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화. 곡현자(谷玄子)
이 무렵, 염열과 만수진인이 검은색 안개 앞에 섰고, 벽해요어는 사라졌다.
도향 등도 반대편에 섰다. 수십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싸우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심협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먼 곳에 조용히 멈췄다.
한참 뒤, 염열이 손을 휘두르자 10여 장 길이의 찬란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종류의 법보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강력한 위력에 허공에서 불에 타는 듯이 치익 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찬란한 불빛이 강하게 흑무대진(黑霧大陣)을 베었다. 하지만 그 찬란한 불빛은 마치 물에 빠진 돌처럼 검은 안개로 흡수되었고, 검은 안개는 잠시 일렁였지만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이를 본 심협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방금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검은 안개 속에서 강력한 흡수의 힘이 느껴지더니 불빛이 가볍게 녹아버렸다.
“저 검은 안개 금제는 상당히 강해 보이는군. 역시 상고 금제다워. 또 선배가 남긴 동부에 도착했으니 이제 그대들 차례요.”
염열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도향 등에게 말했다.
“당연하죠. 두 분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세요.”
도향이 뜨거운 눈빛으로 전방의 검은 안개를 바라봤다.
“저 두 무리는 본래 스승을 죽인 원수지간이고 한 하늘에 함께 살 수 없는 적이었는데 이곳의 보물을 위해 손을 잡은 모양이군. 동화산선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는 걸?”
“이익 앞에서 천하는 평화롭다지 않나. 영원한 이익은 있어도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
심협은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염열 등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 무렵, 도향이 검은 안개 근처까지 날아가 주문을 읊조렸고, 찬란한 별빛이 소매에서 떠올랐다.
심협은 유명귀안을 운공하고서야 별빛 안의 물건을 볼 수 있었는데, 길이가 2천장인 네모꼴 철반(鐵盤)이었다. 바둑판같이 생긴 짙은 보라색 판 위에는 별무늬가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 수가 수백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이 별 무늬들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반경 10여 장을 뒤덮었다.
“저건 곡현성반(谷玄星盤)이잖아! 상말(商末) 산수 곡현자(谷玄子)의 본명법보인데……. 그와는 인연이 닿아 만난 적이 있지. 그때 저 곡현성반의 신묘함을 본 적이 있어. 그도 여기서 죽었을 줄이야…….”
화령자는 심협에게 철반의 생김새를 듣고 나자 바로 정체를 알아챘다.
“곡현성반? 그 보물의 어떤 점이 현묘한데?”
“곡현자는 상말의 진도(陣道) 대사였고, 곡현성반은 그가 평생 공을 들여서 만든 진도의 법보다. 저기 수많은 별 무늬가 보이지? 저것 각각이 하나의 진법이니 저 보물은 수백 개의 상고 대진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저 모든 것이 다 대진이라니! 저게 다 발동이 될까?”
심협이 놀란 기색으로 곧장 물었다.
“발동이 안 되면 왜 진도 법보라고 하겠어? 다만, 성반에 있는 대진을 얼마만큼 발동하느냐는 저걸 제어하는 자의 진법 경지에 달려 있지. 진선 수사라면 대부분 진법을 섭렵하고 있을 터. 도향의 경지는 이미 진선 후기에 도달했으니 아마 두세 개쯤은 발동할 수 있을 게다. 상고 대진의 위력은 보통이 아니니까 나중에 저 여자를 마주치면 조심해야 한다.”
“법진을 발동할 수 있다면 곡현성반이 무족의 진기보다 강할지도 모르겠군.”
“곡현자는 과거 무족 진기의 전승을 얻었고, 그것을 토대로 곡현성반을 만들었다. 다만 그자는 워낙 쩨쩨해서 내가 우리 일족의 연기보전(煉器寶典)과 진기전승을 교환하자는데도 죽어도 싫다고 했지. 아, 곡현자의 선총이면 무족의 법기가 있을지도 모르니 후에 저 여자를 생포하면 뜻밖의 수확이 있을지도 몰라!”
화령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심협 역시 같은 생각에 눈이 번득였다.
그때, 도향이 뭔가 감지했는지 심협이 숨어 있는 곳을 휙 돌아봤다.
깜짝 놀란 심협이 서둘러 시선을 피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시죠?”
유홍과 이표가 물었다.
“아니다.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군.”
도향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계속해서 곡현성반을 발동했다.
“심협, 지금 네 법력은 강력하고 기백이 웅장한 데다가 신혼의 힘이 더 강해졌으니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의 시선을 쉽게 끌 게다. 연연나금의가 행적을 감춰주고 있다고 하지만 고수 앞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아. 저들도 영력이 민감하니까.”
“그래야겠어.”
심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기운을 더욱 꼼꼼히 감췄다.
그 무렵, 도향이 곡현성반을 완전히 발동하자 찬란한 별빛이 뿜어져 나와 빙글빙글 돌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장 크기의 별빛 기둥이 만들어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성진(星辰) 부문이 반짝였다.
“가라!”
그녀가 결인하자 별빛이 아래로 뿜어져 내려가 검은 안개에 강하게 떨어졌다.
흑무금제가 마치 바닷속에서 몸부림치는 교룡처럼 들끓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도향이 열 손가락을 끊임없이 결인하자 별빛의 기둥은 더욱 강해졌고, 이윽고 10여 개의 소형 별빛이 주위의 다른 곳을 향해 뿜어져 날아갔다.
끊임없이 들끓던 검은 안개가 더욱 요동치면서 그 소형 별빛이 찌른 곳이 혹처럼 튀어나왔다. 이어서 점점 커져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저 별빛 법진은 뭐지? 저렇게 쉽게 흑무대진을 부수다니!”
검은 안개는 언뜻 보기에도 매우 현묘해 자신으로서는 부술 자신이 없었기에 심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곡현성반 안의 법진의 힘이 아니라 성반 자체의 능력이다. 저 보물은 천외운성(天外隕星)으로 만든 것인데, 거기에는 천성적으로 영력을 흩어버리는 효과가 있지. 그것이 곡현자의 손을 거치면서 저 성반에 금제를 파훼하는 신통이 생기게 된 게야.”
“천외운성에 영력을 흩는 능력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 법보로 만들고 저 안에 어떻게 진법을 넣은 거지?”
심협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곡현자의 능력이지.”
화령자의 목소리에도 감탄이 담겨 있었다.
심협은 곡현자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곧 폭발할 것 같은 검은 안개를 보던 그가 갑자기 소매에서 하얀 빛을 꺼냈다. 바로 신서였다.
“아까 내가 말한 대로 해.”
심협은 소요경을 꺼내 신서에게 건넸다.
신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에서 은빛을 발사해 소요경을 뱃속으로 넣고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들어갔다.
심협도 어느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 * *
도향이 끊임없이 술법을 시전하자 검은 안개 금제의 혹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더욱 커졌다.
펑! 펑!
귀청을 찢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검은 안개 대진이 마침내 폭발했고, 두꺼운 검은 안개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곡현성반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기둥이 피식 하는 소리를 내며 남아 있는 검은 안개에 몇 장 크기의 구멍을 뚫자 그 너머의 상황이 어렴풋이 보였다.
맹렬한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흩어지자 도향 등도 크게 휘청거렸고,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너무 작아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은빛이 구멍 앞에 나타나더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도향은 몸에서 분홍색 빛을 반짝이며 바로 몸을 가누고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별빛이 갈라진 구멍을 뒤덮었다.
“진법이 열렸으니 들어가죠.”
그녀가 염열 등에게 말하고는 유홍, 이표와 앞장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뒤처질세라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보니 눈앞에 거대한 섬과 하늘이 펼쳐졌다.
모두가 들어온 것을 본 도향이 결인하자 곡현성반의 은빛이 사라졌다.
한데 도향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구멍을 뚫을 때 바로 곡현성반의 힘을 이용하여 어떤 둔술이든 들어오면 바로 반응이 오도록 했지만, 그들 일곱 명을 제외하고는 성반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누군가 잠복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착각이었나?’
주위를 살핀 만수진인과 염열은 말없이 저 멀리 사라졌다.
“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소.”
전삼칠도 인사를 남기고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고, 귀등상인도 마찬가지로 회색 구름으로 변하여 그곳에서 사라졌다.
도향은 이런 상황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들 두 무리가 창궁 비경에서 찾아낸 동부는 이미 한두 채가 아니었고, 중요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은 위험천만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 따로 움직였다.
도향은 소매를 휘둘러 분홍색 빛으로 유홍과 이표를 감싸고는 마찬가지로 섬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아래 섬의 어느 은폐된 곳에서 은빛이 반짝이더니 신서가 허공에 나타났다. 이 쥐는 입에서 거울을 뱉어냈는데, 바로 소요경이었다.
거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심협이 튀어나왔다. 그는 여전히 연연나금의를 걸치고 있었다.
“잘했다.”
그는 신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연수단을 하나 먹인 뒤 소요경을 들었다.
지난 3년간 그는 자신과 소요경의 연결을 풀고 신서에게 연화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은 소요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신서는 다시 소요경을 몸 안에 넣어서 그를 데리고 공간 둔행으로 수많은 금제를 쉽게 뚫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서는 영지가 높지 않아서 소요경 안의 수많은 보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통령 표식으로 신서를 제어할 수 있으니 이 방법으로 계속 소요경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제법 훌륭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이 아니었으면 벌써 도향에게 발각됐을 거다.”
화령자의 전음이 들려왔다.
심협은 말없이 허공을 살피다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등상인이 날아간 방향이었다.
천기성 교역회에서 그를 잡고 싶었지만 연이어 터진 일 때문에 놓쳤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자를 잡아서 그때 사우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귀등상인을 잡아서 물어볼 게 있는데 이 섬은 크지 않으니 싸우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거야. 그걸 가릴 방법이 없을까?”
심협이 전음으로 화령자에게 물었다.
“좋은 생각이다. 귀등상인은 그들 중에서 가장 약하니까 그에게서 만수진인 등의 그동안의 상황을 알아내면 되겠군. 내가 금제를 설치해 막아줄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화령자는 심협의 뜻을 오해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심협도 굳이 설명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둔광으로 변하여 귀등상인을 쫓아갔다.
신서는 연수단을 모두 먹은 뒤 한 발 앞서서 귀등상인을 추적했다. 그가 이전에 귀등상인에 남겼던 신식 표식은 3년이 지나면서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심협은 추격 도중에 주위의 섬들을 둘러봤다. 검은 안개 금제 때문에 섬은 어두웠지만, 심협에게는 당연히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섬은 눈에 들어오는 곳마다 황량한 사막이었고, 검은 자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는 그나마 초록색이 좀 보였는데, 그곳에는 낮지 않은 산 몇 개와 무성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는 듯했다.
‘이렇게 황량한 곳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 자는 없을 텐데……?’
심협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는 귀등상인을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섬 서북쪽의 황량한 산에 도착했다. 신서의 추적에 따르면 귀등상인은 이 황량한 섬에 동부를 파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잘됐군.”
심협은 화령자에게 기운을 차단하는 금제 설치를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