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화. 복수
심협이 다시 진창해를 시전하자 푸른 얼음이 순식간에 다시 귀등상인의 온몸을 뒤덮으면서 이변도 멈췄다.
“아무래도 귀등상인은 인간이 아니라 본체가 나무인 요물이었던 모양이군. 심협, 이자의 신혼만 부수고 몸을 망가트리지 않은 건 이자의 시체로 뭔가 하려는 거겠지?”
“지금 이 섬에는 진선기가 여섯 명이나 있으니 이대로 귀등상인을 죽였다면 그들이 눈치챘을 거야. 그리되면 내 행동에 많은 제약이 따를 거고. 그러니 귀등상인은 아직 사라져서는 안 돼.”
심협은 웃으며 답하고는 손을 얼음 결정 안에 넣어 귀등상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에서 검은 빛이 감돌았다. 마치 어두운 검은 안개가 신혼을 흡수하려는 것처럼 귀등상인의 시체를 뒤덮었다.
심협이 알아듣기 어려운 주문을 읊조리자 귀등상인의 시체를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고 음산해졌다.
어두운 빛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금방 한 신혼 허상으로 변했다. 귀등상인 본인의 신혼이었다. 심협이 무슨 수단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서진 신혼을 다시 불러온 것이다.
다만 귀등 상인의 신혼은 생기가 전혀 없이 죽음의 기운만 가득했다.
심협이 결인하자 그의 미간에서 신혼 정광이 날아가 귀등상인의 신혼 허상 안으로 들어갔다. 귀등상인의 신혼에 있던 죽음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고 생기가 생겨나 평범한 신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협은 손을 휘둘러 그 신혼을 귀등상인의 시체에 집어넣었다.
귀등상인이 천천히 눈을 뜨자 생기가 감돌았고, 몸에서는 검은 빛이 번득이더니 나무로 변했던 머리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협은 귀등상인을 꼼꼼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몸에 올렸던 손을 다시 얼음 결정에 대고 진창해를 운공했다. 그러자 거대한 빙산이 빠르게 녹아 금세 완전히 사라졌다.
얼음 결정도 전부 사라지면서 만귀번은 귀등상인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귀등상인은 몸이 땅에 내려오자 심협을 향해 예를 올렸다. 몸 안에 법력이 흐르는 모습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어 마치 죽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조비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인 그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죽은 영혼을 감지해내는 감각이 평범한 수사보다 열 배는 민감했다. 한데 귀등상인은 분명히 죽었는데도 지금 심협에 의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건 초혼술(招魂術)인가? 네 주인이 초혼술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군.”
“초혼술?”
“시체의 죽음의 기운을 제거해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신통이지. 지속 시간은 길지 않아 며칠 후면 완전히 효력이 없어지지만, 그 며칠이면 충분할 게다.”
화령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조비극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심협은 진즉 이렇게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귀등상인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음에도 시간을 끌면서 상대의 수많은 신통을 알아낸 것이다.
심협은 신서를 소환하여 소요경과 신혼의 연결을 끊게 한 뒤 소요경을 귀등상인에게 건넸다.
“이걸 연화해.”
앞으로 귀등상인을 제어할 것이니 이자에게 소요경을 연화하게 하는 게 더 좋았다.
귀등상인은 소요경을 받은 뒤 법력을 주입하였다. 잠시 후, 소요경에서 붉은 빛이 떠올랐다.
“화령자, 연신대진을 거둬줘. 여기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하면 다른 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바로 출발할 거야.”
화령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인하여 밖에 있는 연신대진을 거두었고, 심협, 조비극과 함께 소요경 안으로 들어갔다.
귀등상인은 소매를 휘둘러 대승기 연시들을 거두고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근처 벽에 박혀 있던 가시덩굴이 날아서 돌아오더니 다시 붉은 빛을 밝히며 동부 곳곳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과 기운을 제거했다.
모두 마친 후에야 그는 소요경을 뱃속에 넣고 바로 검은 빛으로 변하여 산에서 나와 섬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 * *
소요경 안. 심협이 양시대를 흔들자 주철이 안에서 나왔다.
완전히 낯선 곳에 왔음에도 주철은 당황하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옆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작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눈앞에 있는 청년이 이곳의 주인임을 감지한 모양이다.
“주형, 오랜만입니다.”
심협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주철은 당혹스러워했다.
“절 기억 못 하시는 모양이군요. 심협입니다. 그때 장안성에서 헤어진 이후로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심협? 심협이라면…… 아가씨의 그 산수 친구! 한데 귀등상인의 양시대가 어떻게 자네 손에 있는 건가?”
주철은 금방 기억해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후 기연이 닿아 수련에 큰 성취가 있었습니다. 귀등상인은 제가 죽였지요.”
“자네가 귀등상인을 죽였다고?”
주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과거 장안성에서 만났을 때, 심협은 벽곡기의 수사에 불과했다. 그런데 겨우 백 년이 지난 지금, 진선기의 귀등상인을 죽였다니. 그럼 심협도 진선기의 수사란 말인가!
주철은 수사가 아니었지만, 벽곡기와 진선기의 엄청난 차이를 잘 알았다.
“심 선생, 우리 아가씨의 복수를 해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주철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심협을 향해 절을 했다.
“저와 사 도우는 오랜 벗이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저 더 일찍 만나 그녀를 구하지 못한 것이 한일 뿐입니다.”
심협이 주철을 일으키고는 탄식했다.
주철도 말이 없었다.
“귀등에게 당시의 일에 대해 들었는데, 사 도우가 평범한 사람을 불로장생으로 만들어주는 언술을 찾기 위해 무은사해로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왜 그런 언술이 필요했던 겁니까?”
“아가씨께서 평생 고생하신 것은 전부 아가씨의 망할 오라비 사헌(謝軒) 그자 때문이었습니다. 그자만 아니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사 도우의 오라버니요? 사 도우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오라버니가 어떤 간사한 자에게 당해서 신혼이 부서지고 경맥이 전부 끊어져 사 도우가 연신단에서 연신 비전을 훔쳐 오라버니를 고쳐주겠다고 했었죠. 연신 비전은 진즉 얻었을 텐데, 오라버니의 몸을 치료하지 못한 겁니까?”
“연신 비전을 심 선생께서 대신 구해줬다고 아가씨께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연신 비전의 수단으로 사헌의 몸과 신혼은 고쳤지만…… 병이 너무 오래되어서 경지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한데 그 이기적이고 악랄한 놈은 아가씨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아가씨를 재촉하여 경지를 고칠 방법을 찾아내라고 했지요. 아가씨는 차마 모른 척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영약과 비법을 찾았지만…… 사헌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고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철이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그리고요?”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리고 사헌은 더 노쇠해졌고, 아가씨를 향한 재촉은 더욱 심해졌죠. 아가씨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연수(延壽)할 방법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무은사해로 가게 된 것입니다.”
“무은사해에 범인을 불사로 만들어주는 언술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심협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제가 말해준 겁니다. 심 도우도 제 외모가 늙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셨을 겁니다. 사실, 저는 벌써 몇 년을 살았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적어도 수백 년은 살았을 겁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늙을 기미도 보이지 않죠. 저도 제가 누군지 알 수가 없는데 처음의 기억이 바로 무은사해이니 몸이 늙지 않는데는 언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은사해 사람이었소? 그곳에 언술이 성행하는 건 사실이지만 평범한 사람을 늙지 않게 해준다는 언술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심협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철을 살펴봤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저 신혼 깊은 곳에서 그런 기억이 떠오를 뿐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신비한 신통이 있으니 그런 신비한 언술도 있을지 모르오. 주형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심협은 몰래 신식으로 주철의 몸을 살펴보며 말했다.
주철은 그의 신상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제 기억이 온전할 때쯤에는 무은사해에서 한동안 살다가 그 뒤로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대당에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죠. 아가씨는 제가 죽지 않는 괴물임을 아셨음에도 절 버리지 않으셨고, 그렇게 저는 계속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아가씨께서 제 사정을 알게 되셨고, 사헌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저와 함께 무은사해로 갔지요. 한데 거기서 귀등에게 잡힐 줄이야…….”
주철의 얼굴에는 극도의 후회와 괴로움이 떠올랐다.
“사 도우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주형은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얼마 전에 귀언과 싸웠는데, 그자는 이미 죽었소. 사 도우의 시체는 내 빼앗아 와서 신혼을 도화시켜 육도 윤회에 들게 했으니, 그녀의 성품이라면 분명히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귀언을 죽였다고요? 듣기로 귀언의 경지는 태을기에 임박해 인간 세계에서 적수가 드물다고 들었습니다만…….”
주철은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방금 심협이 귀등상인을 죽였을 때도 깜짝 놀랐는데 이제 또 귀언을 죽였다는 말까지 듣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귀언의 실력은 귀등상인 같은 진선기 초입의 산수와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나 혼자였으면 절대로 불가능했겠으나, 함께 싸웠던 다른 도우들이 있었소.”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주철은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란 모습이었다.
“지금 저희는 어느 비경에 들어와 있는데 곧 큰 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주형은 잠시 여기에 계시오.”
“알겠습니다. 심 선생께서는 바쁘실 테니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수많은 목재가 나타나 멀지 않은 곳에 빠르게 쌓였고, 몇 호흡 뒤에는 다락방이 만들어졌다.
주철은 감사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바로 손을 휘둘러 금제로 다락방을 뒤덮었다.
“화령자, 주철이 말한 불사의 언술이 진짜 존재할까?”
심협은 옆에서 줄곧 조용히 있는 화령자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주철이 불로불사인 건 일종의 불사 언술에 걸려서일 게다.”
화령자의 목소리에서는 흥미가 느껴졌다.
사실 심협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방금 주철의 몸을 살폈지만, 언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심협, 여기 남아서 주철을 자세히 살펴볼 테니 당분간 날 찾지 마라.”
“좋아. 대신 절대 발각돼서는 안 돼.”
“걱정하지 마. 몸이 불사인 것 외에는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는데 발각될 리가 있겠어?”
화령자가 당당하게 말하고는 금제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귀등상인의 시야를 통해 바깥 상황을 살폈다.
귀등상인은 섬 깊은 곳을 한참이나 돌아다녔고, 금방 섬의 중심 구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풀이 무성해서 생기가 넘쳤다.
귀등상인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기운을 거둔 채 산속을 걸으며 신식으로 주위를 살폈다.
한참을 걸어가던 중 그의 신식에 앞에서 울리는 폭발음이 들렸다. 분명 전투 소리였지만, 염열 등은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