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화. 고경(古鏡) 곤륜(崑崙)
“오라버니, 괜찮아요?”
땅으로 내려온 심협이 휘청거리자 섭채주가 다가오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는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금빛이 빠르게 사라져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괜찮아. 그냥 법력이 다 소모된 것뿐이야.”
심협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짓고는 회복 단약을 먹은 후 공법을 운공하여 연화하기 시작했다.
섭채주가 주문을 읊자 초록 빛이 심협의 몸으로 들어갔다. 보타산의 회복 비술, 보도중생이었다.
초록색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심협의 법력은 절반 정도 회복되었다.
섭채주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보타산의 회복 신통은 외부의 천지영기를 끌어와 사용하는 술법인데, 이곳은 천지영기가 희박하여 효과가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보타산 회복 비법의 운공이 날이 갈수록 익숙해지는구나.”
정작 심협은 불평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섭채주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보도중생은 비록 외부의 영기를 끌어와 회복시키는 신통이긴 해도 술법을 시전한 자의 소모 역시 적지 않다. 한데 섭채주는 진선 후기에 도달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시전해 자기 자신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지금 제 경지면 보도중생을 시전해도 확실히 별 어려움이 없어요.”
섭채주가 또 주문을 읊고는 보도중생을 다시 시전했다.
심협의 몸에서 초록색 빛이 반짝였고, 신통의 효과가 사라졌을 때는 또다시 법력이 상당히 회복되었다.
섭채주가 다시 보도중생을 시전하려 하자 심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이제 됐어. 너도 소모가 컸잖아. 나머지 법력은 널 회복하는 데 쓰도록 해.”
섭채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전 안의 제단을 바라봤다.
“꽤나 소란스러웠으니 거청천과 무라 등이 4층에 왔다면 곧 이리로 올 거야. 채주, 저 검은색 고경을 거둬. 최대한 빨리 5층 입구를 찾자.”
섭채주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단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은 소매를 휘둘러 여섯 개의 혈홍색 눈동자를 휘감았다.
이 눈동자에서는 모종의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무력의 파동도 섞여 있었다.
“심협, 그 눈동자를 어서 나한테 줘! 그 안에 공간의 힘이 담겨 있다. 이건 원한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소요경 안의 화령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여섯 개의 눈동자와 이전에 얻은 무력의 재료를 전부 화령자에게 넘겼다.
“이 재료들에는 강력한 무력이 담겨 있군. 이건 다 어디서 얻은 거냐?”
화령자가 수많은 재료를 보고는 놀란 와중에도 기뻐하며 물었다.
“아까 암수들을 죽이고 얻은 거야. 이것들로 법보를 만들 수 있을까?”
“당연하지. 명화연로에는 축융무화(祝融巫火)가 있어서 무족의 법보도 만들 수 있다. 나도 줄곧 무기(巫器)를 만들려고 시도해봤지만 마땅한 재료가 없어서 불가능했는데, 이렇게 많은 재료가 있으니 이제 성공할 수 있겠군.”
화령자가 손바닥을 비비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협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고 생각에 잠겼다.
“왜? 더 할 말이 있는 게냐?”
화령자가 심협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화령자, 혹시…… 진기(陣器) 제련도 가능해?”
“그걸 말이라고……. 평생 각종 법진이나 금제와 씨름하면서 살아가는 연기사에게 진기 제련은 식은 죽 먹기지. 법진이 필요한 게냐?”
“일전에 우연히 상고 십대법진 중 하나인 도천신살대진을 본 적이 있거든. 열두 개 진기 안의 금제를 어느 정도는 기억해. 이 진법은 무족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 재료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그 진법에 대해 적어놨는데, 이 정도면 도천신살대진을 만들 수 있을까?”
“뭐라! 도천신살대진을 본 적이 있다고? 축록의 전쟁 이후 사라진 진법인데 도대체 어디서 본 게냐?”
화령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주 오래전에 상고의 유적에서……. 다만, 그곳은 이미 무너져버려서 다시 들어갈 수는 없고, 당시 그곳에 또 다른 신묘한 금제가 있던 터라 도천신살대진을 가지고 나올 수 없었지.”
그는 도천신살대진뿐만 아니라 주천성두대진도 본 적이 있으나,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네놈의 운은 정말 부러울 정도군. 나도 도천신살대진을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실마리도 찾지 못했는데 네놈은 우연히 그걸 봤다니! 어서 진법의 정보를 기억나는 대로 내게 넘겨라! 일단 봐야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겠지.”
화령자가 탄식하더니 재촉했다.
심협은 도천신살대진 금제의 정보가 적힌 하얀 옥간을 꺼내 소요경 안으로 넣었다.
이전에 꿈속 세계에서 도천신살대진을 얻었을 때 현실 세계로 가져올 것을 염두에 두고 신경 써서 연구했던 터라 제법 정확히 기억났다. 다만 도천신살대진은 너무도 복잡한 데다 심협은 진법의 도에 정통한 편이 아니었기에 여전히 정보는 뒤죽박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게 될까 봐 미리 도천시살대진에 대한 기록을 옥간에 기록해놨었는데 마침내 이렇게 쓰이게 된 것이다.
화령자는 옥간을 받자마자 바로 신식을 안에 넣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쉬지 않고 중얼거렸는데, 완전히 몰입하여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심협은 소요경에서 신식을 거두고는 눈앞의 대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먼저 대전 구석구석을 찾아봤지만 숨겨진 통로나 장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서 제단 쪽을 살폈다.
섭채주가 제단 꼭대기에 있는 석대 앞에 서서 양손을 결인해 금빛을 뿜어내 검은색 고경을 감싸고 있었다. 거울을 연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연화하려는 거야?”
심협이 섭채주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 곤륜경(崑崙鏡)과 제단의 무문(巫文)은 연결되어 있어서 연화하지 않으면 들어 올릴 수가 없어요.”
섭채주는 술법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이게 곤륜경이라고? 아는 물건이었어?”
검은색 고경에서 어떤 표시나 글자도 보이지 않았기에 심협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에요. 손이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이 고경의 이름이 저절로 떠올랐어요. 이 거울은 무족의 법보인데 아무래도 후예대신이나 촉구음 조무가 본 적이 있나 봐요.”
심협은 다소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이전에 화령자가 말하길, 무족의 혈맥 전승은 다른 일족과는 달라서 힘뿐만 아니라 지식도 물려준다고 했다.
“그럼 다른 건 내게 맡기고 연화해.”
잠시 후, 그는 제단 주위에서 통로를 찾아냈다.
제단 앞의 커다란 네모꼴 돌을 누르자 찰칵 소리가 나더니 돌이 안으로 내려갔다. 곧이어 제단 앞부분이 갈라지면서 땅속 깊은 곳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가장 안쪽에 하얀 빛의 문이 보였고, 5층으로 가는 입구였다.
심협이 기뻐하며 돌아보니 섭채주는 아직도 고경을 연화중이었다. 금빛이 빠르게 고경 안으로 흘러들었고, 아래 석대의 검은색 무문은 점점 밝아져갔다. 곧 연화되려는 징조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한쪽에 가부좌를 틀던 심협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전에 유암의 성 밖에서는 연시의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심협은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치고는 법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 * *
천언궁 3층. 두 사람이 뜨거운 용암을 건너고 있었다. 거청천과 염열이었다.
두 사람 머리 위에는 금색 불꽃이 타오르는 건곤현화탑이 떠다니면서 이들을 용암의 열기로부터 지켜주었다.
거청천과 염열 모두 옷차림이 엉망이었고, 곳곳이 피투성이였다.
“빌어먹을 무라! 마진(魔陣)을 설치해 기습하다니, 다시 만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염열은 이를 갈았지만, 거청천은 흥분하지 않고 결인하여 하얀 빛을 건곤현화탑으로 주입했다.
이를 본 염열의 눈에 다시 분노가 솟구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수진인이 심협의 손에 죽은 뒤, 염열은 혼자서 거청천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수족처럼 지시에 따랐고, 건곤현화탑도 빼앗겼다.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거청천과 손을 잡기로 한 것을 매우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건곤현화탑의 절반 이상이 상대의 수중에 넘어갔으니 규칙을 어기고 도망치면 보탑을 잃게 된다. 그러니 묵묵히 지금의 처지를 견뎌내야만 했다.
보탑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가더니 용암의 금색 불꽃을 휘감고 흡수했다.
보탑 안의 금제가 발동되었고, 몇 호흡 뒤 금빛이 안에서 빠져나와 두 사람의 몸으로 나뉘어 들어가면서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법력도 빠르게 회복됐다.
“용암 안의 저 금색 불꽃 덕분에 살았군.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어.”
거청천이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염열이 거청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출발하지. 무라가 함정을 파 놓은 건 분명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일 터. 그러니 서둘러 쫓아가야 한다.”
거청천의 단호한 말에 염열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빠르게 전진했다.
* * *
섭채주는 여전히 고경을 연화 중이었고, 심협은 묵묵히 호법을 섰다.
유암의 성은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심협은 회복 단약을 먹고 정양하면서 법력이 완전히 회복됐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어둠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이 성의 규칙은 바꿔 말하자면 언제든지 어둠 속에서 위험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때, 제단의 검은색 석대에서 갑자기 이상한 파동이 전해지더니 고경과의 긴밀한 연결이 녹이 슨 것처럼 천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끝난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섭채주에게 다가가려던 심협은 표정이 급변했다. 제단 밖의 부서진 벽 뒤에서 검은 그림자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 속도가 제대로 보기도 힘들 정도로 빨랐다.
허나 진즉부터 유명귀안을 운공하고 있던 그는 곧장 섭채주 옆으로 이동하여 현황일기곤으로 허공을 강하게 내리쳤다.
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허공에서 튀었다.
검은 그림자는 뒤로 날아가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려서서는 무너진 벽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채 심협을 바라봤다.
심협 역시 검은 도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젊은 사내를 바라봤다.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보는 청년의 양손에는 그윽한 초록빛이 감도는 금속 발톱이 끼워져 있었다.
“내 움직임을 본 것인가?”
흑의의 청년이 물었으나 심협은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며 신식을 펼쳐서 사방을 탐색했다.
흑의의 청년은 심협이 자신의 질문을 무시했음에도 화내지 않고 그저 두 눈을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호오, 유명귀안인가? 허나 아쉽게도 경지가 깊지 못하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청년의 몸에서 갑자기 유광(幽光)이 반짝였다.
심협은 눈이 커지더니 무의식적으로 방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흑의의 청년은 그 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데 의아해하던 심협은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졌고,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가볍고 작은 바람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푹!
심협의 귀가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예리하군. 평범한 수사라면 피하지 못했을 게다.”
맞은편에 서 있던 흑의의 청년이 씩 웃으며 칭찬했다.
심협은 감히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잔뜩 경계하며 섭채주의 옆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