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24화 (924/1,214)
  • 924화. 작별

    “족장님, 정말 힘으로 밀면 되는 겁니까?”

    만수진인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물었고,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족장 마도를 돌아봤다.

    “그게……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도는 미안한 마음에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모두가 그 헛소리 같은 말을 믿을 수 없었고, 누군가는 곧 폭주할 것 같았다.

    한데 줄곧 말이 없던 귀등상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돌문에 있는 선은 모종의 언문 같군. 이 돌문은 일종의 언진(偃陣)이니 힘으로는 절대 열 수가 없소.”

    “그, 그렇지.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겁니다.”

    마도 족장이 헛기침하고는 어색하게 말했다.

    “오, 그럼 귀등 도우가 이 문을 파훼할 수 있는 것이오?”

    만수진인이 귀등상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도에 능한 사람이 아니지만 방금각의 도우들은 낯설지 않을 것 같소만?”

    귀등상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옆에 있는 도향 등에게 공을 넘겼다.

    사실 도향은 귀등상인이 ‘언진’이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두 개의 돌문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귀등 도우의 안목이 훌륭하군요. 도우의 말을 듣고 나니 분명 돌문의 문로가 이상해 보입니다.”

    도향은 잠시 생각한 후에 그렇게 말했다.

    “어서 말해주시오.”

    염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실 파훼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희화와 망서 두 여신이 새겨진 좌우의 돌문은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동시에 음과 양을 상징합니다. 이 돌문은 동시에 두 개의 다른 속성의 힘을 주입하면 아마 열릴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다고?”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염열 도우와 만수 도우가 익힌 화, 수의 신통이 음양에 속하니 두 분께서 법력을 주입하면 되지 않겠소?”

    도향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등상인이 때맞춰 입을 열었다.

    그도 도향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사실 심협은 음양의 힘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혼자서 문을 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최대한 자신을 감춰야 했다.

    염열과 만수진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문 아래로 다가갔다. 염열이 왼쪽 문에 손을 얹고 몸에서 붉은 빛이 감도는 노란 빛을 뿜어내자 공기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의 손에서 갑자기 빛이 번득이며 붉게 변하자 뜨거운 태양의 힘이 돌문에 주입되었다.

    돌문 위에 붉은 빛이 손바닥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퍼졌고, 이윽고 돌문의 불규칙한 무늬를 따라 올라가자 금방 불꽃이 치솟는 듯한 문로가 떠올랐다.

    옆에서는 만수진인이 때를 같이해 수음의 힘을 오른쪽 돌문에 주입했다. 몸에서 염열과 정반대의 영력 파동이 일어나자 공기 중에 옅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뒤이어 그의 손이 빛나면서 오른쪽 돌문의 언문도 빛나기 시작했고, 물이 넘실대는 듯한 문로가 떠올랐다.

    희화 여신 수중의 태양과 망서 여신 수중의 달이 적과 청으로 빛나더니 돌문이 강하게 흔들리면서 천천히 안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모두가 기뻐하며 문 너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곳은 희뿌연 안개가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몰래 유명귀안을 운공하여 안을 살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영력의 파동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능의 문이 열렸으니 이제 직접 헤쳐나가시면 됩니다.”

    마도의 말에도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앞장서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염열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내밀자 커다란 불꽃이 문 안의 허공으로 날아가 금방 잿빛 안개에 들어갔지만, 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안개는 살짝 흔들렸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를 본 도향이 손을 들자 손에서 정교해 보이는 원형의 궁등(宮燈)이 떠올랐다. 이어서 그녀가 손을 튕기자 부드러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라!”

    그녀가 가볍게 외치자 둥근 등불이 유유히 떠오르더니 문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잿빛 안개를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빛도 함께 사라졌다.

    도향이 눈살을 찌푸리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다.

    “법기와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안에 어떤 위험도 없습니다.”

    도향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먼저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큰일을 겪어온 자들이 서로 경계하느라 발을 떼려고도 하지 않다니. 정말 한심하군. 쯧쯧.”

    이런 경직된 상황을 본 심협은 귀등상인을 조종하여 말하고는  앞장서서 대문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조롱 섞인 말에 불쾌한 기색이었으나,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기에 뒤를 따랐다. 염열에 이어 만수진인과 전삼칠이 들어갔다. 그 뒤는 도향 일행이었다.

    그들이 잿빛 안개에 들어가기도 전에 등 뒤에서는 돌문이 굉음을 내며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귀등상인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마지막에 문틈으로 무족의 족장 마도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어서 심협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이 밀려왔다.

    ‘어쩔 수 없지. 이왕 들어왔으니 들어가 보는 수밖에…….’

    그는 생각을 접고 귀등상인을 조종하여 잿빛 안개를 뚫고 들어갔다.

    잿빛 안개로 들어서자 신식의 힘이 턱 막혔다. 꿈속 세계에서 장수촌에 들어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이곳의 잿빛 안개는 그때처럼 짙지도, 범위가 넓지도 않았다.

    그는 금방 잿빛 안개를 뚫고 나왔다. 밀폐되고 협소한 공간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눈앞에 탁 트인 하얀 광장이 나타났다.

    앞서 염열이 쏘아 보낸 불꽃과 도향의 궁등 법기 모두 무사히 떠 있었다.

    심협은 먼 곳을 살펴봤다. 광장 끝에는 웅장하고 거대한 궁전이 우뚝 서 있었는데, 높이가 무려 30장에 이르러 마치 작은 산 하나가 솟아 있는 것 같았다.

    이 대전은 정교하게 다듬은 대당의 양식과는 전혀 달랐다. 전체를 하얀 암석으로 쌓았고, 지붕 처마의 각도는 매우 커 정면에서 보면 마친 구부러진 활 같아 전체적으로 고졸(*古拙:예스럽고 솜씨가 서투름)하고 거칠면서도 아름다웠다.

    대전 정문은 높이가 10장이었고, 그 위에는 ‘혼생문’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두는 멈추지 않고 빠르게 궁전 앞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궁전 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건물의 웅장한 기백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때, 이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부서진 비석이 있군요.”

    모두가 바라보니 둥근 문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오른쪽 바닥에 사람 키만 한 청회색 돌비석이 보였는데, 세월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윗부분 절반쯤은 누군가에 의해 잘려져 있었다.

    심협은 비석을 돌아 뒤쪽을 살펴봤지만, 나머지 반쪽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온 그는 부서진 비석의 문자를 자세히 살폈다.

    부러진 비석의 왼쪽에는 생혼불퇴(生魂不退), 그 옆에는 양화(爙禍)라고 적혀 있었다.

    “쳇! 괜히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이표가 혀를 찼다.

    비석의 내용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에게 당장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들어가 살펴보느냐였다. 모두가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앞장설 뜻을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살펴보겠소.”

    유홍가 머뭇거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고는 곧장 날아서 주위를 살펴보더니 옆으로 돌아서 대전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완전히 옆으로 가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추락하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에 띄는 금제는 없으나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이, 무슨 일인가?”

    이표가 달려가 물었다.

    유홍이 일어나 몸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갑자기 어떤 힘이 짓누르는 듯 힘이 들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금제가 있나 봅니다.”

    “대전 뒤쪽은 보였어?”

    “잿빛 안개로 덮여 있어서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그쪽도 이곳과 비슷한 듯합니다.”

    유홍이 고개를 젓고는 뒤쪽 광장의 잿빛 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빈틈을 찾느라 헛수고하지 말고, 관문을 돌파하는 게 좋을 듯하오.”

    “귀등 도우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관문을 돌파하러 온 것이니 괜히 편한 길을 찾을 생각은 접는 게 좋겠습니다.”

    만수진인이 찬성했다.

    “그럼 두 분 도우께서 먼저 들어가는 게 어떻소?”

    전삼칠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의 미천한 경지는 전 도우 신공과 조화에 한참 못 미치는데 제가 감히 어찌 먼저 나서겠소?”

    만수진인 역시 웃으며 받아쳤다.

    “성문이 매우 넓으니 차라리 함께 들어가는 게 어떻겠소? 사람이 많으면 의외로 수월할지 모르니 말이오.”

    염열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고, 심협도 굳이 시시덕거리고 싶지 않았기에 찬성했다.

    그렇게 일행은 일렬로 서서 일제히 손을 내밀고 몸에서 중후한 법력 파동을 일으켜 동시에 두 개의 거대한 성문을 밀었다.

    쿠르릉!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두 개의 거대한 문이 점점 안으로 밀려나며 열리기 시작했다.

    좀 전의 문을 열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안개 같은 방해물이 없어 광경이 한눈에 훤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는 문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닫혔다.

    심협은 정신을 집중하여 경계했다. 그는 줄곧 일행의 가운데에서 걷게 했고, 다른 사람의 옆에 붙어 귀등상인의 몸을 반쯤 가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바닥 곳곳에는 마름모 같은 무늬가 가득했고, 중간중간 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진문 같지는 않았다.

    “그 족장이 우리를 속인 거 아닙니까? 온통 평범한 돌기둥뿐인데, 여기 어디에 혼생주가 있다는 거요?”

    대전의 기둥을 살펴본 결과 특별한 점이 없자 누군가 투덜거렸다.

    “안에 뭔가 숨겨져 있고 눈속임일 지도 모르지 않소.”

    이표가 답했다.

    “그럼 이것들을 전부 부숴버리면 혼생주를 바로 찾을 수 있을 테니 간단하지 않겠소?”

    유홍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곳이 혼생문 구역인 이상 반드시 장치나 시련이 있을 게요. 괜히 잘못 건드리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소.”

    전삼칠이 꾸짖었다.

    “내가 뭘 하든 그쪽이 무슨 상관이야.”

    유홍이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 그도 그저 농담을 한 것뿐인데 전삼칠이 어린아이 가르치듯 꾸짖자 갑자기 불쾌해진 것이다.

    전삼칠의 눈에도 살기가 드러났지만, 그는 염열과 만수진인을 힐끗 보고는 꾹 참았다.

    심협은 그들을 무시하고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대전은 평범한 궁전 같았고, 숨겨진 문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슥! 스스슷!

    기이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협이 위를 휙 바라보더니 바로 외쳤다.

    “위다!”

    모두가 황급히 위를 바라봤다. 대전 위에는 어느새 주먹만 한 검은색 벌레들이 빼곡하게 몰려와 있었다. 그것들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나오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독극물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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