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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951화 (951/1,214)
  • 951화. 기습

    회오리가 지나가자 움푹 파인 땅에 반쯤 잘린 검은색 비석 받침이 나타났다.

    심협이 몸을 숙이고 살펴보니 절단된 부분은 평평하고 예리했다. 절단면의 색깔은 본래 석재와 같은 색이었고, 바람이나 모래에 침식된 흔적도, 얼룩도 없었다.

    “절단면을 보니 누군가에 인위적으로 자른 거예요. 그것도 얼마 전에요.”

    섭채주도 다가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앞서간 자가 그런 거겠지. 비석 전체를 가져갔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여기에 어떤 금기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됐어. 이렇게까지 하다니, 죽일 놈들…….”

    심협이 이를 갈자 섭채주가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시간을 거스르는 신통을 사용하면 이 비석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비석에 적힌 내용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심협은 크게 기뻐했지만, 이내 웃음을 거두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그냥 한번 해보는 건 괜찮잖아요. 법력이 모두 소모되면 소요경으로 들어가서 쉬면 되니까요.”

    “안 돼. 시간을 거스르는 신통은 법력 소모가 클 뿐만 아니라 혈맥의 힘도 소모돼. 너에게 부담이 너무 커. 게다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안 돼.”

    심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섭채주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은 왠지 모르게 따뜻해졌다.

    “그럼 어디로 가면 좋죠?”

    심협은 땅에서 모래를 한 움큼 쥐고는 천천히 손가락을 벌렸다. 모래가 손에서 조금씩 흘러내렸다. 하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모래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곳에는 천지영기가 흐르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니 이전에 누군가 움직였다면 발자국이 남아 있을 거야.”

    “그들이 날아서 갔으면요?”

    “아니. 이 비경은 대부분 허공에 금제가 있으니 누구도 날 수가 없어.”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섭채주가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먼 곳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저기!”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니 전방의 모래 바다가 마치 파도처럼 솟아오르더니 일렬로 정렬하여 이쪽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심협은 섭채주 앞을 막아서더니 크게 손을 휘둘렀다.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가 땅속으로 파고들었고, 땅이 강하게 흔들렸다.

    한 겹의 모래 파도가 수십 장 높이까지 터져 나가더니 네 구의 거대한 회갈색 물체가 땅에서 튀어나왔다.

    자세히 바라보니 도마뱀 같이 생겼지만 수십 배나 컸고, 온몸이 회갈색 비늘로 덮인 데다 등에는 가시가 솟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막 도마뱀으로, 더욱 특이한 점이라면 눈이 하얀색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땅으로 나온 네 마리 중 두 마리의 도마뱀이 심협을 향해 입을 벌리자 두 개의 노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빛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났고, 심협은 곧장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바닥이 날아가더니 두 개의 노란 빛과 충돌했다.

    콰쾅!

    굉음이 울려 퍼지고 거대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두 갈래의 바람 소리가 좌우에서 들려왔는데, 나머지 두 마리의 도마뱀이 거대한 꼬리를 휘두른 것이었다.

    섭채주가 반사적으로 날아올라 피하려 하자 심협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는 남은 손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순양비검이 좌우로 날아가 두 개의 화염 대검이 되어 도마뱀들의 거대한 꼬리를 대번에 잘라 버렸다.

    “방심하면 안 돼.”

    심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방의 불꽃은 사라졌고, 노란 빛을 발사했던 두 마리의 도마뱀도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번천인을 꺼내 아래를 내려찍으려 했다. 하지만 손을 휘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물 법기가 안 열리잖아!”

    심협이 다른 수를 쓰기도 전에 발아래 사막이 갑자기 움푹 파이더니 두 마리 도마뱀의 커다란 입이 튀어나왔고, 동시에 두 개의 노란 빛이 발사되기 직전이었다.

    심협은 서둘러 허리춤의 양시대에서 귀등상인의 연시를 소환해 막으려 했지만, 양시대 역시 금제의 힘에 뒤덮여 열리지 않았다.

    그 순간, 두 줄기의 노란 빛이 대량의 모래를 녹이며 두 사람에게 날아왔다.

    “허공으로 도망치도록 몰아세우는 게로군.”

    절체절명의 순간, 심협이 한 손으로 섭채주의 허리를 감싸고는 위로 뛰어오르자 발밑에 두 자루 비검이 나타나 두 사람을 받쳤다. 동시에 검에서는 검망이 뿜어져 나왔다.

    수많은 금색 검광이 질풍처럼 발아래의 구멍으로 쏟아지자 부러지고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모든 검광이 사라진 후, 땅에 생겨난 구멍은 이미 몇 배나 커져 있었다. 그 안에는 온통 도마뱀의 부러진 몸과 발톱뿐이었다. 산산조각 난 시체는 노란 피와 섞여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흉했다.

    심협은 옆으로 조금 이동하여 땅으로 내려간 뒤 다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광이 날아가 아직 남아 있던, 꼬리가 잘린 두 마리 도마뱀을 동시에 두 동강 냈다.

    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발로 툭 차서 도마뱀의 잘린 다리를 하늘로 띄웠다.

    처음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으나 수백 장을 날아가자 잘린 다리 주위의 허공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보이지 않는 힘에 삼켜진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식을 조금 흘려보낸 심협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갔다.

    “왜 그러세요?”

    “허공에 금제의 힘이 있어. 양시대 안의 연시를 나오게 했는데, 연시 역시 허공에서 사라져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날지 못하면 걸어서 가면 되니까 괜찮을 거예요.”

    섭채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심협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심협이 망망한 모래 바다를 바라보더니 자신이 신고 있던 평보청운화를 벗어서 섭채주의 발 앞에 내려놨다.

    “평보청운화는 풍속성의 법보니까 네가 신어.”

    “후예의 힘을 흡수한 이후로 몸이 이전과는 다르게 강해졌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뒤처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섭채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못 따라올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이곳의 허공에는 천지영기가 전혀 없고 머리 위의 저 태양의 열기도 매우 이상해서 그래. 저런 괴물들의 습격이 적지 않을 텐데, 이 영화를 신으면 움직임이 가벼워지고 반응도 더 빨라질 거야.”

    “그럼 오라버니는요? 제 신발을 신으려고요?”

    섭채주가 자신의 분홍색 신발을 가리키며 가볍게 웃었다.

    “난 신발이 없어도 괜찮아.”

    심협이 씩 웃더니 바로 양말을 벗고 바짓단을 훌훌 걷고는 맨발로 섰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섭채주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신발을 벗기려 했다.

    섭채주는 이미 그와 도려가 되었지만 여전히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심협의 마음을 알기에 그가 평보청운화로 갈아 신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영화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저절로 줄어들어 그녀의 가느다란 발에 꼭 맞아떨어졌다.

    “음, 좋아.”

    “이제 가요.”

    심협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자 섭채주가 웃으며 말했다.

    손을 잡은 채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로 길게 이어졌다.

    한데 두 사람이 멀리 가고 나자 땅의 모래가 천천히 흐르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두 사람의 발자국을 지웠고, 버려진 장화도 점점 모래에 파묻혔다.

    심협과 섭채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두 사람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만, 서로가 곁에 있으니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망망한 사막이 아니라 보타산의 해안가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떠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의 모래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더니 일고여덟 마리의 거대한 검은 게가 모래를 뚫고 나와 번들거리는 시커먼 집게를 휘두르며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해 온 것이다.

    이 게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껍데기가 매우 단단해 심협의 3할의 힘이 담긴 일검에도 뚫리지 않았다.

    검은 게가 입에서 미친 듯이 뿜어낸 거품이 허공에 대량으로 나타나더니 두 사람을 가운데로 몰았다.

    칠색 광택이 나는 거품이 뜨거운 태양에 비추자 빠르게 팽창하더니 곧이어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위력은 고급 폭열부를 능가했다. 다만 그 정도로는 심협과 섭채주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고, 두 사람은 금방 모든 게를 처리했다.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걸었고, 사막은 끝이 없는 것처럼 넓고도 넓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이번에는 한 무리의 전갈 때문에 길이 막혔다. 이 전갈들은 앞선 도마뱀이나 게보다 크기가 작았지만 속도는 매우 빨랐고, 맹독이 번들거리는 꼬리의 침 때문에 심협과 섭채주는 꽤 애를 먹었다.

    전갈마저 처리하고 나자 이후 10여 리를 걷는 동안에는 사막 요수의 습격이 없었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었고, 두 사람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면서 뜨거운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사막의 기온은 빠르게 내려갔다. 대신 본래 죽은 듯이 조용하던 사막이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각양각색의 사막 요수들이 다시 활발하게 움직여 마치 파도처럼 잇따라 공격해왔다.

    심협과 섭채주는 피하지 않고 요수들을 족족 처리했다. 결국 조금도 쉬지 못하고 태양이 뜬 후에야 마침내 마지막 요수인 구렁이를 죽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기진맥진하여 서로에게 기대어 땅에 주저앉았다.

    사방은 각종 요수의 시체로 가득했고, 피 냄새가 뒤섞여 실로 고약했다.

    “지치는구나. 법력이 이전보다 더 많이 소모됐어.”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밤이 되니까 미친 듯이 공격을 해오는군요. 밤사이에 수백 리 안의 사막 요수는 다 죽인 것 같죠?”

    섭채주도 길게 숨을 내쉬고는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먼 하늘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지막에 죽인 황갈색 구렁이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바른 뒤 불을 지펴 굽기 시작했다. 이 구렁이는 피부가 매우 거칠고 단단했지만 육질은 부드러웠다.

    심협이 뱀의 뼈로 두 개의 커다란 뱀 고기 꼬치를 만들어서 불더미 위에 놓고 굽기 시작하자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서 노릇노릇한 윤기가 흘렀다.

    뱀 고기의 향에 피비린내가 조금씩 사라졌다.

    “좀 먹어둬. 그래야 힘을 보충할 수 있을 거야.”

    심협은 잘 익은 뱀고기를 섭채주에게 건네며 말했다.

    섭채주는 받아서 작게 베어 물고는 이내 눈이 반짝였다.

    “생각보다 맛있어요. 오라버니도 어서 먹어봐요.”

    심협도 그녀 곁으로 돌아와 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한데 몇 번 베어 물던 심협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뱀고기를 든 손을 멈췄다.

    “왜요? 독이라도 들어 있나요?”

    “내가 전에 줬던 서원마봉을 저물 법기에 넣어놨어, 아니면 쭉 몸에 지니고 있었어?”

    심협이 불쑥 물었다.

    “오라버니가 이 보물은 꽤 특별하다고 해서 쭉 소매에 넣고 다녔는데…… 왜요?”

    섭채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잘됐어!”

    심협이 기쁜 듯 웃자 섭채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소매에서 서원마봉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곳은 사실 천지영기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희박한 것뿐이야. 하지만 이곳의 사막 요수들은 줄곧 여기서 생존해왔으니 몸에 상당한 양의 천지영기를 모아놨을 거야.”

    그제야 섭채주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심협이 일어나더니 서원마봉을 들고 전갈 시체로 가서 관절 사이 껍데기의 틈을 쿡 찔렀다.

    서원마봉은 순조롭게 파고들었고, 전갈의 시체는 매우 빠르게 말라 잿더미가 되더니 흩어졌다. 그러자 피와 살의 원기로 만들어진 약간의 천지영기가 심협에게 흡수되었다.

    “역시 되는구나. 다만 양이 너무 적어서 아쉽군.”

    심협은 혀를 차더니 서원마봉을 다시 섭채주에게 건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계속 날 보호하느라 오라버니의 법력 소모가 더 컸으니 먼저 해요.”

    섭채주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얼마나 더 험난할지 몰라. 그러니 네 법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안심하겠어?”

    그 확고한 목소리에 섭채주도 어쩔 수 없이 서원마봉을 받고는 사막 요수 시체의 절반 정도를 찌르고 다녔고, 서원마봉을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이 남은 사막 요수의 시체를 마저 흡수했을 때, 태양이 온전히 떠올랐고, 주위의 온도도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어서 출발해요.”

    섭채주는 심협이 가만히 서 있자 재촉했다.

    “이렇게 뜨거운 대낮에는 계속 걷고, 밤마다 사막 요수들과 싸운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그럼 어쩌죠?”

    “잠깐만.”

    심협은 씩 웃더니 가부좌를 틀고 결인해 통령지술을 시전했다.

    잠시 후, 푸른 물 동굴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나더니 거대한 도마뱀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며 빠져나왔다.

    땅에 내려선 도마뱀은 순순히 바닥에 엎드리더니 심협의 발에 머리를 댔다.

    “도마뱀이 있으면 많이 편하겠지.”

    그는 섭채주와 함께 도마뱀의 등에 올라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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