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03화 (903/1,214)

903화. 청구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니 멀리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폭이 백여 장에 이르러 천기성 전체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저쪽은……?”

복 장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방…… 안 돼!”

심협은 곧장 둔광으로 변하여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를 본 무명 장로가 명령을 내렸다.

“복 장로,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거청천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동향을 살피게. 혹시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체포하고, 필요하다면 사살해도 좋네.”

“알겠네.”

복 장로가 대답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다.

“막망, 자네는 언무사를 찾아서 안전을 확보하게.”

막망 장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

남은 사람들은 무명 장로와 함께 공방 쪽으로 향했다.

한편, 연언 공방에 도착한 심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이 나갔다.

연언 공방은 완전히 평지가 되어 있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러진 담벼락과 불길에 타버린 시커먼 흔적들뿐이었다.

“채주! 만벽 장로님!”

심협이 미친 듯 외치면서 신식을 펼쳐 폐허를 샅샅이 훑었다.

그때, 무너진 담벼락이 들썩이더니 섭채주가 나왔다.

“오라버니, 저 여기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심협은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섭채주는 옷이 피로 물든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발끝에는 마찬가지로 온몸이 피투성이인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바로 만벽 장로였다.

“채주, 괜찮아? 다친 곳은?”

심협이 초조해하며 황급히 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가벼운 상처예요. 그런데 만벽 장로님의 상처가 심각해요.”

심협은 섭채주에게 큰 탈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만벽 장로의 상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도착했을 때 영력 파동을 차단하는 법진이 덮여 있었어요. 만벽 장로님이 걱정돼 진을 부수고 들어와보니 세 사람이 장로님을 협공하고 있었어요. 그때 이미 중상을 입으신 것 같았어요.”

“무명 장로님 쪽도 습격이 있었는데 다치지는 않으셨어. 습격한 자들은……?”

심협이 만벽 장로에게 단약을 먹였다.

“그들은 제가 온 걸 보고는 한 명이 저를 막았고, 남은 둘은 계속해서 만벽 장로님을 공격해 중상을 입히고는 붉은색 공을 하나 던지고 도망쳤어요. 장로님을 보호하느라 그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지 못했고요.”

“이놈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그때, 천기성 곳곳에서 또 폭음이 들려왔고, 어둠 속에서 하늘 높이 불꽃이 솟아올랐다.

이 무렵 무명 장로도 사람들과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사정을 듣고 나서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던 중 무명 장로는 갑자기 표정이 급변하더니 하늘을 돌아봤다. 기관성이 먼 곳에서 하늘로 올라와 천기성 상공에 나타났다.

“천기성 제자들은 들어라! 난 초대 성주 거원의 후손이다. 이전에 빼앗긴 성주의 자리를 되찾고자 한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지만 반항하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다!”

누군가가 기관성 위에서 소리쳤다.

“거청천…….”

무명 장로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저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요? 선배님을 이기지 못할 걸 알고는 먼저 공격을 강행한 걸까요?”

심협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기는 했네.”

무명 장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배님께는 여마마 한 명을 보냈으면서 만벽 장로님께는 세 명을 보낸 이유는 뭘까요? 다음 대결을 생각하면 선배님을 막는 것이 맞을 텐데요.”

“자네 말이 옳군. 뭔가 이치에 안 맞아.”

무명 장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들이 만벽 장로님을 쓰러트린 후에 몸을 뒤적거리더니 저물 반지 두 깨를 가져갔어요!”

섭채주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서둘러 말했다.

이를 들은 무명 장로가 몸을 숙이고 만벽 장로의 몸을 수색했다.

“어쩌면 저들의 목표는 원래부터 만벽이었을지도…….”

그의 표정이 더욱 신중해졌다.

“설마 만벽 장로님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장로 영패로군.”

“영패로 뭘 하려는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군.”

그때, 머리 위에서 갑자기 불꽃이 번쩍였다. 뒤이어 기관성에서 굉음이 들려오더니 거대한 불꽃이 유성처럼 사방으로 떨어졌다.

성 곳곳이 공격을 받아 여기저기서 불꽃이 치솟았다.

“저놈이 감히!”

무명 장로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곧이어 성 위에 사람들이 빼곡히 나타나더니 일제히 천기성으로 뛰어내렸다.

자세히 보니 그 절반은 언갑 꼭두각시였다. 체형은 모두 달랐는데, 기운의 파동은 최소한 대승기 이상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검은 옷을 입은 대승기 이상의 수사들이었다.

이를 본 무명 장로가 손을 휘두르자 소매에서 붉은 빛이 밤하늘로 올라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터졌다.

붉은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위(危)자가 떠올랐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발동하는 위존령(危存令)이었다. 이는 천기성이 전대미문의 위기에 빠졌으니 성의 모든 사람을 동원하여 성을 보호하라는 의미였다.

천기성에서 갑자기 몇 줄기의 빛이 하늘로 치솟더니 언문이 성벽 곳곳에서 번득였고, 뒤이어 거대한 금색 광막이 솟아올라 천기성 전체를 뒤덮었다.

곧바로 성 곳곳에서 죽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언갑 꼭두각시들이 모두 출동했는데, 그 수는 기관성에서 날아든 언갑들의 몇 배나 됐다. 그것들은 벌떼처럼 일제히 기관성을 향해 날아갔다.

“네놈들이 감히 천기성을 공격하다니,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무명 장로가 기관성의 거청천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광경을 본 심협도 가슴이 떨려왔다.

무명 장로는 제자에게 만벽 장로를 보호하게 하고는 바로 심협에게 말했다.

“심 도우, 상황이 급하니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말씀하십시오.”

심협이 포권하며 말했다.

“부해(扶海) 장로, 옥길(玉吉) 장로. 두 사람은 멸육(滅戮)을 발동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기관성을 격파하고 조종하는 수사는 한 놈도 살려두지 말게.”

무명 장로가 뒤의 두 명의 장로에게 말했다.

“존명!”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무명 장로에게서 금권(金券) 한 장을 받아 들고는 발길을 돌렸다.

“심 도우, 우리도 가세.”

“가다니요? 그럼 거청천은요?”

“자세히 보게. 저 거청천은 언갑일세. 진짜는 아마 다른 곳에 있을 게야.”

무명 장로의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 영목 신통을 발동해보니 정말로 성 위의 거청천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래서 수하들 없이 혼자 나온 거였군요. 그렇다면 저들의 마구잡이 공격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네. 그들은 아마 천기성 장로 영패를 얻으려고 온갖 시도를 하고 있을 걸세. 아마 진짜 목적은 바로 저것이겠지.”

무명 장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두운 밤에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있는 거대한 존재가 보였다.

“경천지계…….”

심협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가면서 얘기하세. 저들은 이미 경천지계의 금제를 파훼했을 게야.”

무명 장로는 빠르게 내달리며 말했고, 심협과 섭채주가 급히 따랐다.

“경천지계는 천기성을 보호하는 중요한 힘이 아니었습니까? 오직 성주님만이 발동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심협이 뒤를 따르며 물었다.

“통상적으로는 그러하지. 다만,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오대 장로의 영패로도 경천지계를 조종할 수 있다네.”

“저들에게는 두 개뿐이니 아직은 조종하지 못하겠군요.”

“그렇긴 하나 거청천이 초대 성주 거원의 후손인 것을 잊지 말게. 경천지계는 본래 초대 성주님이 만든 것이고, 그 안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지 모르네. 그의 후손만이 아는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기성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뇌광과 불꽃이 사방에서 번쩍였고 굉음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심협은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뒤를 돌아봤다. 거의 10장에 이르는 거대한 붉은색 언갑이 뒤쪽에서 솟아올랐다. 목 위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머리는 각각 전방과 후방을 바라봤고, 허리에는 네 개의 팔이 달려 있었다. 손에는 각각 도와 검, 도끼, 작살을 들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심협은 이것이 무명 장로가 말한 멸육이라는 언갑임을 알 수 있었다.

심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력은 태을 수사 정도였기에 두 명의 장로가 동시에 제어해야만 감당할 수 있었다.

거대한 언갑이 두 다리를 굽히더니 갑자기 날아올라 허공의 기관성을 짓밟아 나갔다.

쾅! 쾅!

하늘이 뒤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기관성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곧이어 기관성에서 죽이라는 외침이 들려오더니 몇 명이 둔광을 번득이며 허공에 있는 멸육 언갑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심협은 그 와중에 매우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어딘가를 유심히 살폈다.

허공에서 법보로 멸육 언갑을 공격하는 사람 중에 매우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청구 호족의 유려 장로였다.

심협은 우뚝 굳어 버렸다.

그는 다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주위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에게서 호족의 특징이 보였다. 정말로 청구 호족 사람들인 것이었다.

“심 도우, 왜 그러나?”

무명 장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천기성을 침공한 게 아무래도 청구 호족 같습니다.”

심협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뭐라? 청구 호족이? 저들이 정녕 죽고 싶은 건가? 장안성에서 소란을 피우더니 이제는 감히 천기성에 쳐들어와?”

“아무래도 이번 일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합니다.”

“이쪽은 다른 장로들이 잘 처리해줄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우리는 서둘러 경천지계로 가야 하네. 그곳이 적에게 넘어간다면 천기성은 더 큰 혼란에 빠질 걸세.”

무명 장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부자 선배님은……?”

“안 그래도 아까 낮에 가봤는데, 성주님의 이번 폐관은 매우 중요하니 아마 나오시기 힘들 걸세. 자칫하면 이번 폐관이 물거품이 될 게야. 그러니 지금은 우리 힘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

무명 장로는 이번 소부자의 폐관 목적을 알지 못했지만, 단지 심협과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바깥 일을 잘 처리해서 침입자를 모두 몰아내면 성주님께서도 안심하실 걸세.”

“알겠습니다.”

무명 장로의 위로에 심협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갑과 청구 호족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무명 장로와 심협은 가볍게 처리했고, 세 사람은 금방 경천지계 아래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음에도 심협은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 조용히 서 있는 거인에게서 마치 태을 수사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무명 장로는 자신의 장로 영패를 꺼내서 경천지계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영패의 언문이 하나둘 밝아졌다.

뒤이어 빛이 거인의 다리 아래서 빠르게 떠오르더니 마치 한 줄기 빛처럼 거인을 둘러싸며 곧장 하늘 높이 치솟았고, 빠르게 구름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금제가 열렸으니 들어가세.”

세 사람은 곧장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이내 경천지계의 팔에 도착했다. 그곳에 서자 거인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천기성의 상성(上城)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재 혼란에 빠진 하성(下城)과는 달리 상성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어찌 된 일이죠? 저들이 상성까지는 쳐들어가지 못한 걸까요?”

“상성의 금제는 초대 성주가 설치한 것 외에도 이대 성주님과 현 성주님이 추가로 설치하셨지. 천기성이 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발동하게 되어 있네. 거청천이 초대 성주님의 금제를 풀 방법을 안다 해도 다른 두 개의 금제를 바로 풀지는 못했겠지.”

“상성에 없다고요? 그럼 경천지계를 조종할 수 있는 장치는 어디에 있나요?”

“아마 저쪽이겠지?”

섭채주의 물음에 심협이 고개를 들어 거인의 거대한 머리를 가리켰다.

거인의 얼굴은 마치 칼로 깎은 것처럼 각이 졌고, 아무런 표정도 없어서 마치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는 무정한 신령처럼 차가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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