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26화 (926/1,214)
  • 926화. 유지산(油紙傘)

    “무진선(無塵扇)은 역시 대단하군.”

    만수진인이 감탄하고는 커다란 깃발을 꺼내 들고 흔들었다.

    촤라락!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파도가 몰아쳐 순식간에 근처의 독전갈을 휩쓸어 담장 끝까지 몰더니 격렬한 검은색 소용돌이로 변하여 휘몰아쳤다. 소용돌이 안에서 격렬하게 교차하는 천지영기가 맷돌처럼 독전갈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전삼칠도 손을 휘둘렀는데, 천 개의 검기가 뿜어져 나가 독전갈들을 베었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전삼칠은 팔짱을 끼고 귀등상인을 바라봤다.

    “귀등 도우, 모두가 힘쓰고 있는데 그렇게 방관하는 건 너무 하지 않소?”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심협이 분혼(分魂)으로 조종하는 귀등상인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제 심협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공격을 시전해야 하는데 자신의 신통 법술을 시전할 수는 없었다.

    “모두를 위해 경계하고 있었을 뿐이오. 이제 내 차례니 잘 보기나 하시오.”

    심협은 일부러 전삼칠을 도발하고는 만귀번을 발동했다. 깃발에서 음살의 기운이 폭증했고, 검은색 귀기가 뿜어져 나와 안개의 파도처럼 독전갈을 휩쓸었다. 안개가 지나는 곳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침식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독전갈들은 이내 뒤집어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옆까지 뻗어오자 모두가 경멸하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귀등 도우, 독전갈과 살벌독충은 모두 처리됐으니 신통을 거둬도 될 것 같은데요.”

    도향이 외친 후에야 귀등상인은 소매를 휘둘렀다. 검은 안개가 점점 수축하여 다시 만귀번으로 돌아갔다.

    전삼칠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귀등상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모든 독충이 정리됐지만, 대전에는 여전히 악취가 가득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혼생주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모르니 이 기둥들을 부숴서 살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표가 더는 참지 못하고 제안했다.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또 어떤 것들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유홍도 찬성했고, 이번에는 도향도 두 사람의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때, 심협이 귀등상인의 목소리를 빌려 말했다.

    “그리 번거롭게 할 필요 없소.”

    모두가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귀등 도우,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것이오?”

    “방금 독충들이 나타날 때 천장의 대들보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소. 아무래도 혼생주는 저기에 숨겨져 있는 듯하오.”

    귀등상인이 위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모두 고개를 들어서 그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특별히 이상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귀등상인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설명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을 거요. 독충 아니면 독전갈이 나타날 때 위의 대들보에서 현상이 일어나니 아마 뭔가 관련이 있을 거요.”

    그때, 염열이 외쳤다.

    “저기!”

    모두가 다시 돌아보니 천장의 대들보에서 정말로 변화가 일어나 검은 빛이 감돌았다. 곧이어 대전에 갑자기 하얀 안개가 자욱해졌고, 어느새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게 뭐지?”

    “이건 뭐야!”

    “모두 조심하시오!”

    모든 사람이 하얀 안개에 파묻히자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심협은 바짝 경계심을 끌어올린 채 신식을 펼쳐서 주위를 살폈고, 이내 깜짝 놀랐다.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의 기운과 신혼 파동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넓은 대전에 혼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만수 도우! 염열 도우! 도향 도우!”

    심협은 한 명 한 명을 불러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전은 그리 넓지 않으니 모두 그 안에 있는 이상 조심스레 찾아보면 언젠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귀등상인의 법술을 발동했다. 손을 내밀자 허공에서 손가락 끝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금방 다섯 개의 검푸른 덩굴이 되어 땅으로 늘어졌다. 그리고 이 덩굴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라고 길어져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 나무 덩굴마다 가지가 자라나 더 많은 방향으로 향했다.

    이윽고 귀등상인 주위는 덩굴로 가득하게 됐다.

    하지만 덩굴이 퍼져 나가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심협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덩굴이 뻗어 나간 길이를 생각하면 이미 대전의 크기를 넘어섰을 텐데도 아직 한 사람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럴 리가 없다. 설마 환상에 빠진 건가?”

    심협은 그런 생각이 들어 덩굴에 분혼을 넣고 부주진신법을 발동하여 환상을 깨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극심한 통증이 그의 분혼을 찔러왔다.

    “으윽!”

    심협은 신혼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부주신진법을 멈췄다.

    “역시 뭔가 있어.”

    이로써 그의 추측이 어느 정도 증명된 셈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는 파훼법이 떠올랐지만, 망설여졌다.

    “그래, 다른 자들도 환상에 갇혀 있을 테니 들키지는 않겠지.”

    결심을 내린 순간, 분혼 의념을 잠시 없애고 신혼의 이끄는 힘을 따라 심협의 본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소요경의 출구를 열었다.

    심협이 소요경에서 대전으로 걸어 나왔다.

    한데 대전에 발을 딛는 순간, 의아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전 안은 날씨가 맑은 것처럼 안개 한 점도 보이지 않았고, 만수진인 등은 그 자리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 다만 그들 머리 위에는 활짝 펼쳐진 하얀색 유지산(油紙傘)이 둥둥 떠 있었다.

    이 유지산에서는 강렬한 영력 파동이 뿜어져 나와 모든 사람의 식해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우산 아래 있는 그들은 유지산의 통제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모두가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이를 본 심협은 곧장 무언가를 하려 했으나, 그 순간 갑자기 식해에 강렬한 통증이 몰려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강렬한 영력 파동이 그의 천령개를 뚫고 곧장 식해로 침입했다.

    심협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방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파(破)!”

    기합을 내지르자 부주진신법이 신위를 떨쳤고, 그의 식해로 침투하던 영력이 밀려났다.

    신식이 맑아진 심협은 바로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머리 위에도 어느새 하얀색 유지산이 나타나 있었다.

    심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강력한 신혼의 힘으로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이 하얀 우산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당하는 것도 당연했다.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순양검이 날아가 순식간에 하얀색 유지산을 꿰뚫었다.

    “크악!”

    놀랍게도 하얀색 우산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심협의 놀람이 사라지기도 전에 주위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검은색 우산이 허공에 나타나 천천히 심협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휘잉!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모든 검은색 우산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심협을 향해 돌진했다.

    우산이 고속으로 회전하자 그 가장자리에 강력한 바람 칼날들이 나타나 서로 다른 각도에서 심협을 공격해왔다.

    심협은 곧장 현황일기곤을 꺼내 빠르게 휘둘렀다.

    온 하늘 가득한 바람 칼날이 끊임없이 향해 휘몰아쳤는데, 갈수록 촘촘해졌다.

    심협은 발천난봉을 극한으로 시전했고, 수많은 곤봉 허상이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그의 주위를 보호했다.

    쾅! 쾅! 쾅!

    바람의 칼날이 곤봉의 허상에 연달아 터져 나가며 사방에서 충돌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심협은 우산의 위력이 그리 강하지 않음을 알아채고는 기회를 엿보다가 순식간에 세 개의 검은 우산 중앙을 뚫고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뒤이어 곤봉을 창처럼 세워 몸을 돌리며 검은 우산을 뚫었다.

    꽈르릉!

    곤봉이 떨리더니 수백 개의 곤봉 허상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검은 우산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몇 자루 순양검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뿜어내며 날아가 검은 우산을 이리저리 갈랐다.

    검은 우산은 순양검에 겁을 먹은 것처럼 뒤로 피하려 했으나, 일곱 자루 비검이 세 개로 나뉘더니 백여 개의 붉은색 검광을 뿜어냈다. 이에 검은 우산은 피할 길이 사라졌고, 순식간에 검광에 찔렸다.

    삽시간에 대전 안에 있던 검은 우산은 허공에서 불덩이에 휩싸여 금세 재가 되었다.

    검은 우산의 방해가 사라지자 하얀 우산들은 위력이 더욱 떨어졌고, 심협은 도향 등의 머리 위를 뒤덮은 우산은 놔두고 나머지는 깔끔하게 정리했다.

    심협은 귀등상인 앞으로 다가와 검으로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하얀 우산을 베었다. 그리고 다시 신혼을 뽑아내 비술로 그의 식해로 들어갔다.

    귀등상인이 두 눈을 천천히 뜨고는 심협을 향해 웃어 보이더니 소요경 공간의 대문을 다시 열었다.

    심협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한걸음에 소요경으로 들어갔다.

    그의 분혼이 다시 귀등상인의 몸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얀 우산을 없애 다른 자들의 통제를 풀어주기 전에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바라봤다. 이어서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갔다. 핏빛 가시덩굴이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가 대들보에 명중했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대들보가 부서져 떨어졌다.

    허공에는 대들보의 위장이 사라진 자리에 칠흑의 혼생주 본체가 드러나더니 이윽고 땅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되었다.

    그 순간, 대전 전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보이지 않는 기운이 혼생주에서 퍼져 나갔고, 뒤이어 강력한 금제의 기운이 바닥에서부터 솟아났다.

    “역시 이게 혼생주였군!”

    심협이 크게 기뻐했다.

    그때, 주위에서 포효 같은 고함이 들려오더니 몇 가지 법술과 신통이 몰려오면서 대전이 더욱 강하게 흔들렸다.

    귀등상인이 황급히 피한 후 돌아보니, 모두의 머리 위를 뒤덮었던 하얀 유지산이 땅에 떨어져 모두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다만 갑자기 깨어난 탓에 환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무의식적으로 술법을 사용한 것이다.

    “모두 정신 차리시오!”

    잠시 후, 귀등상인의 외침에 그제야 모두 정신을 차렸고,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후에야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얀색 우산이 심지를 제어하여 순식간에 환상에 빠졌었던 게요. 다행히 나는 신혼 비법으로 방어한 덕에 통제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고, 무사히 벗어나서 혼생주를 부쉈소.”

    귀등상인의 설명에 그들은 바닥에 있는 부서진 검은 우산과 하얀 우산을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귀등 도우, 신혼의 힘이 그 정도 경지였다니, 감복했소. 아무래도 모두가 이 음산(陰傘)과 양산(陽傘)의 무서움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하나는 섭혼하여 혼을 쏙 빼놓을 수 있어서 양산이라고 불립니다. 이 하얀 우산에 통제되는 사람은 환상에 빠져 신혼의 힘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되지요. 신혼이 모두 사라졌을 때, 검은 우산이 육신을 공격하여 사람의 혼백을 전부 갉아먹습니다. 이번에 귀등 도우께서 모두의 목숨을 살리셨습니다.”

    만수진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모두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귀등 도우.”

    도향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포권했다.

    전삼칠은 아직 의심을 풀지는 않았지만, 귀등상인이 자신을 구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저 귀등상인이 일부러 시간을 끌어 자신들의 신혼에 손상이 생긴 후에 구한다면 그에게는 더욱 유리할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심협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혼사문이라는 관문을 지날 때 혼자 힘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르니 조력자로서 저들이 지금은 무사하길 바란 것뿐이다. 적어도 보물 앞에서는 그들도 협력이 위주가 되어야 했다.

    “이러지들 마시오. 함께 난관을 극복해온 사이에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요. 나 혼자 힘으로는 시련을 통과하기는커녕 후예의 전승도 얻지 못할 것이오.”

    심협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귀등 도우, 다시 한번 감복했소.”

    염열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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