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화. 살심(殺心)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은 몇 차례 사막 요수의 습격을 받았지만, 이들은 육체와 신법만 발휘해 번갈아가며 서원마봉으로 사막 요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매번 싸움이 끝나면 구렁이를 구워 배를 채우고 체력과 혈기를 보충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법력은 더 소모되지 않았고, 오히려 상당히 보충되었다.
한낮이었다.
태양은 유달리 뜨거웠지만, 심협은 짐승의 뼈와 구렁이 가죽으로 만든 우산을 든 채 섭채주와 함께 도마뱀을 타고 이동했다.
섭채주가 저 먼 곳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오라버니, 저기! 나무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심협이 그곳을 바라보자 수십 리 떨어진 모래 위에 녹주(綠洲)가 있었는데 연한 녹색과 노란 사막이 대조되어 눈에 띄었다.
심협은 경계심에 영목신통을 운공하여 신기루 같은 환상이 아님을 확인한 후에야 환하게 웃으며 바로 도마뱀을 몰아 그곳으로 달렸다.
녹주에 가까워진 심협은 손을 휘둘러 통령지술로 도마뱀을 돌려보냈다.
“왜 그래요?”
섭채주가 의아한 듯 묻자 심협은 전방을 응시하다가 좌우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크게 외쳤다.
“초면도 아니거늘, 그렇게 숨어 있을 필요가 있소이까?”
그의 말이 끝났지만 전방의 녹주는 조용했고,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섭채주도 긴장한 채 신념을 풀어서 전방을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어쩔 수 없지.”
심협이 피식 웃더니 손을 휘두르자 순양비검이 바람을 가르며 곧장 녹주 안의 구불구불한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쾅!
폭음과 함께 나무가 터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한데 불꽃에서 세 사람이 흩어지더니 땅에 내려서서 심협과 섭채주를 포위했다.
주위를 둘러본 섭채주는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세 사람은 바로 거청천과 염열 그리고 만수진인이었다.
“허허, 심 도우. 무탈해서 다행입니다.”
만수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달리기가 상당히 빠르구려.”
심협이 순양비검을 거두며 차갑게 웃었다.
“우리를 어떻게 찾아냈지?”
거청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연히 내 벗이 미리 전음으로 알려준 덕이지. 아니면 신식이 제한된 이곳에서 내 어찌 댁들을 찾아냈겠소?”
심협이 히죽 웃으며 만수진인을 보고 눈을 살짝 찡긋하자 세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저놈의 헛소리를 듣지 마시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소? 나는 두 분과 동맹이니 저자를 죽이는 게 당연하지 않소.”
만수진인은 나머지 두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자 황급히 변명했다.
“만수 도우, 이왕 이렇게 된 거 더는 숨기지 맙시다. 우리 셋이 힘을 합쳐서 저들을 죽이고, 약속한 대로 거청천의 보물은 우리에게 넘기고 염열이 가진 동화산선의 법보는 모두 당신이 가지시오.”
심협의 말에 거청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고, 만수진인은 혀를 찼다.
‘거청천 이 한심한 작자의 의심병이 도졌군!’
이어서 만수진인이 염열을 돌아보며 말했다.
“염 사형, 사형은 저 말을 믿지 않겠지요?”
염열의 눈에서 의심의 빛이 스쳐 지나가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거 도우, 내 아까 심협의 묵혼비와 청천연을 금오화살, 벽해요어와 교환했는데, 그때 두 보물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모양이오. 덕분에 우리가 있는곳을 미리 감지한 거겠지.”
“그렇지! 그런 게 분명하오!”
만수진인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아, 알겠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시오.”
거청천은 손을 내저으며 대충 대답했으나,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이때 심협이 갑자기 물었다.
“그야 네가 준 청천연과 묵혼비 덕분이지. 만약 이 두 보물에 담긴 공간의 힘이 아니었다면 마지막에 강제로 전송법진을 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염열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두 사람의 생명의 은인인 셈인데…… 어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은혜를 갚으러 온 것 같지는 않소?”
“은인? 허허, 심 도우. 농담도 잘하시오. 지금 우리 셋은 동맹이니 순순히 항복하시오. 그럼 목숨만은 보장하겠소.”
만수진인이 먼저 말했다.
“만수 도우, 아직도 연극을 하는 게요? 이러면 나도 더는 당신을 믿기 힘들지 않겠소?”
그 말에 만수 도우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수작질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그는 버럭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두 사람이 정말로 오해할까 봐 걱정이 앞서 곧장 달려들었다.
그의 추운축전화(追雲逐電靴)에서 영광이 빛나더니 순식간에 잔상이 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심협은 미리 발동해둔 유명귀안을 반짝이더니 사월보를 시전하여 가볍게 옆으로 피했고, 만수진인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심협은 손에 든 순양비검을 크게 휘둘렀다.
만수진인은 자신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심협의 일검에 허리가 잘렸다.
하지만 잘린 몸의 상처에서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몸이 일그러지더니 바로 물보라처럼 변하여 사라졌다.
“수월환상(水月幻象)…….”
섭채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 심협이 다급히 외쳤다.
“채주, 조심해!”
그 순간, 만수진인이 갑자기 섭채주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는 일부러 심협을 공격하여 환술로 속이고는 실제로는 섭채주를 노린 것이었다.
“늦었다!”
만수진인이 싸늘하게 외치더니 손에서 금빛을 반짝이며 금룡쌍전을 쥔 채 섭채주의 목을 베려 했다.
그러나 섭채주는 그가 수월환상을 시전한 것을 알아챘을 때 이미 양손을 결인해둔 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뒤에 묶인 띠에서 법보의 영광을 뿜어냈다.
만리권운이 바로 뻗어 나가 금룡쌍전을 휘감고는 뱀처럼 만수진인의 목까지 휘감기 위해 날아갔다.
만수진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수중의 금룡쌍전을 여전히 힘껏 날려 보냈다. 이어 그의 허리에서는 가느다란 노란 빛이 가슴 쪽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만리권운이 목을 휘감기 직전에 가느다란 노란 빛에서 오래된 동전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만리권운을 감싸고 있던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손수건처럼 땅에 떨어졌다.
“죽어라!”
만수진인의 금전이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섭채주에게로 날아들었다.
금빛이 떨어지는 순간, 섭채주는 평보청운화를 발동하여 재빨리 피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잘려 허공에 휘날렸다.
거청천은 여기까지 보고서야 마침내 만수진인을 완전히 믿게 됐다.
심협은 섭채주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등 뒤로 숨기며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근데 법보를 잃어서 속상해요.”
섭채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중에 다시 찾으면 돼.”
심협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섭채주는 알지 못했다. 지금 만수진인을 바라보는 심협의 눈빛이 얼마나 싸늘한지.
만리권운을 소매에 챙겨 넣던 만수진인은 심협의 눈빛을 느끼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거 도우, 염 사형. 구경만 할 거요?”
그 말에 염열이 말없이 소매에서 무진선을 꺼내 손에 쥐었다.
“걱정 마시오. 저 두 사람은 오늘 여기서 죽게 될 게요.”
거청천도 소매에서 팔각형 상자를 꺼냈다.
‘어떻게 저들은 저물 법기를 열 수 있는 건가?’
심협의 의아한 눈으로 이들을 살폈다. 한데 가만 보니 저들은 소매에서 법보와 기물을 꺼냈다. 소환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염열과 만수진인이 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전송될 때 변고가 일어나면 바로 대응하기 위해 저물 법기에 넣지 않고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고, 거청천은 원래부터 몇 개의 언갑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뿐이다.
거청천이 손을 휘두르자 팔각형 상자가 땅에 떨어졌고, 그 위의 언문이 빛나면서 찰칵하고 열렸다. 뒤이어 한 줄기 검은 빛이 빛나더니 그 안에서 체구가 우람한 칠흑 언갑이 튀어나왔다.
언갑은 갑옷을 입은 무사 같았는데, 갑옷과 투구 사이로 시뻘건 근육이 보였다. 심지어 어떤 부분은 갑주의 균열 밖으로 튀어나와 갑옷을 뒤덮고 있어 마치 피와 살이 갑주와 같이 자라난 것 같았다.
“심협, 너도 언갑에 정통한 편이니 내 혈륜왕(血輪王) 언갑이 어떤지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나?”
거청천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검은 언갑이 심협을 향해 돌진해 왔는데,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검게 번득이는 장도(長刀)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움직임에 제한이 있어서 누구도 감히 높이 뛰어오르지 못했다. 높이 뛰어올랐다가 하늘의 결계 금제의 힘에 몰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협은 섭채주를 보호하기 위해 피하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말아 쥐고는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휘둘렀다.
혈윤왕도 기세를 줄이지 않고 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검은색 도광과 적홍의 검기가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격렬하게 충돌했다.
챙!
도와 검이 충돌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두 줄기 바람의 장벽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검과 도의 주인은 누구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힘만 따지고 봤을 때는 무승부였다.
그 무렵, 다른 쪽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염열이 가세해 무진선을 휘두르자 바람의 칼날이 심협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은 얼른 한 손을 내밀었다. 손에서 불꽃이 타오르더니 세 자루 순양검이 바람의 칼날을 향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세 자루의 장검이 서로 진형을 이루고 어우러지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검에서 검광이 뿜어져 나오고 한 줄기 불꽃이 타오르자 마치 불꽃에 휩싸인 유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날아갔다.
꽈꽝!
화염의 검광과 바람의 칼날이 격렬하게 충돌하자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무진선의 강력한 바람의 힘은 순식간에 불꽃과 먼지가 되어 사라진 반면, 유성 같은 불꽃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어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더니 세 마리의 금오검령이 일제히 나타나 염열에게로 맹렬히 달려들었다.
염열은 불꽃을 감지하는 데 예민해서 눈앞에 나타난 세 마리 금오의 검령이 단지 불꽃으로 만들어진 허상이 아닌 진짜 금오의 혼임을 눈치채고는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무진선을 연달아 휘두르며 법력을 쉬지 않고 주입했다. 그러자 바람의 칼날이 휘몰아치더니 곧장 세 마리의 금오검령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검령이 된 금오의 움직임은 비검보다 민첩해서 날개를 좌우로 움직여 칼날을 피하고는 곧장 염열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가느다란 노란 빛이 또다시 나타나더니 한 마리의 금오검령을 향해 날아왔다.
방금 바람의 칼날을 피하느라 급히 방향을 틀었던 금오검령은 낙보금전의 접근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땅 하는 충격음과 함께 순식간에 영력이 사라진 것처럼 불꽃이 완전히 사라졌다.
비검의 본체가 드러났는데, 그 위의 금빛도 사라져 고철처럼 땅에 떨어졌다.
한 자루의 비검을 공격한 뒤에도 낙보금전은 돌아가지 않고 충돌의 힘을 빌려 또 다른 금오검령을 향해 날아갔는데, 그 속도는 좀 전보다 더 빨랐다.
또 하나의 금오검령이 당하려던 순간, 갑자기 한 줄기 빛이 휘몰아치며 날아오더니 금오검령의 옆을 가로막았다.
다른 두 마리의 금오검령은 이 틈에 비스듬히 날아올라 좌우에서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염열은 무의식적으로 허공으로 피하려다가 화들짝 놀라 가까스로 멈추고는 다시 무진선을 휘둘러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잠깐의 머뭇거림 때문에 이미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