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화. 미리 손을 써놓다
“오라버니…….”
섭채주의 전음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연화에 집중해.”
곤륜경은 아직 연화가 되지 않았으니 지금 끊기면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그때, 사내의 몸에서 다시 유광이 반짝거렸다.
“지금이다!”
심협이 나지막하게 외치며, 거의 동시에 발에서 달빛을 뿜어내 순식간에 흑의 청년 앞으로 이동했고, 그는 곧바로 현황일기곤을 휘둘렀다.
푹!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청년의 머리는 부서졌지만, 이상하게도 피가 뿜어져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심협의 목에 세 개의 혈흔이 나타나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심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광경을 바라봤다.
그의 곤봉에 머리가 부서졌던 청년의 몸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강철 손톱으로 심협의 가슴을 찢어버릴 기세로 찔러왔다.
등골이 오싹해진 심협은 서둘러 사월보로 피했는데, 머리 위에서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올려다보기도 전에 거대한 산과 같은 힘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그를 압박해왔다.
그의 머리 위에서 마면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팔짱을 낀 채 심협을 향해 떨어져 내려왔는데, 발밑에서는 현화(玄火)가 활활 타오르는 붉은색의 거대한 말발굽이 엄청난 기세를 뿜어냈다.
심협은 피할 길이 없자 이를 악물고는 몸에서 치우 마기를 발동하여 팔을 머리 위로 들어 교차시켰다.
거대한 치우지박이 나타나 마면 사내의 붉은 말발굽을 막았지만, 그 강력한 힘에 눌려 발아래가 푹 가라앉았다.
심협은 곧장 수중의 곤봉을 들어 흑의 청년이 뻗은 날카로운 발톱을 막았다.
“채주!”
두 사람에게 좌우 상하가 막혀 몸을 빼지 못하게 되자 섭채주를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일깨워주기도 전에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에서 나타났다. 바로 무라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곤륜경을 내놔라!”
무라가 천천히 제단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섭채주는 심협의 처지를 보고는 조급해졌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탐나면 직접 와서 가져가라. 한데…… 아직 연화를 마치지 못했는데 가져갈 수 있을까?”
“날 속일 생각은 마라! 곤륜경을 그 정도 연화했으면 진즉 석대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무라는 곤륜경에 얼마 남지 않은 금제 부분을 보고는 씩 웃었다.
“연화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안다고 그러는 거지? 갖고 싶으면 직접 와봐.”
섭채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는 게냐? 좋다, 내가 가마.”
무라는 거리낌 없이 뛰어올라 곧장 제단으로 향했다.
한데 그녀가 제단 근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땅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숨겨져 있던 법진이 부서지면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붉은빛이 감도는 손으로 붙잡으려 했다.
우웅!
진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붉은 광망이 크게 빛나더니 태양과 같은 눈부신 햇살이 사방의 어두운 공간을 환하게 비춰 모든 어둠을 물렸다.
붉은 빛에서 작열하는 힘이 담긴 거대한 도끼가 튀어나와 무라를 가로로 베며 날아갔다.
미처 방비하지 못한 무라는 얼른 뒤로 물러났지만, 도끼의 파급력에 옷에는 불이 붙어 순식간에 절반이 타버렸다.
그녀는 작열하는 강대한 힘에 밀려서 여백 장이나 물러나야 했다.
한편, 심협은 폭발음과 함께 금빛으로 하늘을 찌르며 열 자루 순양비검으로 흑의의 청년을 노렸다.
흑의의 청년은 비검에 베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심협이 두 팔을 흔들자 치우지박이 강력한 힘을 폭발시켜 마면 사내를 뿌리치고는 훌쩍 뛰어올랐고, 곧장 섭채주 옆으로 돌아갔다.
“심협, 우리 존재를 눈치채고 미리 손을 써놨구나!”
무라가 싸늘하게 내뱉는 동안 흑의의 청년도 다시 나타나더니 무라 옆에 섰다. 그는 조금도 다친 곳이 없었다.
마면 사내도 금방 돌아오자 심협은 말없이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는 세 사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자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미리 훼멸명왕 언갑을 숨겨놓았었다.
“무라, 아직도 살아있었군. 질긴 목숨이구나.”
심협은 혀를 찼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고 곤륜경을 내놓아라. 그럼 최소한 이 층에서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무라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경을 갖느냐 못 갖느냐는 너희 실력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렸겠지.”
심협은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뒤이어 그는 두 손을 연달아 허공에 움직였다. 한 자루의 순양비검이 날아다니며 섭채주 뒤에 금광검진을 구축했다.
여기까지 마친 심협은 한 손에 곤봉을 들고 섭채주의 우측에 섰고, 훼멸명왕 언갑이 도끼와 추(錘)를 든 채 좌측에 섰다.
심협의 의지를 본 무라는 옆의 두 사람을 돌아봤다.
“저놈들이 명을 재촉하니 소원대로 해주죠.”
흑의의 청년은 아무런 동작도 없이 갑자기 몸에서 검은 빛을 반짝였고, 마면 사내는 한 발 먼저 돌진하며 심협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권풍이 휘몰아치자 허공에서 불꽃이 바다처럼 솟아올라 심협에게로 휘몰아쳤다.
불꽃 속에서 거대한 붉은색 전마(戰馬)가 네 발굽에 어두운 불꽃을 단 채 천군만마가 돌격하는 기세로 돌진해왔다.
심협은 덤덤하게 손을 휘둘러 만귀번을 꺼냈다. 만귀번이 촤르륵 펼쳐지면서 검은 안개가 빠르게 피어올랐고, 음혼과 귀물들이 파도처럼 어두운 불바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심협 자신도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앞으로 돌진하더니 현황일기곤으로 몸을 받치고는 훌쩍 뛰어올랐다.
뒤이어 허공에 발을 딛은 채 몸을 가눈 그는 현황일기곤을 끊임없이 휘둘러 발천난봉을 시전했다.
순식간에 겹겹이 쌓인 곤봉의 허상이 눈송이처럼 주위에 모여들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 쉬지 않고 들려오더니 금속이 충돌하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계속해서 심협 주위에서 튕겨 나가는 것 같았다.
심협은 끊임없이 충돌의 흔적을 쫓으며 그림자를 찾으려 했지만, 상대가 어찌나 빠른지 잔상조차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한편, 무라도 공격을 재개했다. 펄럭이는 소매에서 무력이 치솟더니 거대한 손으로 변하여 심협 뒤에 있는 섭채주를 붙잡으려 했다.
그 순간, 훼멸명왕의 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몸이 순식간에 5장에 이를 정도로 커졌고, 붉은 빛이 번득이는 열일전부를 가로로 휘둘렀다. 허공에는 날카로운 붉은 선이 생겨났다.
뜨거운 광망이 불꽃으로 변하여 무라를 향해 날아가더니 검은 안개 손을 베었다.
무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크게 휘두르자 소매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색 소용돌이가 뜨거운 불꽃을 휘감고는 사라졌다.
뒤이어 그녀는 곧장 제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훼멸명왕 언갑이 정면으로 막아서고는 수중의 도끼로 일격을 날렸고, 곧장 뇌신전추까지 휘둘렀다.
거대한 도끼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도끼날이 허공을 찢으며 무라를 향해 날아갔고, 거대한 추는 검은 뇌망(雷網)을 끌어당겨 그녀를 뒤덮었다.
무라는 도끼 날은 피했지만 뇌망은 피하지 못해 곧 뒤덮일 위기였다.
그러나 검은색 뇌전이 바로 옆까지 다가온 순간, 몸에서 기이한 암홍색 주문이 떠오르더니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핏빛 옷이 되어 그녀를 보호했다.
검은 뇌전은 그 핏빛 옷에 떨어지자 그대로 튕겨 나갔다.
한편, 흉악한 귀기(鬼氣)와 붉은색 전마의 충돌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다. 모든 전마는 사라졌고 귀물도 상당수가 죽어나갔다.
짙은 귀무에서 거대한 전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은 족히 3장에 이르렀고, 붉은 몸은 피에 물든 것 같았으며, 검은 불꽃이 감도는 새까만 네 발은 마치 묵옥(墨玉) 같았다. 온몸에서 풍기는 기세는 서수(瑞獸) 기린 못지않았다.
치익!
전마의 앞발이 땅을 박차자 코에서 시커먼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흑의의 청년을 뿌리친 심협은 전마가 붉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하늘 높이 울부짖고는 발굽으로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심협은 저것이 마면 사내의 본체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진정한 뿌리를 알 수는 없지만, 전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은 결코 선한 기운은 아니었다.
심협은 만귀번을 집어넣고 이번에는 커다란 인을 꺼냈다.
번천인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갑자기 빛을 발하면서 집채만 해지더니 붉은 전마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꽈르릉!
쌍방이 충돌하자 천지가 뒤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붉은 전마는 강력한 힘에 뒤로 연거푸 밀려났고, 번천인도 빛이 약해지더니 허공에서 끊임없이 작아져 다시 심협의 소매로 돌아갔다.
그 순간, 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눈앞에 유령이 나타나 크게 손을 휘둘렀다.
파박!
심협의 가슴에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손톱자국이 생겨났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심협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기도 전에 검은색 화룡이 정면에서 덮쳐오더니 입을 쩍 벌려 집어삼키려 했다. 화룡에게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의 작열하는 힘은 주작과 금오 못지않았다.
심협이 어쩔 수 없이 손을 휘두르자 뒤를 지키고 있던 순양비검에서 눈부신 금빛이 번쩍이더니 활짝 피어난 연꽃처럼 날아왔다.
금오의 불꽃이 뒤섞인 금색 검광이 검은 화룡과 충돌하자 검의 울음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고, 검광이 종횡무진으로 뻗어 나갔다. 양쪽은 거의 대치하지 않고 검은 화룡이 검광에 갈기갈기 찢겼다.
하지만 곧바로 붉은 전마가 심협의 머리 위에 나타났는데, 온몸에 오래된 전진(戰陣)이 새겨진 금문(金紋)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를 본 심협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사월보로 멀리 물러나려 했다.
“어딜 가느냐!”
나지막한 호통이 들려오며 흑의의 청년이 눈앞에 불쑥 나타나 좌우로 몸을 흔들더니 순식간에 일고여덟 개의 분신이 되어 심협을 가운데로 포위했다.
이로 인해 잠깐 지체한 틈에 머리 위에서는 붉은 전마가 더욱 가까이 돌진해왔다.
온몸에 걸친 갑옷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빛으로 번득였고, 오래된 전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혈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둥! 둥!
심협의 귓가에 북소리 같은 것이 점점 들려오더니 뒤이어 광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전마가 울부짖었고,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심협은 마치 모래 위의 전장에 빠져서 사면초가에 몰린 것만 같았다.
“사장함진(沙場陷陣)! 빠져나가지 못한다.”
상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심협은 어느새 불꽃에 포위되어 곤진(困陣)에 빠진 상태였다.
불꽃에서 도광과 검의 허상이 연달아 번쩍이고 철마(鐵馬)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로 진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심협은 서둘러 유명귀안을 운공했지만, 불꽃이나 도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곤봉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대량의 불꽃이 용솟음치고, 뒤덮어 오면서 열기가 피부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환상이 아닌 것 같았다.
“저자를 묶어놨으니 얼른 곤륜경을 빼앗아라!”
허공의 붉은 전마가 아래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흑의의 청년을 보더니 버럭 외쳤다.
“어차피 빠져나오지 못할 텐데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
흑의의 청년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다시 합쳤다.
“시끄럽고, 무라 쪽 상황이 좋지 않으니 어서 가서 일을 마무리해라.”
흑의의 청년도 더는 장난치지 않고 돌아서서 섭채주 쪽으로 날아갔다.
심협이 곤진에 갇히자 순양비검도 머리 없는 파리처럼 헤맸고 훼멸명왕 언갑도 무라에게 붙잡혀 한동안 섭채주를 보호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