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46화 (946/1,214)
  • 946화. 화평곡(和平谷)

    천언궁은 여전히 고요하게 허공에 뜬 채, 마치 천상의 궁궐처럼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협은 실력이 크게 정진하여 거청천에게 대항할 자신이 있었음에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조심했다. 그는 천언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섭채주를 소요경에 들여보내고 자신은 연연나금의를 발동하여 행적을 감추고 조용히 다가갔다.

    현재 천언궁 주위는 텅 비어서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거청천은 어디로 갔는지 더욱 알 수 없었다.

    “화령자, 거청천의 법보에 남긴 흔적이 아직도 있어? 그때 그 검이 부러진 것으로 기억하는데…….”

    심협은 전음으로 화령자에게 물었다.

    “내 자심지화는 연기의 신화(神火)여서 거청천이 부러진 법보를 다시 만들려고 녹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부근에는 분명 없다.”

    “그럼 어디에 있어?”

    “아까부터 감지해봤는데도 못 찾았다. 아무래도 법보의 파편이 봉인 효과가 있는 법보에 봉인되어 있거나, 진법 공간 안에 들어가서 내 감지를 막고 있는 모양이야.”

    “진법 공간? 다시 천언궁으로 들어간 건가.”

    심협은 전방의 거대한 궁전을 바라봤다.

    거청천은 천언궁을 잘 알고 있으니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다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심협은 더 가까이 다가가 천언궁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천언궁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겨서 주위에 두꺼운 하얀 광막이 하나 더 생겨나 궁 전체를 뒤덮었는데, 매우 단단해 어떤 공격으로도 부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식을 운공하여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단단한 힘에 막혀서 뚫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심협은 옆으로 날아가 하얀색 광막 옆에 멈춰 섰다.

    그곳의 하얀 광막에는 1장 크기 정도 되는 문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위에는 복잡한 언문이 새겨진 채 정광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여기가 입구인가?”

    심협이 무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든 시도해보면 알겠지.”

    화령자의 말에 심협도 동의하고는 소매를 휘둘러 금빛을 발사했다.

    문 무늬에서 갑자기 눈부신 은빛 문이 뿜어져 나오더니 반경 10여 장을 뒤덮었다.

    심협은 서둘러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은색 광망에서 갑자기 강력한 흡입력이 나와 심협의 몸을 휘감았고, 그는 반항할 틈도 없이 휙 하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눈이 은빛으로 가득해지더니 마치 거대하기 그지없는 소용돌이로 떨어지는 듯했다. 주위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빠르게 휘감아 가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신식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외에는 다른 불편함이 없었고, 이에 심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이 찢어지는 듯한 거대한 힘에 몸을 맡겼다.

    다행히 소용돌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금방 사라졌다. 눈앞에 가득하던 은빛이 사라지더니 푸른 빛이 가득한 곳이 나타났고, 뒤이어 그는 땅으로 떨어졌다.

    심협은 육체가 매우 단단해 이 정도로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몸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일어난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현재 그는 두 개의 산 앞에 서 있었는데, 산들은 푸른 나무가 빽빽하고 생기가 가득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산의 사이로는 골짜기가 하나 있었는데, 나무에 가려져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지만, 평온함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심협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신식을 운공하여 전방을 살펴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이곳은 천언궁 때와 마찬가지로 금제의 힘이 가득하여 신식이 겨우 몇 장만 뻗어나갈 수 있었다.

    “천언궁의 어디인 걸까?”

    심협이 긴장감을 끌어올린 채 산골짜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금방 탁 트이더니 붉은 꽃과 푸른 나무로 가득한 아름다운 산골짜기가 나타났다. 은하수 같은 거대한 폭포가 절벽에서 내려와 아래의 연못으로 떨어지자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고 물안개가 흩날렸다.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폭포 근처의 산벽에 동부가 하나 있었는데, 겉에 금제 영광이 빛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곳에 사는 게 분명했다.

    “누구냐?”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백색의 둔광이 동부에서 나왔다. 바로 거청천이었다.

    심협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금빛과 함께 현황일기곤을 꺼냈다. 체내의 순양검도 꿈틀거리면서 신통을 펼칠 준비를 했다.

    “잠깐! 심협, 난 너와 싸울 뜻이 없다.”

    거청천은 차가운 눈빛으로 심협을 노려봤지만, 양손을 들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지?”

    심협이 유명귀안으로 거청천을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거청천은 몇 번이고 목숨을 걸고 싸운 불공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여 싸우지 않겠다 하니 그 의도가 궁금했다.

    “이유는 산골짜기 안으로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거청천이 차갑게 말하더니 휙 돌아 동부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심협은 이 광경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굳이 거청천의 동부로 쳐들어가지 않고 돌아서서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산골짜기는 크지 않아서 겨우 10여 리 정도에 불과해 그는 금세 훑어보고는 골짜기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폭 30장 정도의 백옥 광장이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법진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바로 전송 법진이었다. 다만 그 안의 영문은 어두웠고, 작동하지 않았다.

    법진 옆에 푸른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몇 줄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노부 천언선존(天偃仙尊)은 평생 원수가 많아 수많은 생명을 빼앗았고, 그 결과 오늘 덮친 재난을 넘기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천지를 통달한 내 언술이 이곳에서 끊긴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특별히 평생 익힌 모든 것을 천언궁 최상부에 남긴다. 후세의 후학들은 인, 선, 마, 요, 무를 막론하고 시련의 시기에 이곳에 들어가 시련에 참가할 수 있다. 다섯 관문을 통과하여 노부의 공법을 얻어 천하를 누빈다면 노부는 죽어서도 여한이 없다.”

    이를 본 심협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천언선존이 어느 시대의 고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칭호를 봤을 때 아마 천존급의 대능이었을 터였다. 다만 이 비석의 내용만으로는 거청천의 태도가 왜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협은 갑자기 천선 미궁 입구에서 봤던 그 비석이 생각나자 뒤를 살펴봤는데, 역시나 뒤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 화평곡(和平谷)은 노부가 수련한 곳이기에 누가 됐든지 싸움을 용납지 않는다. 이를 어긴 자는 천언궁에서 쫓겨나 영원히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 -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

    심협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이기든 지든 두 사람은 완전히 이곳에서 쫓겨나 천언궁과의 인연이 끊기게 된다.

    그는 거청천의 동부를 힐끗 보고는 안심하고 계속해서 두 산골짜기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심협은 곧바로 다시 산골짜기로 돌아와 비석과 옆의 전송 법진을 살폈다.

    이 법진은 비석에서 언급한 시련과 관련이 있어 보였는데, 아마도 시련 참가자를 다음 관문으로 보내는 법진 같았다. 천언궁 주위에 갑자기 하얀 광막이 생겨난 것도 아마 이 시련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설마…… 지금이 시련 시기인가? 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기가 막힌 우연인데…….”

    심협의 눈이 번득였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거청천에게 빚을 갚고 바깥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렇게 큰 기연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만 전송 법진의 상황만으로는 이 시련이 언제 시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끝장을 보기 위해 거청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벽에 동부를 파고는 겹겹의 금제를 설치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바로 소요경으로 들어가 바깥 상황을 화령자와 섭채주에게 설명했다.

    “화령자, 천언선존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

    “아니, 못 들어봤다.”

    화령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에 심협은 조금 실망했다.

    “오라버니, 이제 어쩌죠?”

    “우선 상황을 지켜보자. 채주와 화 도우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줘.”

    “알겠어요.”

    섭채주가 대답했고, 화령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은 바로 다른 곳으로 가서 거대한 시체를 하나 꺼냈다. 귀등상인이 이전에 제련하던 태을의 연시였다.

    현재 그는 경지를 돌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새로 얻은 몇 가지 법보도 제련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단기간에 실력을 높일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태을 연시였다.

    허리춤의 양시대에서 귀등상인이 밖으로 나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심협이 시전했던 초혼술은 사라져 귀등상인은 현재 시기(尸氣)가 매우 짙어진 터라 거의 실체가 될 단계까지 이르렀다.

    귀등상인이 수련한 것은 연시 공법으로, 그가 체내에 쌓아 놓은 시기는 매우 짙었는데, 죽은 뒤로 더 폭증하여 그의 원래 경지를 초월하여 진선 후기 경지에 가까워졌다.

    심협은 천살시왕을 만들어본 적도 있고 천시진경에도 정통하니 바로 귀등상인을 조종하여 연시 옆에 앉게 하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콰쾅!

    두 줄기의 거대한 시기가 귀등상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가 태을 시체에 주입됐고, 연시술(煉尸術)을 이어갔다. 심협이 천시진경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그의 수련 공법은 연시 일맥이 아니었고, 심지어 완전히 반대에 가까우니 차라리 귀등상인이 이 시체를 제련하는 게 더 빨랐다. 더욱이 화령곡은 천지영기가 매우 짙어 연시에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심협은 거청천과 이웃하며 지냈다. 양쪽 모두 종일 각자의 동부에 머물다가 전송법진을 살필 때만 나왔는데, 이따금 마주쳐도 대화는 없었다.

    보름이 지났을 때, 산골짜기 입구에서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산골짜기에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고, 천지영기가 어지러워졌다.

    심협과 거청천은 거의 동시에 이 변화를 감지하고는 동부에서 튀어나왔다.

    산골짜기 입구 허공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수많은 빛이 번쩍이면서 은빛 법진이 만들어졌다.

    “누가 또 오는 건가?”

    심협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은색 법진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득이더니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의 몸 주위는 마기로 가득했다. 다름 아닌 무라였다. 다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당초 후예 능묘에서 봤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이곳에서는 비록 신식을 펼칠 수 없었지만, 심협에게는 유명귀안이 있었기에 가볍게 무라의 지금 경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진선 절정의 수준으로, 태을기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전삼칠의 몸에 빙의한 뒤 경지를 회복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경지를 숨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는!”

    무라 역시 심협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너도 올 줄은 몰랐군.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심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무라는 차갑게 비웃더니 심협에게서 시선을 돌려 거청천을 바라봤다. 신식을 펼칠 수 없었기에 그녀는 거청천의 진짜 실력을 감지할 수 없었지만, 그 느낌만으로도 진선기는 아닐 터였다.

    ‘태을 수사인가?’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거청천 역시 무라를 관찰했는데, 상대의 실력이 약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는 이를 갈았다.

    천언궁은 거씨 가문 선조가 발견한 땅으로, 그 안의 전승은 일찍부터 자신의 것이라 여겼다. 결코 다른 사람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건만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몰려와 빼앗으려 들었다. 한데 여기 화평곡은 또 싸움을 금하고 있어 이 도둑놈들이 들어오는 것을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거청천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말없이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이를 본 심협은 다소 놀랐다. 그와 무라가 적대적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거청천이 무라를 끌어들여 자신을 방해한 것이라 추측해왔던 심협으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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