어 발동할 수가 없게 됐다.

    자연히 아래에 투영되던 곤진이 사라지면서 심협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심협은 곧장 섭채주가 무사함을 확인한 뒤에야 곤봉을 들고 하늘로 치솟아 붉은 전마를 향해 휘둘렀다.

    붉은 전마는 붉은 빛과 함께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갑옷을 집어넣어 구유마환에서 빠져나왔다.

    심협은 구유가 다시 무라의 조종에 들어가게 될까 걱정됐기에 서둘러 거두고는 발천난봉으로 마면 사내를 공격했다.

    삽시간에 곤봉의 허상이 하늘을 뒤덮었고 마면 사내도 그 안에 휩쓸렸다.

    마면 사내는 이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는 어두운 불꽃이 감도는 구환도(九環刀)를 꺼내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고, 두 사람의 싸움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훼멸명왕과 교전하던 무라는 앞으로 빠르게 날아가면서 갑자기 허화(虛化)하더니 거대한 도끼날을 뚫고 지나가 곧장 섭채주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허공에서 갑자기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 않는 음파가 제단에서 퍼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되어 사방을 압박해 나갔다.

    무라는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더니 허화 상태가 풀렸다.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거대한 검은색 추가 머리 위에 나타나 까만 뇌전을 휘감은 채 덮쳐왔다.

    무라가 손을 크게 휘두르자 검은색 소용돌이가 생겨나 막았다.

    뇌전의 추가 떨어지면서 허공이 강하게 흔들렸지만, 그마저도 금방 검은색 소용돌이에 집어 삼켜졌고, 검은색 뇌전도 전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무렵, 심협과 교전하던 마면 사내도 갑자기 중압감이 몸을 뒤덮어 오는 것을 느꼈고, 장도를 휘두르는 속도가 절로 느려졌다.

    반면 심협은 의아해했다. 그 역시 신비한 힘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자신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면 사내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졌고, 발천난봉은 더욱 빨라졌다.

    마침내 마면 사내는 심협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등에 일격이 꽂혔다.

    한 번, 두 번, 열 번…… 순식간에 백 번의 공격이 마면 사내의 몸을 가격했고, 마면 사내는 금세 엉망이 되어 몸을 비틀거렸다.

    그 중압감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흑의의 청년이었다. 이 신통을 시전한 것이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개명천수였기 때문이다.

    푸른 옷의 청년이 입을 벌리고 낮게 읊조리자 음파가 끊임없이 퍼져 나갔고, 흑의의 청년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움직일 수 있었지만, 엄청난 압박이 몰려왔다.

    흑의의 청년 뒤편 허공에는 수많은 잔상이 남았지만, 본래 그의 움직임은 잔상조차 간파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전력을 다해 개명천수에게로 돌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허공에서 누군가 날아와 그의 앞에 떨어졌다.

    힐끗 보니 바로 마면 사내였다.

    그제야 개명천수의 낮은 울부짖음은 멈췄고, 사방을 억압하던 보이지 않는 음파도 사라졌다.

    흑의의 청년은 잠시 멈췄다가 몸에서 검은 빛을 뿜어내며 바로 달려들었다.

    한편, 마면 사내를 날려 버린 심협은 그를 쫓아가지 않고 훼멸명왕 쪽으로 향했다. 무라가 억압되어 있는 틈에 언갑과 함께 그녀를 처리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개명천수의 신통은 강력한 대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심협이 휘두른 곤봉이 막 떨어지려는 순간, 무라의 모습은 다시 허화되어 공격을 흘려보냈다.

    심협은 당황하지 않고 훼멸명왕 언갑과 함께 무라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낯익은 두 개의 인영이 멀리서부터 날아왔는데, 바로 거청천과 염열이었다.

    심협과 무라의 교전을 본 두 사람은 우선 형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누구를 먼저 죽이는 게 낫겠소?”

    “서두르지 마시오. 상황을 보니 저들은 보경을 빼앗으려는 것 같군. 그러니 먼저 저 보물을 빼앗고, 그다음에 심협을 죽입시다.”

    거청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면서 전음으로 답했다.

    “좋소.”

    염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제단 쪽으로 향했다.

    마면 사내는 또 누군가 곤륜경을 빼앗으러 오자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서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염열은 그간 쌓인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버럭 호통을 치며 양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건곤현화탑이 휙 날아가 광망을 뿜어내고, 빠르게 회전하면서 마치 거대한 팽이처럼 마면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면 사내는 보탑의 맹렬한 기세를 보고도 물러나기는커녕 성난 포효와 함께 미간에서 붉은 빛을 뿜어냈다. 바로 활활 타오르는 정혈이었다.

    뒤이어 그의 몸에서 혈광이 용솟음치더니 붉은 전마 본체로 변하여 건곤현화탑과 충돌했다.

    콰쾅!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건곤현화탑이 크게 흔들렸고, 타오르던 불꽃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여파로 염열의 몸도 크게 흔들리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붉은 전마의 허상도 크게 흔들리면서 사라졌고, 마면 사내는 피를 뿜으며 뒤로 밀려났다.

    염열은 오장육부의 충격을 간신히 견뎌내고는 다시 제단을 향해 돌진했다.

    한데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갑자기 푸른색과 흰색이 뒤섞인 기다란 천이 하늘 가득 펼쳐져 앞을 가로막았다.

    “만리권운!”

    염열이 차갑게 비웃더니 무진선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르릉! 쾅!

    굉음이 연이어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푸른색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수많은 바람의 칼날이 휘몰아치며 날아가자 허공이 베이고 부서져 광흔(光痕)이 번득였다.

    만리권운은 광풍에 휩쓸려 더는 염열의 앞을 막지 못했다.

    기다란 천의 틈으로 빠져나가 빠르게 돌진하던 염열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표정이 돌변했다. 섭채주가 위험해졌음을 눈치챈 심협이 무라를 훼멸명왕에게 맡기고 달려온 것이다.

    “염열, 명을 재촉하는구나!”

    심협이 일갈하며 손을 휘두르자 소매에서 구유마환이 검은 빛과 함께 수많은 고리의 허상으로 변하여 염열을 향해 날아갔다.

    깜짝 놀란 염열이 다시 무진선을 크게 휘두르자 광풍이 휘몰아쳐 빼곡한 고리의 허상을 전부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가 안도하기도 전에 날아간 고리의 허상 뒤로 불꽃이 타오르는 검의 허상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열한 자루의 순양비검이 마치 열한 마리의 봉황처럼 광풍의 바람의 칼날을 베며 염열을 향해 쏟아졌다.

    염열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손을 아래로 휘두르자 허공에 있던 거대한 허상의 탑 아래에서 강렬한 현화가 뿜어져 나와, 강력한 위압감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심협은 검진을 설치할 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전력을 다해 비검을 찔러갈 수밖에 없었다.

    비검이 접근한 순간, 염열의 두 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더니 마치 본명신통이라도 발휘한 것처럼 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그러자 건곤현화탑은 그와 호응하며 순식간에 위세가 강해졌고, 탑 아래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색 현화가 여덟 마리의 화룡으로 변하여 순양비검 전부를 휘감고 끌어당겼다.

    심협은 모든 비검이 건곤현화탑에 제압되어 가자 소매에서 가느다란 노란빛을 쏘아 보냈고, 이 빛은 빠르게 날아가 탑에 명중했다.

    “낙보금전!”

    염열이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의 순식간에 건곤현화탑의 광망이 줄어들고 그 아래에서 뿜어져 나온 현화의 흑룡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심지어 보탑도 줄어들어 단숨에 1척 정도로 작아지더니 땅으로 떨어졌다.

    자유를 되찾은 열한 자루의 순양비검은 다시 염열을 향해 날아갔다.

    무진선으로는 순양비검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염열은 어쩔 수 없이 청천연을 꺼냈다. 하지만 이것마저 낙보금전이 떨어트릴까 봐 걱정되어 잠시 머뭇거렸고, 그 잠깐의 틈으로 인해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청천연을 작은 산만 한 크기로 변화시켜 몸 앞을 막으려는데, 이미 누군가 그 아래를 뚫고 파고들어 눈앞에 나타났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심협이 현황일기곤을 휘두르자 거대한 금색 곤봉의 허상이 바람을 가르고 구름을 날리며 염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염열은 그 기세에 당황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심협의 곤봉이 막 그의 머리에 꽂히려는 순간, 검은 안개가 갑자기 염열 앞에 피어오르더니 누군가가 나타나 커다란 원형 방패를 높이 들어 막았다.

    꽈르릉!

    금색 곤봉의 허상과 방패가 충돌하자 경천지동할 폭음이 울려 퍼졌다!

    원형 방패는 크게 흔들렸고, 겉의 검은 빛이 터져나가면서 뒤틀려 변형된 짐승 머리의 조각이 드러났다.

    금색 곤봉의 허상도 부서졌고, 금빛이 별빛처럼 흩어졌다.

    심협은 허공에 서서 연기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괴상한 검은 갑옷에서 반사되는 금속의 광태는 마치 불문의 금강(金剛) 같았다. 등에는 몇 개의 크고 굵은 팔이 높이 들려 있었는데, 손마다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다.

    “육비천룡?”

    심협은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이름이 떠올랐다. 한데 다시 보니 이 검은 갑옷에는 팔이 여섯 개가 아니라 여덟 개나 달려 있었다. 또한, 팔마다 보병, 금방울, 대검, 대추(大錘), 방패, 쇠사슬 외에도 은거울과 금속 나산(羅傘)을 들고 있었다.

    다만 육비천룡과 달리 머리는 흉악하게 생긴 용머리 투구였다. 두 개의 붉은 용안의 눈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처럼 무서운 살기를 뿜어냈다.

    “이건…… 팔비천룡인가?”

    심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팔비천룡 언갑에 죽게 된 걸 영광으로 알아라.”

    검은 갑옷 안에서 들려온 것은 거청천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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