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47화 (947/1,214)
  • 947화. 두 가지 조건

    심협은 거청천의 동부를 힐끗 보고는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무라는 심협과 거청천이 별다른 반응 없이 차례로 돌아가자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산골짜기로 들어갔고, 심협과 마찬가지로 산골짜기 안쪽의 전송법진과 비석을 발견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그녀도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현재 경지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정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바로 다른 산벽에 동부를 파고는 문을 닫고 정양에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 보름이 지났을 때, 전송법진의 어두운 진문이 하얀 빛을 발하면서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변화였지만, 심협 등은 거의 동시에 각자의 동부에서 튀어나와 서로 거리를 두고 법진 주위에 섰다.

    “시련이 마침내 시작되려는 건가?”

    심협은 눈에 흥분이 스쳐갔고, 손은 허리춤의 양시대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한 달간의 제련을 통해 태을 시체의 첫 제련을 완성했다. 실력은 천살시왕에 못 미치지만, 진선 절정의 실력이니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법진 안의 진문에서 하얀 빛이 천천히 솟아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발동하려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 또다시 바람 부는 소리가 산골짜기 입구에서 들려왔다.

    “또 누가 온 건가?”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굳이 가서 살펴보지는 않았다.

    잠시 후 나타난 두 사람은 염열과 만수진인이었다.

    심협과 거청천, 무라를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며칠 전 천언궁 부근에 도착했고,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다만 심협이나 무라가 이곳을 찾아낼까 봐 함부로 들어가지 않고 궁전 밖에 오랫동안 숨어 지내며 상황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한데 방금 궁전 밖의 하얀 광막이 갑자기 사라졌고, 두 사람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바로 빛의 문으로 들어왔다. 한데 심협과 무라만이 아니라 더 대단한 인물도 있으니 한숨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무라도 두 사람을 보고는 흠칫 놀랐으나,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반면 거청천은 또다시 ‘도둑놈들’이 들어오자 분노가 솟구쳤다. 애써 억눌러도 흘러나오는 살의를 감추기는 힘들었다.

    거청천은 태을 경지의 존재이니 그 살기가 얼마나 날카롭겠는가. 염열과 만수진인은 깜짝 놀라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섰다.

    하지만 거리가 멀다 해도 두 사람 모두 진선 수사라 이내 전송법진과 그 옆의 비석에 새겨진 글귀를 볼 수 있었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다만 눈앞의 세 사람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강자들이었으니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무라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적이었고, 경지가 더 강한 하얀 옷의 남자는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염열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더니 만수진인을 돌아보았다.

    “심 도우도 여기에 왔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만수진인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웃음을 머금고 심협에게 인사했다.

    심협도 염열과 만수진인의 등장에 내심 놀랐으나, 그간 얽힌 일이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아는 사이였기에 냉담하게 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염열과 만수진인은 이에 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심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으로 천천히 내려와 섰다.

    이를 본 거청천은 콧방귀를 뀌더니 그들을 무시하고 온 정신을 전송법진에 집중했다. 다음 관문으로 넘어가면 단숨에 저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전송법진의 진문이 어느 정도 번득이더니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 갑자기 멈췄고, 돌아가는 소리도 그쳤다.

    “무슨 일이지?”

    거청천이 굳은 표정으로 서둘러 다가가 법진을 살폈다.

    심협과 무라도 바로 다가갔다.

    세 사람은 전송법진을 둘러싼 채 자세히 살펴봤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심협은 화령자의 신식을 소요경에서 흘려보내 전송법진의 상황을 살펴보게 했지만, 그 역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두 분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거청천은 천언궁의 전승이 가장 중요했기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심협과 무라에게 물었다. 그는 실력이 강하지만 법진에는 정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전송법진은 진법 중에서도 특수한 데다가 공간의 힘과 관련이 있어 심오했기에 이런 종류의 진법을 심도 있게 연구한 사람만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심모는 진법의 도에 정통하지 않소. 전송법진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심협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가장 늦게 온 터라 이곳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천언궁이라는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전송법진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분이 절 믿어준다면 술법으로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럼 무 도우께서 수고 좀 해주십시오.”

    무라의 말에 거청천이 기뻐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거 도우께서 이리 서두르시는 걸 보니 이 전송법진에 시간제한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심협의 눈빛은 평온했지만, 마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힘이 있어 거청천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로써 그는 심협을 더욱 경계하게 됐다.

    “두 분께는 말씀드려도 무방하겠지요. 이 전송법진에는 분명 시간제한이 있소. 하루가 지나면 멈춰버릴 겁니다.”

    그 말에 표정이 변한 심협이 무라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무라 도우, 빨리 좀 살펴보시오.”

    무라는 이전의 원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심협을 힐끗 보더니 법진으로 다가가 결인하고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검은 빛이 전송법진을 뒤덮더니 천천히 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염열과 만수진인은 제자리에 서서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심협 등의 대화를 듣기만 했을 뿐, 끼어들 의사는 없어 보였다.

    시간이 흘러 순식간에 반나절이 지났지만, 무라는 여전히 탐색만 하고 있었다.

    심협의 표정은 평온한 반면, 법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거청천의 표정은 점점 초조해져갔다.

    그 표정을 보자 심협은 의아한 와중에도 뭔가 알 것 같았다.

    ‘보아하니 천언궁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군. 그러니 여기 들어온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였을 테고, 당연히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이 심리를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 도우, 후예의 묘에서 떠난 이후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이곳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구면이기도 하니 이번에는 다시 한번 손을 잡는 게 어떻겠소?”

    생각에 잠겨 있던 심협에게 염열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전음으로 물었다.

    “어떻게 손을 잡자는 거요?”

    심협이 염열을 돌아보며 전음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함께 저들과 대적하는 것이죠. 심 도우의 실력이 강하긴 하나 무라와 저자는 모두 쉬운 상대가 아니고, 어쩌면 저들도 이미 몰래 손을 잡았을지 모르지 않소? 그러니 우리 셋이 힘을 합치자는 것이오.”

    “두 분은 동화 선배의 제자인데 천언궁에 관해 뭔가 아는 게 없으시오?”

    심협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뜸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여러 번 창궁 비경에 들어오셨지만 천언궁에 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으셨소. 그러니 우리도 이곳에 관해 아는 것이 없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제야 이곳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오.”

    심협은 염열의 눈빛을 바라보며 그의 말이 사실인지를 판가름한 뒤에야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전음을 보냈다.

    “힘을 합치는 건 좋소.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소.”

    “말씀해보시오.”

    염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 분의 수중에 있는 내 벽해요어 영총을 돌려주시오. 또한, 후예 능묘에서 얻은 금빛 화살 세 개 중 하나를 주시오. 안에 있는 금오의 혼은 온전해야 하오. 이 두 가지 조건을 수락하면 두 분과 힘을 합치겠소.”

    “백해요어는 우리 수중에 있는 게 맞고, 본래 심 도우의 영수이니 당연히 돌려주겠소. 다만, 금오의 화살은 내가 후예 능묘에서 목숨 걸고 빼앗은 것인데 그냥 달라니,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염열이 눈살을 찌푸리며 전음으로 대답했다. 화속성 공법을 수련했기에 세 개의 금빛 화살에 담긴 금오의 혼은 그에게 매우 유용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요. 내가 빼앗은 세 개의 화살을 화 도우가 가로채간 것 아니오. 그러니 그 화살은 본래 내 것이오.”

    염열은 말문이 턱 막혔다. 심협의 말대로 세 개의 금빛 화살은 분명 그의 수중에서 빼앗은 것이었다. 다만 그로서는 금오화살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능묘에서의 보물 쟁탈전이야 본래 각자의 능력과 운에 달린 것 아니었던가. 그러니 자기 손에 들어온 이상 자신의 것이었다.

    다만 지금 그는 심협과 힘을 합쳐야 하는데 계속해서 거절했다가는 손을 잡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물론 아무런 조건 없이 화살을 내놓으라는 건 아니오. 이것과 교환하지요.”

    심협이 물건 하나를 내밀었는데 바로 묵혼비 법보였다.

    “지금 정말로 이 법보와 금오화살을 교환하자는 겁니까?”

    염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전음으로 물었다.

    후예 능묘에서 이 묵혼비와 청천연이 함께 공간을 조종하는 것을 직접 봤기에 이 보물이 중보인 것을 염열도 알고 있었다. 한데 그 중보와 금오화살을 바꾸자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더 이득이었다.

    “물론이오.”

    “좋소, 다만 교환 조건을 바꿉시다. 청천연도 함께 준다면 금오의 화살 세 개를 전부 드리겠소.”

    “좋소.”

    심협은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천연도 꺼내서 같이 건넸다.

    염열도 화살 세 개와 푸른 영수대(靈獸袋)를 같이 건넸다.

    “심협, 묵혼비와 청천연은 모두 쓸 만한 법보인데 정말로 저 두 놈에게 넘길 생각이냐?”

    화령자가 전음으로 물었지만 심협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신식으로 세 개의 화살에 담긴 금오의 혼들을 확인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세 마리 금오의 혼이면 세 자루의 순양검에 더 검령을 넣을 수 있게 되니 그의 본명법보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푸른 영수대 안에는 벽해요어가 들어 있었는데, 심협의 기운을 감지하자 반가운 듯 활개를 쳤다.

    심협은 세 개의 금빛 화살과 영수대를 소요경에 넣고는 벽해요어를 풀어줬다.

    벽해요어는 신이 나서 울어대며 소요경 안의 공간을 누볐다. 광풍이 휘몰아쳐서 소요경 공간 전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심협은 벽해요어의 강력함에 내심 깜짝 놀라 서둘러 법력을 소요경 안으로 넣어서 법력 분신으로 간신히 벽해요어를 진정시켰다.

    벽해요어는 심협이 나타나자 바로 달려왔는데, 온몸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거대한 몸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몇 호흡 뒤, 벽해요어는 열한두 살 정도의 소녀로 변하더니 심협을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치 밖에서 화를 당한 아이가 부모를 보자마자 대성통곡하는 것 같았다. 벽해요어는 태어나자마자 심협의 기운을 감지했고 또 통령지술의 작용까지 더해졌기에 심협을 자신의 부모처럼 여긴 것이다.

    심협은 이 소녀의 푸른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화령자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화령자, 염열이 벽해요어와 화살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지는 않았을까? 법력 각인 같은 걸 남겨놨다거나……. 살펴볼 방법이 있을까?”

    “당연하지.”

    화령자가 당당하게 말하더니 곡현성반을 발동했다. 그러자 뿜어져 나온 하얀 빛이 벽해요어와 화살 세 개를 뒤덮었다.

    한편, 열염은 신이 난 얼굴로 묵혼비와 청천연을 챙겼다. 이 거래는 모두에게 이득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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