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화. 앞지르다
심협이 만 개의 선옥을 꺼내 훼멸명왕의 단전 법진에 붓자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단령법진이 붉은 빛으로 번득이면서 선옥을 영력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언갑 안의 영력을 채우기에는 퍽 부족했다.
“천존에 근접한 언갑답게 소모도 엄청나구나.”
그럼에도 심협은 씩 웃더니 다시 오천 개의 선옥을 넣었다. 그러자 그제야 언갑의 영력이 전부 채워지면서 훼멸명왕이 모든 것을 멸할 것 같은 기운을 뿜어냈고, 심협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 언갑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협은 설렘이 담긴 눈으로 소요경에서 나왔다. 훼멸명왕은 소요경 안에 넣어둔 상태였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패인 만큼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했다.
그는 밀실에서 나오자마자 일검에 문밖의 금제를 부쉈다. 다른 사람이 이곳의 비밀을 눈치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심협은 천공전에서 나와 다시 지도를 꺼내 보고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천선미궁에는 금석각과 천공전 이외에도 연기전과 영수원이 있다. 그 안에도 분명히 보물이 가득할 테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심협은 지도를 보고 날아가 일각 만에 영수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설렘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영수원의 배치는 천공전과 비슷했고, 입구는 거대한 돌문이었다. 한데 그 대문을 누군가 부순 것처럼 반쯤 무너져 있었고, 내부도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영수원은 천공전보다 열 배는 더 넓어서, 마치 작은 비경 같았다. 하늘은 짙푸르고 구름이 떠다녔으며 땅에는 높이가 백여 장쯤 되는 작은 산이 두 개 있었다. 산은 꽃과 나무가 우거졌고, 시냇물이 두 산 사이로 흘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영수원 곳곳에는 검은색 짐승 우리들이 있었는데, 30여 개는 됐다. 우리는 하나하나가 수십 장이었고, 검게 번득였다.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단단해 보였다. 그 주위에는 또 매우 복잡한 문로가 새겨져 있었고, 이는 금제 영문이었다.
다만 모든 짐승 우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금제 영문도 빛을 잃은 것을 보니 모두 부서진 상태였다. 짐승 우리 안에는 각각 한 구의 삐쩍 마른 요수의 유골이 있었는데, 우리 안에 갇혀 있던 영수일 터였다.
“어떻게 된 거지? 누군가가 먼저 왔던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심협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는 소매를 휘둘러 한 구의 유골을 휘감더니 표정이 굳었다. 이 유골은 껍데기만 남고 모든 영력이 사라진 터라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영력을 흡수하는 모종의 신통으로 온몸의 정기를 빨아먹은 것 같군. 내 자세히 살펴볼 테니 유골을 소요경 안으로 넣어보아라.”
심협은 화령자의 말에 유골을 소요경에 넣고는 다시 영수원 곳곳을 조사했다.
우리마다 영수는 죽고 유골만 남아 있었는데, 그중 세 개의 우리에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우리들에는 유골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우리 안의 영수들은 도망친 모양이군. 내 예상대로라면 영수원 안의 유골과 도망친 세 마리 영수가 큰 관련이 있을 게다.”
화령자의 목소리가 소요경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심협도 동의하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천공전처럼 이곳에서도 대량의 보물을 긁어모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보기 좋게 깨져버린 것이었다.
심협은 영수원에 오래 머물지 않고 나와서 마지막 구역인 연기전으로 향했다.
지도의 안내가 있으니 미궁 속에서도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기전은 천공전이나 영수원과 마찬가지로 광활한 공간이었고, 네다섯 개의 커다란 석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곳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왔다 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영수원과는 달리 이곳을 휩쓸고 간 흔적은 최근에 생긴 듯했다.
“화령자, 단서를 찾을 수 있겠어?”
심협이 전음으로 화령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마치 일부러 숨기려는 것처럼 모든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놓은 상태라 화령자도 단서를 찾지 못했다.
화령자는 긴 말 없이 소요경에서 나와 곡현성반의 법진을 발동했다. 그러자 우윳빛 기둥이 곧바로 솟아올라 연기전 천장에 닿았다.
하얀 영문이 빛기둥에서 나오더니 천장을 타고 빠르게 퍼져 갔다.
화령자는 술법을 멈추지 않고 다시 곡현성반을 향해 결인했다. 그러자 은색 법진에서 수많은 은빛 광망이 퍼져 나갔다.
뒤이어 그가 양손을 빠르게 결인하자 은백의 두 법진 광망이 한데 어우러지더니 거기서 올챙이 같은 수많은 은백색 영문이 떠올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빠르게 주위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심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향도 이전에 곡현성반의 몇 가지 법진을 동시에 사용하긴 했지만, 각각이 따로 가동됐다. 한데 화령자는 두 개의 법진을 결합하여 시전하였으니 그의 수단이 도향보다 열 배는 뛰어난 것이 분명했다.
하얀 올챙이가 빠르게 연기전 전체에 퍼지더니 곳곳에서 단서를 찾기 시작했고, 허공에도 수많은 올챙이 부문이 떠돌아다녔다.
그때, 연기전 깊은 곳에서 갑자기 번쩍이는 하얀 빛이 번득였다.
“찾았다!”
화령자와 심협은 곧장 달려가 암홍색 벽 앞에서 섰다. 벽에는 대량의 하얀색 올챙이 부문이 붙은 채 광망이 번쩍거렸다.
심협이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화령자가 한 발 앞서 암홍색 벽 구석을 향해 붉은 빛을 쐈다. 그곳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아주 작은 홈이 하나 있었다.
쿠르릉!
암홍색 벽이 흔들리더니 옆으로 밀려나자 1장 정도 되는 작은 문이 드러났다.
“밀실?”
심협이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화홍색(火紅色) 석실이었는데, 폭은 10여 장 정도로 그리 넓지 않았다. 바닥에는 복잡한 화홍색 법진이 새겨져 있었는데, 진 안의 수많은 홈은 선옥이나 화염 정석을 설치했던 곳 같았다. 다만 지금은 홈들이 전부 비어 있었는데, 본래 이러했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정석을 빼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홍색 법진 중앙에는 둥근 구멍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수시로 엄청난 고온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연기법진인가?”
심협이 바닥의 화홍색 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재밌는 법진이네. 이화현양진(離火玄陽陣), 구구연화진(九九煉火陣) 그리고 용호정노진(龍虎鼎爐陣)을 이렇게 결합하다니, 정말로 기상천외하군.”
화홍색 법진을 바라보는 화령자의 눈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심협은 진법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했고 연기대진은 더더욱 알지 못했기에 화홍색 대진의 현묘함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구멍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색 대진이 떠 있었다. 소용돌이 같은 이대진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고, 소용돌이 대진을 지나 더 깊은 곳에 적홍색 불바다가 있었다. 용솟음치는 불꽃에 금색 불꽃이 섞인 바다가 용솟음칠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저 검은 대진은 뭐지? 기운이 마진(魔陣)은 아니고 또 음속성 법진도 아닌데…… 저 적과 금의 화염은 지화(地火)인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 천언궁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심협이 붉은 검기로 구멍 안의 검은색 법진을 베자 기다란 틈이 생기더니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기운에서는 특이한 기운 파동이 느껴졌다.
“무력(巫力)!”
허공에서 은빛이 반짝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의 섭채주가 나타났다.
“아래에 있는 게 무진(巫陣)같아.”
심협도 그 기운의 파동을 감지하고는 아래를 가리켰다.
섭채주가 서둘러 다가와 검은 법진을 바라봤다.
이 소용돌이 법진 안에서 영문이 반짝이더니 심협이 벤 틈이 빠르게 아물었고, 흘러나오던 무력의 기운도 함께 사라졌다.
“기운을 이렇게까지 숨길 수 있다니, 강력한 무진이에요!”
“채주, 이 무진이 어떤 법진인지 알 것 같아?”
“아니요. 전 그저 후예대신의 힘을 계승했을 뿐이라 무족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해요. 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저 법진은 일종의 소환 무진이고 그 아래 불꽃은 이 법진이 소환한 불꽃인 것 같아요.”
섭채주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언궁은 허공에 떠 있으니 지화와 통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불꽃은 소환해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오라버니, 여기가 어디예요? 왜 여기에 무진이 있는 거죠?”
섭채주는 지금까지 소요경에서 경지를 안정시키던 중 무력의 파동을 느끼고 바로 나온 것이라 지금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화령자, 법진 감상은 그만하고 누가 연기전을 쓸어갔는지 좀 알아봐 줘.”
심협은 그제야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났는지 서둘러 섭채주에게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옆에서 멍하니 화홍의 법진을 연구하던 화령자를 재촉했다.
화령자는 그저 바닥의 법진만 바라볼 뿐, 심협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수많은 하얀 올챙이 부문이 이곳으로 몰려오더니 커다란 하얀 손으로 변하여 허공을 움켜쥐었다.
미약한 검은색 실이 나타나더니 한곳에 모여들면서 거대한 검은 기운으로 변해 심협 앞에 떠올랐다.
“마기!”
심협은 바로 이 검은 기운의 정체를 알아봤다.
“아무래도 무라의 소행 같아요. 그녀도 천선미궁으로 들어왔군요.”
섭채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마기를 감지하는 감각이 매우 예민해 이 마기가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우리가 천언궁 2층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연기전을 찾아내고 이 안의 모든 물건을 약탈해 갔다는 건 뭔가 이상해. 그녀에게도 이곳의 지도가 있는 걸까?”
그때까지도 법진을 살펴보던 화령자가 마침내 다가왔다.
“그럴 수도…….”
심협은 굳은 얼굴로 돌아서서 나갔고, 화령자와 섭채주가 뒤를 따랐다.
미궁의 몇 군데가 털린 것을 확인한 심협은 바로 천선미궁 출구로 향했고, 한 시진 뒤에야 도착했다.
하얀 빛의 문이 앞에 떠 있었다. 1층에서 인형 언갑을 쓰러트린 뒤 나타나는 빛의 문과 똑같았다.
섭채주가 옆에 섰고, 화령자는 소요경으로 돌아갔다.
심협은 본래 섭채주에게도 소요경으로 들어가라 했지만, 그녀는 처음 가보는 천언궁 3층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하겠다고 했다.
심협은 결국 섭채주의 뜻을 꺾지 못했다.
“채주, 대신 날 바짝 따라와야 해.”
함께 빛의 문으로 들어간 심협과 섭채주는 이내 그곳에서 사라졌다.
심협과 섭채주는 3층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돌아섰지만, 빛의 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하늘 높은 곳의 태양에서 뜨거운 힘이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보이는 곳마다 온통 황량한 사막이라 생명체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아무래도 절지(絶地) 같아요. 허공에서 천지영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신식도 극도로 제한돼서 살펴볼 수 있는 거리가 백 장도 되지 않아요.”
“나 역시 3백 장 정도밖에 살필 수 없군. 더욱이 이곳에서는 신식의 힘을 발동하려면 소모가 배는 큰 것 같아.”
“3백 장은 큰 쓸모가 없으니까 차라리 힘을 아끼는 게 좋겠어요.”
심협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바로 신식의 힘을 거뒀다.
그 순간, 심협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앞으로 달려가 땅을 강하게 후려쳤다.
퍽!
한 줄기 바람이 소매에서 솟구치면서 땅에 회오리가 휘몰아쳤고, 모래가 사방으로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