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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954화 (954/1,214)
  • 954화. 세 개의 그림자

    다음 순간, 만수진인이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법력을 모두 소모한 줄 알았던 심협의 몸에서 마력이 솟아 나왔다. 그는 그대로 치우지박을 시전하여 거대한 주먹으로 혈륜왕의 몸을 산산조각냈다. 언갑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한편, 만수진인을 등지고 있던 섭채주가 돌아섰는데,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수진인은 흠칫 놀라더니 갑자기 서늘함을 느꼈다. 멍하니 고개를 숙여 보니 검은색 마봉이 그의 가슴에 꽂힌 채 기이한 검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그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곧이어 그의 전신에서 피와 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시들었고, 체내의 힘도 마봉을 타고 빠르게 흘러나가 섭채주의 몸으로 들어갔다.

    먼 곳에 있던 염열과 거청천은 두 눈을 홉뜬 채 만수진인의 몸이 점점 잿더미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몇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만수진인이 몸에 걸치고 있던 옷과 장신구가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이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당사자인 만수진인은 몰랐지만, 두 사람은 멀리서 똑똑히 모든 일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그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섭채주가 시간 신통을 시전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반경 몇 장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이로 인해 만수진인과 혈륜왕 언갑은 거의 멈췄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만수진인과 혈륜왕 언갑은 상대의 공격을 전혀 방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저 심협이라는 놈은 실력을 숨기고 있다가 방금 법력이 모두 소진된 듯 자신들을 속였고, 형세가 역전되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서 마기를 방출하여 두세 번의 주먹질만으로 혈륜왕 언갑의 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정말로 시간 신통이었나?”

    “방금 보지 않았는가. 절대로 금고 술법은 아니었어.”

    염열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거청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는데, 모두 공격할 뜻은 없어 보였다.

    한편, 심협은 마기를 거뒀다. 그는 이미 한계였고, 법력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섭채주에게서 서원마봉을 받고는 비틀거리며 만수진인의 시체잿더미로 다가가 옷에서 저물 법기와 근처에 떨어져 있던 만리권운, 낙보금전 등을 품에 넣었다. 이어서 추운축전화 안에 있는 재를 탈탈 털어내고는 자신의 발에 신었다.

    염열과 거청천은 이런 심협을 바라보면서도 침을 몇 번 삼킬 뿐,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어이, 더 안 싸울 건가? 난 마침 법력이 다 소모됐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거다.”

    심협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어지러이 널려진 사막 요수들의 잔해로 다가가 서원마봉을 꽂아 넣고는 남아 있는 힘을 흡수했다.

    염열 등은 그를 힐끔거리면서 속으로 정말로 저자가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좀 전처럼 그런 척 연기해서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것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하지만 진짜든 거짓이든 두 사람은 그런 시도조차 하기 싫었기에 여전히 머뭇거렸다.

    심협은 어느 정도 힘을 흡수한 뒤 손을 휘둘러서 통령지술로 도마뱀을 불러내고는 섭채주와 함께 등에 올라탔다.

    “모처럼 기회를 줬는데 버리겠다면, 우린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러더니 그는 정말로 도마뱀을 조종하여 떠나려 했다.

    그러자 염열과 거청천이 다급히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심협의 몸에서 마기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고, 옆에 선 섭채주가 법결을 맺었다.

    이 모습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우뚝 멈춰 서서는 심협과 섭채주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울분이 치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 *

    저 멀리, 모래언덕 뒤편. 세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세 사람 주위는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어둠은 놀랍게도 어떤 기운도 뿜어내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마치 평범한 모래언덕 그림자 같았다.

    “저 하얀 옷의 남자는 역시 대단하군요. 이미 태을 중기에 도달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화평곡에서 버려졌을 텐데 어떻게 또 들어왔을까요?”

    희미한 그림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무라의 것이었다.

    “저자의 이름은 거청천. 천언궁과 관련이 있는데 아무래도 거원의 후손 같습니다. 이전에 심협과 함께 천언궁에 나타났었는데 2층에서 규칙을 위반해서 밖으로 빠져나갔죠. 아마 어떤 다른 방법으로 전송법진을 발동한 것 같군요.”

    다른 검은 그림자도 말했는데 목소리는 마치 쇳조각을 문지르는 것처럼 귀에 거슬렸다.

    “거원의 후손!”

    무라는 마치 거원과 아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깜짝 놀랐다.

    “이제 어떡하지? 심협은 법력이 모두 소모됐으니 이 기회에 쫓아가서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붉은색 그림자가 말했다.

    “아뇨, 심협은 저력이 있는 자예요. 저자가 강력한 비장의 패를 숨겨놓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나서봐야 저들을 죽이지도 못하고 괜히 일만 망칠 겁니다. 그리고 옆의 여자는 우리에게 필요하니 문제가 생겨서는 안 돼요.”

    검은 그림자는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맞아요. 제가 심협을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즉 죽였지 왜 지금까지 기다렸겠어요. 옆의 저 여자는 무족의 혈맥인 데다 대무후예의 힘까지 계승했으니 그대 말처럼 그녀의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답니다.”

    “대무후예의 후손이라……. 잘됐군. 저 여자를 이용해 그 물건을 얻는다면 드디어 이 망할 곳에서 나갈 수 있겠어.”

    붉은 그림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가시죠!”

    검은 그림자가 웃으며 맞장구를 친 뒤, 세 사람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가 갑자기 짙어지더니 땅속으로 사라졌다.

    * * *

    심협과 섭채주는 한참을 달린 후, 반나절 만에 멈추었다. 앞서 소환한 도마뱀은 이미 체력이 다해 돌아간 상태였다.

    “채주, 괜찮아?”

    심협은 육체가 강인해 버틸 만했지만, 섭채주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법력을 거의 다 소모해 평보청운화를 신고도 심협을 쫓아가기 벅찼다.

    “버틸 만해요.”

    섭채주는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저놈들도 당분간은 안 쫓아올 테니 잠시 쉬자.”

    심협의 말에 섭채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기대어 앉았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법력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한순간이었지만 시간 신통까지 사용한 상태라 몸에 상당한 부담이 갔다.

    그때였다.

    쿠르릉!

    땅이 강하게 흔들리더니 10여 장 높이의 모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폭풍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한 무리의 도마뱀 같았다.

    한데 심협은 이를 보고 오히려 기뻐하며 모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안 그래도 타고 갈 요수가 필요했는데 잘됐군!”

    뒤이어 몇 번의 굉음이 들리고 모래 폭풍이 격렬하게 용솟음쳤다.

    모든 것이 빠르게 가라앉았고, 몇 호흡 뒤, 이전보다 더 큰 도마뱀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심협은 한결 좋아진 안색으로 그 위에 앉아 있었다.

    타고 갈 도마뱀만 빼고 모든 도마뱀을 죽여 서원마봉으로 정기를 흡수한 덕에 어느 정도 법력이 회복된 것이다.

    섭채주는 곧장 도마뱀 등에 올라타 심협 옆에 앉았다.

    “가자.”

    심협이 도마뱀을 조종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도마뱀이 달리는 동안 심협도 쉬지 않고 만수진인에게서 빼앗은 보물 몇 점을 꺼내 자세히 살폈다.

    우선 그는 추운축전화를 잠시 살펴본 뒤 다시 신었다. 진즉부터 궁금해하던 신발이었다. 화령자의 말대로라면 이 신발은 상고 뇌신이 만든 것으로서 무상 신통이 담겨 있을 것이다. 만수진인이 이전에 이 신발의 신통을 사용했을 때 매우 놀랐는데, 속도만 놓고 보면 평보청운화보다도 훨씬 빨랐다.

    법력을 운공하여 안에 주입하자 신발에서 갑자기 보라색 번개가 번쩍였고, 이를 본 심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추운축전화에는 64도 금제가 있었는데, 원만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 금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혼연일체가 된 상태라 어지간한 법보보다도 뛰어났다.

    심협은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이 공간은 비행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감히 날아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법력을 아껴야 했기에 그는 바로 영화의 발동을 멈췄다.

    뒤이어 다른 보물들도 하나하나 살펴본 그는 마지막으로 낙보금전을 살폈다.

    낙보금전에도 64도 금제가 들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되어 혼연일체가 된 터라 평범한 금제의 법보와는 확연히 달랐다.

    ‘법보의 금제가 64도에 도달한 뒤 더 나아가면 각 금제가 서로 연결되는 건가?’

    심협은 낙보금전을 살펴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법력의 소모를 아까워하지 않고 결인하여 제련하기 시작했다.

    적의 법보를 격추할 수 있는 이 법보는 조금만 제련해도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도마뱀은 두 사람을 태우고 매우 빠르게 달렸고, 금방 하루가 지났다.

    그사이 거청천 등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안 쫓아오는 건지 따라잡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심협은 안심이 됐다. 다만 비석의 안내가 없다 보니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감에 맡기고 나아가야 했다.

    앞은 여전히 끝없는 사막이었고, 끝이 보일 기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환경도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심협은 문득 자신이 잘못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도마뱀을 멈추고는 더 나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줄곧 눈을 감고 정양하던 섭채주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왼쪽 앞을 바라봤다.

    “왜 그래?”

    “저쪽에서 방금 무력(巫力)의 파동이 느껴졌어요.”

    “무력(巫力)이?”

    “아주 미세하고 순간적으로 사라진 거라서 저도 확신할 수는 없어요.”

    “일단 가보자.”

    심협은 곧장 도마뱀을 그쪽으로 몰았다.

    그러나 다시 반나절을 가는 동안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무력(巫力) 파동의 근원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착각했나 봐요.”

    섭채주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상관없지. 오히려 뭐든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일단 가보는 게 좋아.”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나아갔다.

    다시 반나절 정도 가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먼 곳을 바라봤다. 전방의 하늘 끝이 희미하지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채주, 저길 봐. 저게 뭘까?”

    마침내 약간의 변화를 발견한 심협은 눈을 반짝이며 유명귀안을 극한으로 발동했지만,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불 구름 같아요.”

    섭채주가 눈에서 실제 같은 금빛을 쏘며 말했다.

    “눈이…… 일종의 동술인가?”

    “이건 후예대신 전승 중 금정(金睛) 신통인데 궁전(弓箭)의 술과 함께 사용하면 먼 곳을 살펴보기 좋아요. 다만 이 신통은 무력이 많이 소모되고, 또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자유롭게 제어할 수가 없네요.”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원기를 소모하는 술법은 쓰지 않은 게 좋겠어.”

    심협이 다급히 말하자 섭채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의 금빛을 지웠다.

    두 사람은 계속 불 구름이 있는 쪽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한 시진을 가서야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다.

    하늘은 온통 붉은 불 구름으로 가득해 마치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고, 땅은 말 그대로 불바다라 활활 타오르면서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다.

    도마뱀은 이런 고온을 견딜 수 없었기에 멀찍이 세워뒀다.

    “왜 불바다가 있는 걸까요? 우리가 잘못 온 걸까요?”

    섭채주가 눈앞의 불바다를 바라보며 물었다. 불바다에 가까워지자 지금 그녀의 실력으로도 뜨거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내 생각에는 정확하게 잘 온 것 같아. 이곳이 목적지이자 이 3층의 시련 중 하나일 거야.”

    “시련이요? 아, 그렇겠구나!”

    “채주, 금정동술로 불바다 안에 뭐가 있는지 봐줄 수 있어?”

    심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자신에게야 저 불바다가 별건 아니지만, 섭채주의 안위를 위해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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