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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918화 (918/1,214)
  • 918화. 전후사정

    안색이 일그러진 귀등상인은 다시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10여 개의 검은 그림자가 땅에 떨어졌다. 연시들로, 그중에는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피부에 검고 반질반질한 비늘이 돋아 있었고, 열 손가락에 달린 갈고리 같은 손톱에서는 차가운 빛이 감돈다는 점이었다.

    모두 대승기 정도 수준인 10여 개의 연시는 나타나자마자 바로 세 갈래로 나뉘어 그중 둘은 두 자루 순양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땅! 땅! 땅!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이 연시들의 손발은 순양검의 검망을 충분히 막을 정도로 매우 단단했다.

    마지막 무리는 숫자가 가장 많았는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심협과 조비극을 경계했다.

    하지만 심협과 조비극은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날 우습게보다니! 오냐, 그렇다면 만귀번의 진짜 위력을 보여주마!”

    귀등상인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양손으로 차륜 같은 결인을 맺었다. 그러자 만귀번의 영문이 강하게 빛나면서 강력한 음기 파동이 대번에서 폭발했는데, 그 위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조비극은 이 강력한 음기에 깜짝 놀라 더는 여유롭게 관전하지 않고 장룡적을 불기 시작했다. 백 마리의 용이 울부짖는 듯한 피리 소리가 귀등상인을 향해 날아갔다.

    “심씨 애송이, 네놈이었구나!”

    귀등상인은 이 피리 소리를 듣자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양손으로 귀를 막는 동시에 만귀번을 향해 입에서 피를 뿜었다.

    만귀번의 영문이 번득이면서 귀신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고, 이전보다 몇 배나 더 강한 음한의 기운이 갑자기 솟아올라 성난 파도처럼 주위를 휩쓸었다.

    장룡적의 피리 소리는 수많은 귀신의 울음소리에 가려졌고, 성난 파도 같은 음기 파동이 심협과 조비극을 공격해왔다.

    심협의 몸은 살짝 떨렸다가 이내 멈췄으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이 만귀번의 진정한 위능인 듯했다. 만귀번에 담긴 강력한 영력은 64층 금제가 있는 순양검과 성한선 이상이었다.

    조비극도 강력한 음기의 영향에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동부 안의 회색 안개가 더 짙어지더니 물밀듯이 밀려왔고, 귀물들이 허공의 음기에서 나타나 밀실을 가득 메웠다.

    이 귀물들은 종류가 모두 달랐다. 큰 것은 8장에 이르렀고, 작은 것은 겨우 몇 장 정도였다. 하지만 모두 실력이 범상치 않았고, 차가운 눈으로 심협을 노려봤다.

    “내게 얼마나 많은 수단이 있는지 알고 싶나? 그럼 먼저 만귀서심(萬鬼噬心)부터 막아봐라!”

    만귀번의 위력을 발휘한 귀등상인은 겁에 질린 표정은 싹 사리자고 차갑게 웃기 시작했다. 또한, 그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모든 귀물이 심협과 조비극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협이 가볍게 기합을 넣고는 양손을 움켜쥐자 금색 뇌전이 손에서 뿜어져 나와 주위의 귀물들을 공격했다.

    조비극은 기쁜 눈빛으로 다시 형흉신광을 뿜어내 그 귀물들을 휘감았다.

    한편, 심협은 경지가 정진하면서 양팔의 풍뢰영문의 위력도 더 강해졌다. 게다가 조비극의 형흉신광까지 더해지자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그 귀물들을 모두 격퇴했다.

    “저희에게 귀물을 억제하는 신통이 있는 줄 알면서도 이런 공격을 하다니, 참 한심하지 않습니까?”

    조비극이 차갑게 웃으며 조롱했다.

    심협은 대답 대신 유명귀안으로 주위의 음기 흐름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의 뇌전에 격퇴당한 귀물들은 정말 죽은 게 아니라 희미한 음기가 되어 만귀번으로 모여들었다.

    음기가 용솟음치는 만귀번 안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만여 마리의 각종 귀물이 있으니 가히 만귀의 깃발이라 불릴 만했다.

    귀물의 음기가 깃발 안의 공간에 모여들자 귀물들이 다시 만들어졌다.

    “그런 거였군. 저 귀물들과 만귀번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내 금뇌(金雷)의 힘에도 소멸하지 않고 음기가 다시 만귀번으로 돌아가 형태를 갖춘 거였어. 이렇게 반복된다면 네 신통이 아무리 대단해도 무궁무진한 귀물들에게 소모되다가 끝나겠지. 결말은 좋지 않을 테고.”

    심협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형흉신광으로 흡수하는 것만이 저 귀물을 완벽하게 소멸하고 완전히 연화하여 만귀번으로도 음기를 다시 빼앗아 올 수 없게 될 터였다.

    “형흉신광은 아무리 봐도 정말 대단한 신통이라니까.”

    심협이 조비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편, 귀등상인은 조비극의 비웃음에도 차갑게 웃기만 하고는 다시 만귀번을 발동했다. 그러자 또 수백 마리 귀물이 깃발에서 나와 심협 등에게 돌진했다.

    “아무래도 만귀번의 능력은 이것뿐인 듯하니 여기서 끝내자.”

    심협이 중얼거리고는 양손을 허공에 내밀자 양팔의 뇌전 영문이 극한으로 발동됐다.

    쿠르릉!

    구렁이 같은 거대한 금색 뇌전이 양팔에서 뿜어져 나가서 곳곳을 휩쓸자 동부는 순식간에 뇌전의 세계로 변했다.

    수백 마리 귀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수많은 음기가 되어 흩어졌다.

    이에 안색이 돌변한 귀등상인이 결인하려는 순간, 눈앞에 심협이 나타났다.

    귀등상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고, 만귀번에서 검은 빛을 크게 발하여 몸 앞을 막았다. 동시에 안에 있던 귀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는 진선기 귀물도 있었다.

    심협은 만귀번을 향해 입에서 푸른 빙염을 뱉어냈다. 그러자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만귀번에 푸른색 얼음 결정이 나타났고, 그 위에 맺힌 검은 기운도 완전히 얼어붙었다.

    만귀번의 음기 공간도 순식간에 얼어붙어 모든 귀물도 얼음 조각이 되었다. 이는 진선기의 음혼도 예외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귀등상인은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만귀번을 얻은 지 오래된 그는 이 깃발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금제는 이미 64도가 되어 원만 경지에 도달했고, 심지어 자신이 본 그 어떤 원만 경지 법보보다 강해서 과연 선기(仙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데 그렇게 강력한 법보가 고작 저런 빙염에 얼어붙다니!

    귀등상인이 일순 넋을 잃은 그때, 심협이 손가락을 튕기자 푸른 빙염이 날아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귀등상인은 재빨리 검은 기운을 뿜어내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머리 위 공간에 파동이 일어나면서 작은 은종이 나타나 딸랑 울렸다.

    은색 파문이 아래를 뒤덮자 귀등상인의 눈빛이 흐려지면서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멍해졌다. 푸른 빙염이 몸에 닿자 극한의 한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었고, 귀등상인의 몸은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얼어붙었다. 높이 4장 정도의 빙산에 갇힌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 드러났다.

    귀등상인 같은 고수도 아무런 저항을 못 하다니, 제5층 경지에 도달한 진창해 신통의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주인님, 단숨에 이자를 제압할 수 있으면서 왜 지금까지 시간을 끄신 겁니까?”

    조비극이 다가와 투덜대자 심협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동부 밖 상공에 있던 금광 검진이 전부 흩어지더니 열 자루 비검으로 변해 그의 몸으로 돌아왔다.

    “끝났나?”

    화령자가 명화연로를 조종하여 밖에서 날아 들어왔다.

    “화령자, 귀등상인에게서 얻어낼 정보가 있는데 섭혼술을 사용할 수 있어?”

    “섭혼술은 나도 모른다. 허나 미혼 신통은 좀 알지. 네가 돕는다면 진선 초기 수사의 신혼은 조종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귀등상인은 진선 중기라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화령자의 전음에 심협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렇게 말하고는 귀등상인이 봉인된 빙산으로 다가가 손을 올렸다. 그러자 빙산 위쪽이 빠르게 녹았고, 몇 호흡 뒤에는 귀등상인의 머리가 드러났다.

    “심가 놈아!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잘못한 게 없거늘, 어찌하여 내게 이러는 것이냐? 그날 네놈을 쫓은 것도 내가 아니라 열염 그놈들 아니더냐!”

    빙산은 움직임을 제한했을 뿐 다른 부상을 입히지는 않았기에 귀등상인은 머리가 드러나자마자 버럭 호통을 쳤다.

    “확실히 당신과는 충돌이 없었지. 다만 귀등 도우가 사우흔이라는 수사를 알 것 같은데?”

    심협의 차가운 목소리에 귀등상인의 눈동자는 찰나의 순간 가늘어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심협은 이 한순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게 확실하군. 그녀는 내 오랜 벗이었다. 이제 이유를 알겠지?”

    옆에 있던 화령자도 심협이 귀등상인을 공격한 이유를 이제야 알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사우흔이라는 여자 수사를 확실히 알고는 있다. 동토 대당에서 온 그녀는 어디서 들었는지 무은사해에 범인(凡人)을 불로장생으로 만들어주는 언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으러 왔지. 잠깐 교류가 있었지만 곧바로 헤어졌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귀등상인이 머리를 빠르게 회전하며 말했다.

    이를 들은 심협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사우흔이 무은사해에 온 것은 그런 이유였나?’

    심협은 내색하지 않고 소매를 휘둘러 통제력을 잃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귀등상인의 연시들을 휘감았다.

    “이 연시들에 귀언의 술을 썼군. 이걸 어디서 배웠지?”

    심협이 연시의 팔을 들었는데, 그 위에는 수많은 가느다란 문로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귀언 부문이었다.

    “네, 네가 귀언의 술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대가 수련한 것은 천시진경이겠지. 귀언이 그대에게서 배웠는지 아니면 그대가 귀언에게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날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심협의 차가운 목소리가 마치 얼음송곳처럼 귀등상인의 가슴에 박혔다.

    당황한 귀등상인은 온몸이 얼음에 뒤덮인 상태에서도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동안 그는 자신과 귀언의 관계를 잘 숨겨왔고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거라 자신했는데, 이 젊은이에게 모두 간파당한 것이다.

    “사우흔의 시체는 내가 벌써 귀언에게서 빼앗아왔다. 알고 있는 일을 전부 말하면 윤회 전생할 기회는 주마. 허나 그렇지 않으면 연혼(煉魂)의 고통속에서 혼백마저 완전히 소멸당하게 될 것이다!”

    표정이 차가워진 심협의 손에 홍련업화가 나타났다.

    귀등상인은 홍련업화를 본 적이 없지만, 그의 신혼은 이 불꽃이 위험함을 직감했다. 순식간에 표정이 처참하게 굳어버린 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연혼의 고통이 어떠한지 몸소 겪어보고 싶은 모양이군.”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심협은 손에서 검은 빛을 발했다.

    “연혼술은 제 특기이니 제가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조비극이 비릿하게 웃자 그의 두 눈에서 날아간 진짜 같은 검은 빛이 귀등상인의 머리를 비추었다.

    귀등상인은 머릿속 신혼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수천만 개의 바늘이 동시에 신혼 깊은 곳을 찌르는 것만 같아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표정 역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호들갑은……. 내 연혼술은 다른 것과 달리 천천히 달궈져서 반 시진 동안 예열해야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지. 그때의 고통은 지금보다 못해도 열 배는 더 클 게다. 큭큭!”

    조비극은 피와 광기에 휩싸인 채 비릿하게 웃었다.

    귀족(鬼族)은 선천적으로 피와 살인을 즐기는데, 주인인 심협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지금까지 억눌러오다가 오늘 모처럼의 기회가 생겼으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머, 멈…… 춰. 심 도우, 내…… 아는 바를 전부…… 말할 테니…… 제발 멈추게…… 으윽! 멈추게 해주시오! 끄아악!”

    조비극의 위협에 귀등상인은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말을 바꿨다. 열 배는커녕 지금 정도의 고통만으로도 신혼이 찢어질 것 같아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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